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곁으로 다시 온 스님 - 소천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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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광사 작성일2005.10.20 조회5,396회 댓글0건본문
금강경 강의 전국서 130여회 구국.호법.정화운동 적극 참여 중국에서 돌아온 소천(昭天. 1897~1978)스님은 〈금강경(金剛經)〉을 다시 읽고 크게 깨달음을 구했다. 1924년부터 1935년까지 10여 년간 금강경을 독파(讀破)하고 깊이 있게 공부한 스님은 〈금강경강의(金剛經講義)〉를 펴내고 중생구제에 적극 나섰다. 전국 각지를 만행하면서 중생들을 직접 만나 불법(佛法)을 설한 스님은 1941년 경기도 파주에 토굴을 짓고 정진에 전념했다. 스님의 행장과 법문을 담은 〈소천선사문집〉에는 “토굴에 머물며 불교포교와 민중의 민족정신 함양을 위해 진력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8ㆍ15 해방을 맞이한 스님은 “일제로부터 해방은 되었지만 국토의 분단과 좌ㆍ우익의 대립으로 민족이 누란의 위협에 처해 있다”면서 이를 막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스님은 〈바른정신〉 〈독립의 넋〉 〈인류업행개조운동〉 등의 원고를 집필했지만 출판되지는 못했다. 1952년 부산 범어사에서 용성스님을 은사로 동산스님을 계사로 출가사문이 됐다. 엄격한 은사 밑에서 용맹 정진한 스님은 1953년 57세의 나이로 국민 계몽운동에 적극 나섰다. 출가 이전부터 깊은 감명을 받은 〈금강경〉을 번역 출판해 24곳에 이르는 전국 각지에서 130여 차례의 강연과 법회를 개최했다. 특히 〈금강경〉 등 포교서적을 3만3000부나 간행하면서 ‘금강경독송구국원력대’를 조직해 구국구세(救國救世) 호법운동(護法運動)을 전개했다. 스님은 1958년부터 불교정화운동에도 적극 투신했다. 1959년 정화교단의 초대 교무부장 소임을 맡았으며, 서울 대각사와 경주 불국사 구례 화엄사 주지 등을 맡으며 정화불사에 헌신했다. 불교정화와 국민자각운동을 펼치는 와중에도 〈활공원론(活功原論)〉 〈근본진리에서 본 구세방략(救世方略)〉 〈금강경과 각운동(覺運動)〉을 간행했다. 1964년 통합종단 출범으로 종단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가자, 스님은 1965년부터 인천 보각사에 주석하면서 참선과 교화운동에 열정을 쏟았다. 고희를 두해나 넘긴 1968년에는 〈반야심경 강의〉 〈원각경 강의〉 등을 간행했으며, 1970년에는 〈전쟁 없는 새 세계 건설의 원리와 방법〉이란 제목의 저술을 펴냈다. 소천스님은 1978년 4월15일 부산 범어사에서 원적에 들었다. 세수는 82세. 스님의 법구는 다비 후 사리를 거둬 범어사 부도전에 모셨다. 광덕(光德)스님은 〈소천선사문집〉의 간행사에서 “조국이 위태롭고 겨레가 어육(魚肉)이 되고 국토가 분단되며 세계가 전쟁의 물결 속에 표류하는데, 이 때에 구경각(究竟覺)의 종교로서의 불법의 존재이유가 무엇인가를 노사(老師)는 몸으로 보여주셨다”고 밝히고 있다. 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그동안 ‘우리 곁으로 다시 온 스님이야기’를 애독해주신 독자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불교신문 2160호/ 9월7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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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03 오후 1:07:29 등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