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고승 20선<49> 광덕 대선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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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광사 작성일2005.10.20 조회4,707회 댓글0건본문
금강반야사상 통해 救國·救世 앞장
광덕(光德)이 처음 동산(東山) 화상을 친견했을 때, 동산이 물었다.
“꿈속에 있을 때는 꿈꾸는 거라고 하자. 생각이 있을 때는 생각이라고 하자. 꿈도 없고, 생각도 없을 때, 너는 뭐냐? 어디 가져와 봐라.”
광덕은 그때 답을 하지 못했다. 그 말의 뜻을 제대로 몰랐기 때문이다. 내가 뭘까? 이리저리 따져보았지만 영 감이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 날, 또 다음 날에도 온갖 생각을 하고, 이론적으로 그럴듯한 해답을 구해 적당히 넘겨보려 했지만 그때마다 무참히 쫓겨났다. 그렇게 쫓겨나기를 7일간이나 거듭했다.
차츰 광덕은 스스로가 비참해짐을 느꼈다. 절에 올 때만 해도 건방진 마음이 남아 있어서 안하무인으로 고개를 들고 다녔던 열혈청년의 만용은 그렇게 시나브로 스러지고 있었다.
광덕과 그의 스승 동산 화상의 첫 만남은 이처럼 선적(禪的)이었다. 하기야 동산은 당대 최고의 선장(禪匠)으로 한국불교의 선종을 진작시킨 선봉장이었으니, 한 눈에 선기(禪機)가 출중한 재목을 만난 그가 선적 대화를 나누지 않을 리 있었겠는가.
제자가 은사를 그리워하는 정이 각별한 것은 절집에 드문 일은 아니지만 광덕의 스승을 존숭하고 공경하는 마음은 유별날 정도로 지극했다.
스무 살에 늦깎이로 출가한 것이나, 대승경전에 대한 깊은 연찬을 한 것, 화두참구(話頭參究)와 용맹정진(勇猛精進), 청정계맥(淸淨戒脈) 전승과 전파, 제방납자(諸方衲子)들의 제접과 대규모 사부대중의 교화, 비구 정통종단 확립, 대중공양, 운력, 입적하는 날까지 한 번도 거르지 않은 조석예불, 온화한 미소와 다함없는 인정 등 스승 동산이 이룩한 가풍은 온전히 광덕의 가풍으로 이어졌으니 그의 스승에 대한 각별함이 어느 정도인가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동산의 이러한 가풍 속에서 광덕의 인격이 함양되고 법기(法器)가 성숙되었으니 이는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광덕에게 있어 동산 화상은 법(法)의 엄부(嚴父)이고 정(情)의 자모(慈母)였던 것이다.
광덕은 늘 방 한쪽에 은사(恩師)의 사진을 모셔놓고 주야로 우러러보며 살았다. 그만큼 스승에 대한 사모의 간절함이 지극했던 것이다. 다음은 그의 스승에 대한 술회 내용.
“절에 와서 머리를 깎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돌이켜보면, 모두가 부처님께서 인도하신 까닭이라고 굳게 믿지. 이런 점에서 내 출가생활을 돌이켜보면, 먼저 노당(老堂)스님(동산노사) 은혜가 막중해. 무엇으로도 비유해 말하지 못해.”
광덕의 정신적 사상적 영향을 미친 스승들은 은사 동산 화상과 함께 동산의 은사인 용성(龍城) 화상, 그리고 금강반야(金剛般若) 사상을 통해 구국구세(救國救世) 운동을 펼친 소천(韶天) 선사 세 분이라고 할 수 있다. 용성, 동산, 소천이라고 하는 뛰어난 선사들의 정맥을 이어 인천(人天)의 스승길에 접어든 광덕, 그런 그가 불교현대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 지도 모른다.
광덕은 1927년 5월 1일(음 3월 3일) 삼짓날에 경기도 화성군 오산읍에서 아버지 고준학씨와 어머니 김동낭씨의 사이에서 2남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속명은 병완(秉完). 부모님은 모두 성품이 강직하고 깔끔했으며, 엄격한 유교적 가풍을 지니고 있었다.
