찬불가 운동<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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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광사 작성일2005.10.20 조회4,667회 댓글0건본문
찬불가에 있어서 서창업의 또다른 공헌은 바로 합창단의 창립이다. 74년 도선사, 동덕여고 보리합창단, 75년 육군본부 마하야나, 명성여고, 동대부고, 칠보어린이, 조계사, 삼보합창단을 78년에는 서울불청, 불광법회 바라밀합창단, 82년 봉국사, 일붕선원, 중앙합창단, 가릉빈가합창단 84년 법련사 불일, 대원정사, 봉은사합창단 등을 창립했다.
지금 돌아보면 오늘날 합창단을 이끌고 있는 굵직굵직한 합창단 대부분은 서창업이 창단한 것이다. 서창업의 합창단 창단 역사는 86년 한마음 합창단을 창립하고 그곳에 몸을 담으면서부터다.
서윤재씨의 회고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치신 때였습니다. 경제적으로 체력적으로도 여력이 없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합창단에서 지도를 부탁하며 밤 새워 달려가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서창업은 단순한 작곡가를 넘어서 당시로서는 이론과 실천을 한꺼번에 체현한 ‘멀티찬불가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창업의 찬불가의 업적은 아직 복원되지 않고 있다. 한 곳에 머물게 된 것은 두가지 이유가 존재한다. 첫째는 80년대 초반이후 전국사찰에서는 합창단 창단바람이 우후죽순으로 불었다. 그와 함께 불교합창단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는 합창 지휘자들이 영입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한마음선원에 안착한 서창업은 불교음악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 당시 서창업은 한 신문사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독백을 한다. “제자들은 지난 15년을 가리켜 150년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너무 과하고 한 50년은 지난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을 찬불가에 바쳐온 개척자가 생의 황혼기에서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열정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부처님의 일생을 노래한 사상 최초의 불교오페라 〈석가여래〉가 작곡되고 있었던 것이다.
불행한 찬불가음악인 서창업씨
불교 오페라 ‘석가여래’ 완성못해
서창업은 당시 오페라 〈석가여래〉에 대해 이렇게 밝히고 있다. “6년전 어느날 느닷없이 이 작품에 대한 영감을 얻었습니다. 장엄한 화음과 대합창 그리고 무대의 모습이 한꺼번에 떠오르면서 내 영혼을 흔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가지 구상에만 전념하며 악상이 떠오를 때마다 메모를 해왔습니다.”
한국찬불가 사상 최대의 이변이 될 〈석가여래〉는 매우 특이했다. 공연시간 2시간 4막의 오페라였던 〈석가여래〉는 서양의 오페라같지만 담겨지는 음악과 분위기는 전혀 새로운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장조와 단조를 혼합 수용한 새로운 조성(調聲)으로서 동서음악을 통합한 특이한 형식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윤재씨의 회고. “지금 보아도 매우 특이한 형식입니다. 제 1막은 마야부인이 룸비니동산에서 부처님을 낳는 모습 그리고 2막에서는 출가까지의 과정 소상히 그리고 있습니다. 3막은 부처님의 설법포교과정 4막은 열반과정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아버님의 건강은 극도로 안 좋으셨습니다. 그러나 석가여래는 꼭 완성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버님은 결국 목표를 이루지 못하셨습니다.”
서창업은 그토록 원했던 〈석가여래〉를 완성하지 못했다. 그가 그토록 염원했던 “음악을 통해 세상을 평등케하는 것 그것이 저의 유일하고 영원한 보살정신”을 스스로의 손으로 실현하지 못했던 것이다. 서윤재씨의 회고 “아버님이 남기신 유작은 약 200여곡 정도 됩니다. 저에게 아버님의 음악을 감당할 수 없으면 세상에 내보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제가 능력이 되는 한 가리고 추리고 있습니다.” 오직 찬불가를 위해 전 생애를 바쳤던 서창업은 불교계 내에서 조차 그의 업적이 추모되지 않고 있다. 그가 현대찬불가에 남긴 족적은 그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커다란 족적이었다. 작곡가로 지휘자로 연구자로 그리고 평론가로 ‘멀티미디어 찬불가인’이자 참다운 불교음악인이었던 서창업은 찬불가의 역사에서도 조명받지 못하고 1989년 10월21일 저녁 10시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히 퇴장하고 만 것이다.
