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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 비친 불광

끝없는 편력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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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광사 작성일2005.10.20 조회4,45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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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인파를 뚫고 그냥 앞장서서 걷는데 늙은이가 어찌나 걸음이 빠른지 그의 옷자락만 바라보며 놓치지 않으려고 빠르게 걷다 보니 처음엔 그곳이 부산진 역전 광장인지도 몰랐다. 대합실에 들어서고 나서야 역인 줄 알고는 두리번거리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스님이 먼저 빈 의자에 가서 털썩 앉더니 제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때리며 앉아 보라는 시늉을 했다. 나도 궁둥이를 안으로 깊숙이 들이밀며 털썩 주저앉았다. 그제야 점심 저녁을 모두 굶은 허기와 목마름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저기 매점에 가서 음료수라도 쫌 사온나, 돈 있제?아 예, 어쩌구 입속말로 중얼거리며 얼른 달려가서 사이다 두 병을 사 가지고 돌아왔다. 그에게 한 병 내밀고 나도 한 모금 마시는데 빈 속에 찌르르한 탄산 음료가 들어가니 속이 더 쓰린 것 같았다. 스님은 사이다 몇 모금을 아주 달게 마시고는 숨을 돌린 것 같았다.

-니 머할라꼬 중이 될라카나. 저 바라, 중생들이 얼매나 많노. 다 제가끔 살게 돼 있는 기라.

나는 이럴 때 스님에게 무슨 대꾸를 하는 것이 손해라는 걸 아는지라 그냥 땅바닥만 내려다보았다.

-마 때리 치아고 집에 가뿌지.

스님은 사이다를 반쯤 마시고는 일어나 빈 의자 위에다 놓았다.

-내 가서 표 사올란다. 여 꼼짝 말고 있그라이.

그리고는 인파 속으로 휘적휘적 걸어가 버렸다. 그런데 한번 간 중은 다시 돌아올 줄을 모른다. 한 시간 가까이 지나서야 의심이 더럭 생겨났다. 나는 얼른 일어나 매표구에 여러 갈래로 열 지어 서 있는 사람들의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혹시 어디에 중의 도포자락이 보이지 않는가 살폈다. 난데없는 수십 명의 휴가병만 모여 있을 뿐이었다. 다른 방향의 대합실에도 가 보았지만 스님은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제 그야말로 끈 떨어진 호리병 꼬락서니가 되어 대합실 나무의자로 돌아왔다. 그제야 기차 시간에 대려고 부지런히 뛰어가거나 누구와 만났는지 서로 웃으며 반가워하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나 기다리는 사람들과 목적지가 있는데 나는 방금 그런 따위들을 모조리 잃어버렸다. 어디로 가야할꼬. 어디 가서 스님의 암자를 찾는단 말인가. 이제 또다시 밥도 안 주는 범어사로 찾아가 문 앞에서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려야 하나. 정말 다 때려치우고 집으로 돌아갈까.

우선 무엇보다도 뭔가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광장을 가로질러 길 건너편의 식당 골목으로 가서 국밥 한 그릇을 사먹었다. 국물까지 남김없이 비우고 나자 이제는 슬슬 눈꺼풀이 내려오면서 졸리기 시작했다. 다시 역전 광장으로 나왔지만 정처없는 이 발길이었다. 너구리 같은 중이 나를 떼어 놓으려고 처음부터 작정을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광덕 스님에게까지 원망의 마음이 일어났다. 땡추들이 아주 날 골탕먹이기로 작당을 한 게 아닌가. 누군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놀다 가이소.

그림=민정기글씨=여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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