병완은 매우 총명했다. 영특하고 효성스러워 부모의 속을 썩이는 일이 없었다. 소년시절부터 책읽기를 즐겨했고, 작문도 잘해 총독상을 받은 일도 있었다. 그러나, 부친이 돌아가면서 가세가 기울어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는 독학을 했다.
독학으로 당시 최초의 야간대학인 한국대학(지금의 서경대 전신)에 입학한 병완은 그곳에서 부처님과의 인연을 맺었다. 어머니를 따라 천주교 성당에 다녔던 그가 효봉 화상에게 수계를 받고 당대의 고승들과 친분이 두터웠을 정도로 불교에 박학했던 한국대학 설립자 한관섭 선생을 만남으로써 일생일대의 전환점이 맞게 된 것이다.
그러나 병완은 건강의 악화와 대학공부의 한계를 느껴, 대학을 채 마치지 못하고 한관섭 선생의 소개를 받아 금정산 범어사로 내려가 처사생활을 시작했다. 이것이 청년 병완을 당대의 고승 광덕으로 변모시키는 결정적인 전기가 된 것이다.
훗날 광덕은 이 시절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제겐 특별한 출가동기가 없습니다. 건강상 문제, 선생님의 권유로 선방에 구경을 갔다가 거기서 훌륭한 지도자를 만나 생활하는 가운데 새로운 세계, 평범한 인간계가 아닌 위대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 문을 한번 열어봐야겠다. 물러설 수 없다 해서 그 생활을 한 것이 3년이 되고 30년이 되고 40년이 넘고 한 것이지요.”
광덕은 스승 동산 화상의 첫 만남 이후 궁극의 경지가 말의 조화나 논리적 사변, 개념의 조합이나 분석 또는 이론의 전개를 가지고는 얻을 수 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선방으로 갔다. 수십 년 참선수행을 하는 선배 수좌들이 있는 선방에 스승의 특별한 배려로 한 자리를 얻어 수행을 시작했으니, 이미 동산 화상이 광덕의 그릇을 알아보고 탁마를 시작한 것이었다.
처사를 선방에 받아들인 것도 처음이고, 그런데도 조실(祖室)을 비롯해 선배 수좌들이 친절히 대해준 것도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동산 화상의 각별한 보살핌에 힘입은 것이겠지만 당시 선방대중들의 친절한 배려가 없었다면 그런 경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광덕을 따라 다니는 장애는 건강문제였다. 동산은 광덕의 이런 점을 배려해 미륵암이나 금강암, 기장포교당, 함안 칠원의 장춘사 등 작은 절에서 혼자 정진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건강이 악화되어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이런 과정에서 광덕은 자연스럽게 머리를 깎고 염의를 하게됐지만 불공은 드렸으되 축원과 법문은 결코 하지 않았다. 그것은 구족계를 받은 스님이어야 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여기서 광덕의 비구관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처사의 신분으로 수행을 하던 광덕은 1952년 범어사에서 동산 화상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그리고는 선방에서 정진하다가 이듬해 마침 범어사 금강암에 머물던 소천 선사와 만나 함께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금강경 구국구세(救國救世) 운동에 나섰다. 1년 남짓 이 운동을 하던 광덕은 다시 건강이 악화돼 범어사로 돌아왔다.
건강이 너무 좋지 않아 선방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열반당에 머물렀다. 그러나 광덕은 정진을 늦추지 않았다. 의사 출신인 스승 동산 화상의 따뜻한 보살핌 아래 정진은 계속됐다. 건강이 나아지면 선방으로 옮겼다가 다시 악화되면 열반당으로 와서 혼자 정진을 하는 과정이 계속됐다. 위도 잘라내고 폐도 잘라낸 몸으로 용맹정진을 거듭하는 것은 무리였지만 위법망구의 자세를 잃지 않은 광덕의 정신력 앞에서는 병마도 두 손을 드는 듯했다.
