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덕 스님 행장 - 불교 대중화 현대화 선각자 > 언론에 비친 불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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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 비친 불광

광덕 스님 행장 - 불교 대중화 현대화 선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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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광사 작성일2005.10.20 조회4,85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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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7일 입적한 금하당 광덕 스님은 불광법회 법주와 월간 불광 발행인, 대각회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대중교화와 문서포교에 지대한 역할을 한 선지식이었다. 용성 - 동산으로 이어지는 선맥을 계승했고, 특히 불광법회를 통해 한국불교의 현대화·대중화에 새로운 장을 연 선각자로 평가받고 있다.

유교적 가풍에서 자란 광덕 스님은 어릴 적부터 말수가 적고 총명하여 공부를 잘했고, 노래와 작문에 뛰어난 재질을 보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장차 큰 일을 할 재목이라는 기대를 받았다. 독학으로 공부에 열중한 나머지 건강 마저 해치게 된 스님은 당시 석학이었던 서울대 박종홍 교수의 추천으로 휴식차 3개월을 기한으로 범어사에 갔다가 동산 대종사와 인연이 돼 인생의 대전환점을 맞게 됐다.

광덕 스님은 범어사에서 조실 동산 대종사로부터 “꿈 속에 있을 때는 꿈이 너라고 하자. 생각이 있을 때는 생각이 너라고 하자. 꿈도 없고, 생각도없을 때 너는 뭐냐, 가져와 봐라.”는 말을 듣고 정진을 거듭하다가 말과 이론 이전의 생명 그 자체, 참으로 있는 것을 깨닫고는 곧바로 선방에 들어정진을 계속했다. 스님은 24세에 입산한 후 범어사 금어선원, 마산 장춘사등 제방선원과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인 죽도 등지에서 각고의 참선 정진을 하며 계정혜 삼학을 원만히 닦았다.

1956년에는 대각사 주지 소천 스님의 각사상 법회개최 이후 총재 청담 스님, 명예총재 성철 스님과 함께 대각회를 조직하여 인간의 청정본연의 각성을 깨닫게 하는 데 일신을 바쳤다. 또 가정과 사회와 세계에 평화번영을 이루고 나아가 필경 성불하는 대도라 할 보현행원 사상을 몸소 실천하는 보현행자로서 각행운동을 펼쳤다.

종단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는 총무원의 총무국장, 교무부장, 종회의장단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종헌종법 제정 등 종무행정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총무원의 소임을 살면서도 언제나 불교가 젊어져야 한다는 소신 아래 젊은 불자, 특히 대학생 불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갖고 직접 지도에 나서기도 했다. 승가대학의 필요성을 절감해 중앙승가대학 설립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동국학원 이사를 맡아 학원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일찍이 문서포교 및 법회 활성화의 중요성을 인식, 1974년 도심 속에서 불광법회를 창립하고, 같은 해 11월 월간 〈불광〉을 창간했다.
1979년에는 불광바라밀다 합창단을 조직하는 등 불교음악에도 큰 관심을 기울여 무관심 속에 쇠퇴일로에 있던 불교음악을 융성시키는데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

이처럼 광덕 스님은 혹독하게 수행을 독려하고, 스스로 계행과 수행에 철저했다. 전통적인 규율과 종단의 규칙을 철저히 준수하면서도 철저한 개혁가로서 선각자적인 포교활동을 펼쳤다. 말 그대로 스님은 도심포교의 효시이자 청년·대학생 포교의 선구자로, 한국불교 현대화에 큰 거목이었다.

스님은 용성 대종사의 선맥을 이어받아 선이야 말로 진리생명을 개현하는 최고의 수행이라는 신념으로 용맹정진을 거듭하시면서도 좌복 위에 결박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고 대중 속에서 활선을 행하는 참선지식의 면모를 입멸 순간까지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잃지 않았다.

<1999-03-10/50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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