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 30주년 맞는 우리시대의 등불, 불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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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광사 작성일2005.10.20 조회4,688회 댓글0건본문
사회 광명화 발원 <사진설명>89년 불광의 ''''태릉 바라밀 체육대회''''에 동참한 회주 광덕 스님이 한 어린이 불자와 달리기를 하고 있다.
74년 9월 발족
출판-교육 주도
1974년 9월 불광회 창립. 1974년 11월 월간「불광」창간.
“반야사상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활을 밝게 하고, 성공과 행복과 발전을 이루어, 우리와 사회의 광명화를 도모한다”는 ‘불광(佛光) 선언’을 한 불광이 창립 30주년을 맞았다.
불광은 용성 스님의 각(覺)사상과 선, 염불, 진언 등 모든 실천 수행을 깨달음이라고 하는 품으로 끌어 안아 원융한 선포교의 법맥을 계승한 광덕 스님의 원력으로 출발했다. 창립과 함께 선언했듯이 불광은 부처님의 반야광명으로 인간의 마음과 삶을 밝게 비춤으로써 인간과 사회의 성공과 행복, 번영을 실현하는 불교대중화 운동을 지난 30여년간 펼쳐왔다.
불광회 창립 직후 불광운동은 힘차고 빠르게 퍼져가 불광의 입지를 공고히 해 세간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창립 초기 43명의 회원이 1년만에 480여명으로 불어난 사실의 단면만 보아도 불광의 힘을 엿볼 수 있다.
1982년 10월 잠실 불광사를 준공 입주하면서 불광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독자적인 도량을 일궈 낸 불광법회 대중들의 원력은 지금도 귀감이 된다. 대중들은 ‘불광바라밀 운동의 근본도량을 우리 힘으로 만든다’는 큰 꿈을 갖고 1978년 6월 법당봉납발원법회를 계기로 구체적인 모금활동을 전개했다. 법회 때 1,000원 보시를 전개해 200구좌를 조성하고, ‘1인 1평 사기(10만원) 운동’을 벌였다. 800여명의 회원들이 통장을 만들었고 회원 간부들은 시장을 돌며 화주를 받기도 했다. 1천여명의 대중과 2만여명의 화주가 쌓아올린 ‘대중들의 공든 탑’ 불광바라밀운동의 근본도량 불광사는 이렇게 건립된 것이다.
불광사 건립을 계기로 불광운동은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며 숙원불사를 과감하게 전개해 갔다. 1987년 3월1일 불광유치원이 문을 열어 어린이 포교의 장을 열었다. 불광회의 소속 단체들도 활기를 띠었다. 합창단과 연화부, 다도부, 보문부, 사경부, 법륜부, 무용단, 자원봉사단, 도서실 등 다양한 활동이 전개됐으며 인재육성을 위한 교육 사업도 교육원을 중심으로 체계화 돼 현재는 불교대학원까지 마련해 놓은 상태다. 1999년 9월에는 인터넷 불광 홈페이지 개설로 현대인들에게 더욱 다가가는 또 하나의 디딤돌을 놓았다.
불광운동을 사회 속으로 파급하게 한 첨병은 바로 월간 「불광」이라 할 것이다. 월간 「불광」은 창간 초기부터 단순한 불광사 홍보에 급급하지 않았다. 초기불교를 오늘날 시각에서 재조명하며 근본불교가 오늘날 주는 의미를 되새겨 갔다.
더욱이 교리와 신행-수행에 무게를 두어 불자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른 실천행동과 수행정신을 고양시켰다. 또한 교양과 불교문화 부분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월간 「불광」의 이러한 노력은 산중의 수행을 우리 곁으로 다가오게 하는데 일조했으며 방치됐던 불교문화를 우리 앞에 새롭게 드러내 보여 그 우수성과 소중함을 일깨우게 했다.
1994년 제3회 문공부 우수잡지로 선정된 월간 불광의 성공에 힘입어 1979년 마련한 ‘불광출판부’는 문서포교의 역군으로서의 역할을 더욱 돈독히 했다. 현재 바라밀총성, 선문총서, 불광불학총서 등의 다양한 기획시리즈물 등 200여종에 달하는 불서를 발행 불법을 전하고 있다.
교리, 수행, 문화라는 세 코드로 법음을 전했던 불광의 30년 세월은 우리 시대의 큰 등불이었다.
채한기 기자 penshoot@beopbo.com
<2004-09-25/77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