광덕은 그의 나이 서른이 되던 해, 마침내 구족계를 받고 비구가 됐다. 완전한 스님이 된 광덕, 그는 새롭게 맞이한 삶의 대전환을 위해 운수(雲水)의 길에 올랐다.
“꿈도 아니고 생각도 아닐 때, 나는 무엇이냐?”
광덕은 이 화두를 놓고 몸을 돌보지 않는 참구를 계속했다.
금정사에서 공부를 하던 어느 해 봄날, 마루턱에 앉아 앞산을 건너다보던 광덕은 문득 한 경계가 열리는 것을 보았다. 눈앞에 펼쳐지는 세계가 모두 달라짐을 느꼈다. 주관과 객관을 초월한 우주 삼라만상과 합일하는 세계, 느낌…. 기뻤다. 열락(悅樂)의 감흥에 젖어 광덕은 깨달음의 노래, 즉 ‘한마음 헌장’을 힘차게 불렀다.
그의 오도송(悟道頌)이자, 그가 깨달아 안 반야지견(般若知見)을 담고 있기도 한 ‘한마음 헌장’은 이렇다.
마음, 마음, 마음,
한마음
한마음은
마음이 아니다
관념이 아니다
생각이 아니다
하나이거나 둘이거나 수가 아니다
유(有)도 아니며 무(無)도 아니며
유무(有無) 초월의 유이거나 무도 아니다
일체 초월의 진무(眞無)도 아니다
아침 해
바다를 솟아 오른 찬란,
억겁의 암흑이 찰나에 무너지고
광명 찬란
광명 찬란
광명만이 눈부시게 부셔지는 광명만의 세계…
생명
궁겁을 꿰뚫은 생명,
우주를 덮고,
유무에 사무친 생명,
피고 무성하고 낙엽지고,
몇 만 번을 반복하고
우주가 생성하고 머물고 허물어지고
다시 티끌조차 있고 없고
그는
유무에, 생성에, 변멸에, 괴공(壞空)에 무관한
영원한 생명
(‘한마음 헌장’ 중 일부)
광덕이 본 찬란한 광명은 반야의 광명이었다. 이 광명으로 인해 인간상실의 미망(迷妄)이 녹아나고, 조국과 동포에 대한 연민도 녹아나고, 한국불교에 대한 고통과 애정도 녹아나고, ‘꿈도 생각도 아닐 때 나는 무엇이냐’는 절벽 같았던 화두도 녹아났다. 또 용성 노사도 빛을 발하고, 동산 선사와 소천 선사도 빛을 발했으니, 그의 법명처럼 빛의 덕(光德)이 우주를 뒤덮은 것이다.
‘한마음 헌장’은 광덕의 사상이 부처님과 한마음, 생명을 거쳐 궁극적으로 마하반야바라밀로 회귀됨을 보여주고 있다. 부처님, 한마음, 생명, 마하반야바라밀 이 네 가지는 광덕의 사상세계를 구축하는 4대지주(四大支柱)이자 강요(綱要)였다.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이것이 한마음이다
이것이 무량생명, 영원생명, 절대의 생명
마하반야바라밀”
기승전결의 구조를 갖추고 있는 이른바 반야바라밀사상의 사구게(四句偈)는 그가 펼친 불교운동의 지침이요, 시작이자 마무리이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그의 깨달음은 여느 선사들과는 달리 현장의 티끌 먼지 속에 펄펄 살아 번쩍이는 반야개안(般若開眼)이었던 것이다.
1999년 2월 27일 저자거리에서, 중생 속에서 반야바라밀을 실천하며 부처님의 광명을 펼쳤던 광덕은 그의 세연(世緣)을 마쳤다. 세연이 다하기 전 그는 둘러앉은 문도들에게 자신의 일생을 갈무리하는 열반송(涅槃頌)을 내렸으니, 이러하다.
울려서 법계를 진동하여 철위산이 밝아지고
잠잠해서 겁전 봄소식이 겁후에 찬란해라
일찍이 형상으로 몰형상을 떨쳤으니
금정산이 당당하여 그의 소리 영원하리
이학종 기자
urubella@beopbo.com
광덕(光德)이 처음 동산(東山) 화상을 친견했을 때, 동산이 물었다.