이상균 기자
[불교신문 2039호/ 6월15일자]
지금 돌아보면 오늘날 합창단을 이끌고 있는 굵직굵직한 합창단 대부분은 서창업이 창단한 것이다. 서창업의 합창단 창단 역사는 86년 한마음 합창단을 창립하고 그곳에 몸을 담으면서부터다.
서윤재씨의 회고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치신 때였습니다. 경제적으로 체력적으로도 여력이 없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합창단에서 지도를 부탁하며 밤 새워 달려가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서창업은 단순한 작곡가를 넘어서 당시로서는 이론과 실천을 한꺼번에 체현한 ‘멀티찬불가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창업의 찬불가의 업적은 아직 복원되지 않고 있다. 한 곳에 머물게 된 것은 두가지 이유가 존재한다. 첫째는 80년대 초반이후 전국사찰에서는 합창단 창단바람이 우후죽순으로 불었다. 그와 함께 불교합창단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는 합창 지휘자들이 영입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한마음선원에 안착한 서창업은 불교음악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 당시 서창업은 한 신문사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독백을 한다. “제자들은 지난 15년을 가리켜 150년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너무 과하고 한 50년은 지난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을 찬불가에 바쳐온 개척자가 생의 황혼기에서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열정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부처님의 일생을 노래한 사상 최초의 불교오페라 〈석가여래〉가 작곡되고 있었던 것이다.
불행한 찬불가음악인 서창업씨
불교 오페라 ‘석가여래’ 완성못해
서창업은 당시 오페라 〈석가여래〉에 대해 이렇게 밝히고 있다. “6년전 어느날 느닷없이 이 작품에 대한 영감을 얻었습니다. 장엄한 화음과 대합창 그리고 무대의 모습이 한꺼번에 떠오르면서 내 영혼을 흔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가지 구상에만 전념하며 악상이 떠오를 때마다 메모를 해왔습니다.”
한국찬불가 사상 최대의 이변이 될 〈석가여래〉는 매우 특이했다. 공연시간 2시간 4막의 오페라였던 〈석가여래〉는 서양의 오페라같지만 담겨지는 음악과 분위기는 전혀 새로운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장조와 단조를 혼합 수용한 새로운 조성(調聲)으로서 동서음악을 통합한 특이한 형식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윤재씨의 회고. “지금 보아도 매우 특이한 형식입니다. 제 1막은 마야부인이 룸비니동산에서 부처님을 낳는 모습 그리고 2막에서는 출가까지의 과정 소상히 그리고 있습니다. 3막은 부처님의 설법포교과정 4막은 열반과정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아버님의 건강은 극도로 안 좋으셨습니다. 그러나 석가여래는 꼭 완성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버님은 결국 목표를 이루지 못하셨습니다.”
서창업은 그토록 원했던 〈석가여래〉를 완성하지 못했다. 그가 그토록 염원했던 “음악을 통해 세상을 평등케하는 것 그것이 저의 유일하고 영원한 보살정신”을 스스로의 손으로 실현하지 못했던 것이다. 서윤재씨의 회고 “아버님이 남기신 유작은 약 200여곡 정도 됩니다. 저에게 아버님의 음악을 감당할 수 없으면 세상에 내보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제가 능력이 되는 한 가리고 추리고 있습니다.” 오직 찬불가를 위해 전 생애를 바쳤던 서창업은 불교계 내에서 조차 그의 업적이 추모되지 않고 있다. 그가 현대찬불가에 남긴 족적은 그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커다란 족적이었다. 작곡가로 지휘자로 연구자로 그리고 평론가로 ‘멀티미디어 찬불가인’이자 참다운 불교음악인이었던 서창업은 찬불가의 역사에서도 조명받지 못하고 1989년 10월21일 저녁 10시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히 퇴장하고 만 것이다.
이상균 기자
[불교신문 2039호/ 6월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