“꿈속에 있을 때는 꿈꾸는 거라고 하자. 생각이 있을 때는 생각이라고 하자. 꿈도 없고, 생각도 없을 때, 너는 뭐냐? 어디 가져와 봐라.”
광덕은 그때 답을 하지 못했다. 그 말의 뜻을 제대로 몰랐기 때문이다. 내가 뭘까? 이리저리 따져보았지만 영 감이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 날, 또 다음 날에도 온갖 생각을 하고, 이론적으로 그럴듯한 해답을 구해 적당히 넘겨보려 했지만 그때마다 무참히 쫓겨났다. 그렇게 쫓겨나기를 7일간이나 거듭했다.
차츰 광덕은 스스로가 비참해짐을 느꼈다. 절에 올 때만 해도 건방진 마음이 남아 있어서 안하무인으로 고개를 들고 다녔던 열혈청년의 만용은 그렇게 시나브로 스러지고 있었다.
광덕과 그의 스승 동산 화상의 첫 만남은 이처럼 선적(禪的)이었다. 하기야 동산은 당대 최고의 선장(禪匠)으로 한국불교의 선종을 진작시킨 선봉장이었으니, 한 눈에 선기(禪機)가 출중한 재목을 만난 그가 선적 대화를 나누지 않을 리 있었겠는가.
제자가 은사를 그리워하는 정이 각별한 것은 절집에 드문 일은 아니지만 광덕의 스승을 존숭하고 공경하는 마음은 유별날 정도로 지극했다.
스무 살에 늦깎이로 출가한 것이나, 대승경전에 대한 깊은 연찬을 한 것, 화두참구(話頭參究)와 용맹정진(勇猛精進), 청정계맥(淸淨戒脈) 전승과 전파, 제방납자(諸方衲子)들의 제접과 대규모 사부대중의 교화, 비구 정통종단 확립, 대중공양, 운력, 입적하는 날까지 한 번도 거르지 않은 조석예불, 온화한 미소와 다함없는 인정 등 스승 동산이 이룩한 가풍은 온전히 광덕의 가풍으로 이어졌으니 그의 스승에 대한 각별함이 어느 정도인가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동산의 이러한 가풍 속에서 광덕의 인격이 함양되고 법기(法器)가 성숙되었으니 이는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광덕에게 있어 동산 화상은 법(法)의 엄부(嚴父)이고 정(情)의 자모(慈母)였던 것이다.
광덕은 늘 방 한쪽에 은사(恩師)의 사진을 모셔놓고 주야로 우러러보며 살았다. 그만큼 스승에 대한 사모의 간절함이 지극했던 것이다. 다음은 그의 스승에 대한 술회 내용.
“절에 와서 머리를 깎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돌이켜보면, 모두가 부처님께서 인도하신 까닭이라고 굳게 믿지. 이런 점에서 내 출가생활을 돌이켜보면, 먼저 노당(老堂)스님(동산노사) 은혜가 막중해. 무엇으로도 비유해 말하지 못해.”
광덕의 정신적 사상적 영향을 미친 스승들은 은사 동산 화상과 함께 동산의 은사인 용성(龍城) 화상, 그리고 금강반야(金剛般若) 사상을 통해 구국구세(救國救世) 운동을 펼친 소천(韶天) 선사 세 분이라고 할 수 있다. 용성, 동산, 소천이라고 하는 뛰어난 선사들의 정맥을 이어 인천(人天)의 스승길에 접어든 광덕, 그런 그가 불교현대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 지도 모른다.
광덕은 1927년 5월 1일(음 3월 3일) 삼짓날에 경기도 화성군 오산읍에서 아버지 고준학씨와 어머니 김동낭씨의 사이에서 2남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속명은 병완(秉完). 부모님은 모두 성품이 강직하고 깔끔했으며, 엄격한 유교적 가풍을 지니고 있었다.
병완은 매우 총명했다. 영특하고 효성스러워 부모의 속을 썩이는 일이 없었다. 소년시절부터 책읽기를 즐겨했고, 작문도 잘해 총독상을 받은 일도 있었다. 그러나, 부친이 돌아가면서 가세가 기울어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는 독학을 했다.
독학으로 당시 최초의 야간대학인 한국대학(지금의 서경대 전신)에 입학한 병완은 그곳에서 부처님과의 인연을 맺었다. 어머니를 따라 천주교 성당에 다녔던 그가 효봉 화상에게 수계를 받고 당대의 고승들과 친분이 두터웠을 정도로 불교에 박학했던 한국대학 설립자 한관섭 선생을 만남으로써 일생일대의 전환점이 맞게 된 것이다.
그러나 병완은 건강의 악화와 대학공부의 한계를 느껴, 대학을 채 마치지 못하고 한관섭 선생의 소개를 받아 금정산 범어사로 내려가 처사생활을 시작했다. 이것이 청년 병완을 당대의 고승 광덕으로 변모시키는 결정적인 전기가 된 것이다.
훗날 광덕은 이 시절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제겐 특별한 출가동기가 없습니다. 건강상 문제, 선생님의 권유로 선방에 구경을 갔다가 거기서 훌륭한 지도자를 만나 생활하는 가운데 새로운 세계, 평범한 인간계가 아닌 위대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 문을 한번 열어봐야겠다. 물러설 수 없다 해서 그 생활을 한 것이 3년이 되고 30년이 되고 40년이 넘고 한 것이지요.”
광덕은 스승 동산 화상의 첫 만남 이후 궁극의 경지가 말의 조화나 논리적 사변, 개념의 조합이나 분석 또는 이론의 전개를 가지고는 얻을 수 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선방으로 갔다. 수십 년 참선수행을 하는 선배 수좌들이 있는 선방에 스승의 특별한 배려로 한 자리를 얻어 수행을 시작했으니, 이미 동산 화상이 광덕의 그릇을 알아보고 탁마를 시작한 것이었다.
처사를 선방에 받아들인 것도 처음이고, 그런데도 조실(祖室)을 비롯해 선배 수좌들이 친절히 대해준 것도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동산 화상의 각별한 보살핌에 힘입은 것이겠지만 당시 선방대중들의 친절한 배려가 없었다면 그런 경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광덕을 따라 다니는 장애는 건강문제였다. 동산은 광덕의 이런 점을 배려해 미륵암이나 금강암, 기장포교당, 함안 칠원의 장춘사 등 작은 절에서 혼자 정진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건강이 악화되어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이런 과정에서 광덕은 자연스럽게 머리를 깎고 염의를 하게됐지만 불공은 드렸으되 축원과 법문은 결코 하지 않았다. 그것은 구족계를 받은 스님이어야 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여기서 광덕의 비구관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처사의 신분으로 수행을 하던 광덕은 1952년 범어사에서 동산 화상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그리고는 선방에서 정진하다가 이듬해 마침 범어사 금강암에 머물던 소천 선사와 만나 함께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금강경 구국구세(救國救世) 운동에 나섰다. 1년 남짓 이 운동을 하던 광덕은 다시 건강이 악화돼 범어사로 돌아왔다.
건강이 너무 좋지 않아 선방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열반당에 머물렀다. 그러나 광덕은 정진을 늦추지 않았다. 의사 출신인 스승 동산 화상의 따뜻한 보살핌 아래 정진은 계속됐다. 건강이 나아지면 선방으로 옮겼다가 다시 악화되면 열반당으로 와서 혼자 정진을 하는 과정이 계속됐다. 위도 잘라내고 폐도 잘라낸 몸으로 용맹정진을 거듭하는 것은 무리였지만 위법망구의 자세를 잃지 않은 광덕의 정신력 앞에서는 병마도 두 손을 드는 듯했다.
광덕은 그의 나이 서른이 되던 해, 마침내 구족계를 받고 비구가 됐다. 완전한 스님이 된 광덕, 그는 새롭게 맞이한 삶의 대전환을 위해 운수(雲水)의 길에 올랐다.
“꿈도 아니고 생각도 아닐 때, 나는 무엇이냐?”
광덕은 이 화두를 놓고 몸을 돌보지 않는 참구를 계속했다.
금정사에서 공부를 하던 어느 해 봄날, 마루턱에 앉아 앞산을 건너다보던 광덕은 문득 한 경계가 열리는 것을 보았다. 눈앞에 펼쳐지는 세계가 모두 달라짐을 느꼈다. 주관과 객관을 초월한 우주 삼라만상과 합일하는 세계, 느낌…. 기뻤다. 열락(悅樂)의 감흥에 젖어 광덕은 깨달음의 노래, 즉 ‘한마음 헌장’을 힘차게 불렀다.
그의 오도송(悟道頌)이자, 그가 깨달아 안 반야지견(般若知見)을 담고 있기도 한 ‘한마음 헌장’은 이렇다.
마음, 마음, 마음,
한마음
한마음은
마음이 아니다
관념이 아니다
생각이 아니다
하나이거나 둘이거나 수가 아니다
유(有)도 아니며 무(無)도 아니며
유무(有無) 초월의 유이거나 무도 아니다
일체 초월의 진무(眞無)도 아니다
아침 해
바다를 솟아 오른 찬란,
억겁의 암흑이 찰나에 무너지고
광명 찬란
광명 찬란
광명만이 눈부시게 부셔지는 광명만의 세계…
생명
궁겁을 꿰뚫은 생명,
우주를 덮고,
유무에 사무친 생명,
피고 무성하고 낙엽지고,
몇 만 번을 반복하고
우주가 생성하고 머물고 허물어지고
다시 티끌조차 있고 없고
그는
유무에, 생성에, 변멸에, 괴공(壞空)에 무관한
영원한 생명
(‘한마음 헌장’ 중 일부)
광덕이 본 찬란한 광명은 반야의 광명이었다. 이 광명으로 인해 인간상실의 미망(迷妄)이 녹아나고, 조국과 동포에 대한 연민도 녹아나고, 한국불교에 대한 고통과 애정도 녹아나고, ‘꿈도 생각도 아닐 때 나는 무엇이냐’는 절벽 같았던 화두도 녹아났다. 또 용성 노사도 빛을 발하고, 동산 선사와 소천 선사도 빛을 발했으니, 그의 법명처럼 빛의 덕(光德)이 우주를 뒤덮은 것이다.
‘한마음 헌장’은 광덕의 사상이 부처님과 한마음, 생명을 거쳐 궁극적으로 마하반야바라밀로 회귀됨을 보여주고 있다. 부처님, 한마음, 생명, 마하반야바라밀 이 네 가지는 광덕의 사상세계를 구축하는 4대지주(四大支柱)이자 강요(綱要)였다.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이것이 한마음이다
이것이 무량생명, 영원생명, 절대의 생명
마하반야바라밀”
기승전결의 구조를 갖추고 있는 이른바 반야바라밀사상의 사구게(四句偈)는 그가 펼친 불교운동의 지침이요, 시작이자 마무리이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그의 깨달음은 여느 선사들과는 달리 현장의 티끌 먼지 속에 펄펄 살아 번쩍이는 반야개안(般若開眼)이었던 것이다.
1999년 2월 27일 저자거리에서, 중생 속에서 반야바라밀을 실천하며 부처님의 광명을 펼쳤던 광덕은 그의 세연(世緣)을 마쳤다. 세연이 다하기 전 그는 둘러앉은 문도들에게 자신의 일생을 갈무리하는 열반송(涅槃頌)을 내렸으니, 이러하다.
울려서 법계를 진동하여 철위산이 밝아지고
잠잠해서 겁전 봄소식이 겁후에 찬란해라
일찍이 형상으로 몰형상을 떨쳤으니
금정산이 당당하여 그의 소리 영원하리
이학종 기자
urubella@beopbo.com
<2000-04-12/55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