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없는데 윤회는 왜 할까”
페이지 정보
작성자 불광사 작성일2005.10.20 조회5,239회 댓글0건본문
불광사와 본지가 불광 창립 32주년을 맞아 ‘과학과 생명, 그리고 불교’란 주제로 마련한 여섯 번째 기념강연이 지난 3일 불광사 교육관에서 열렸다. 이날 강연에서 이화여대 철학과 한자경 교수가 ‘불교에서 윤회와 무아’를 주제로 강의했다.
불교는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無我)를 말하면서 윤회와 해탈을 얘기한다. 자아가 없는데 윤회가 가능하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내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내 전생과 내생이 논해질 수 있는가. 내가 없는데 누가 윤회하고 누가 해탈해 열반에 이른단 말인가.
무아는 곧 연기이고 공(空)이다. 즉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오온은 인연화합의 산물일 뿐이며, 실체적 자아는 없다. 인연이 화합해 형성된 가설적 자아인 가아(假我)를 얘기할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기와 공을 한 그루의 나무가 모든 우주의 역사를 담지하고 있다는 과학적 논리로만 이해한다면, 불교를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이지 불교 내적 논리로 불교를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내 몸과 생각은 타자(他者)로부터 온 것이다. 신체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태양의 빛과 대지의 물이 필요하다. 내가 생각하는 내용은 어떤 책에서 읽었을 수 있다. 이것들은 결코 내 것이 아니지만, 경계를 지닌 안으로 들어와서는 내 것이 된다. 이것을 스스로 자아라 구획 짓고서 그 경계 안에 집착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우주 전체의 모든 역사가 나의 오온 안에, 몸의 세포 하나하나 마다에, 생각 하나하나 마다에 기억으로 담겨 있다. 이렇게 해서 내 경계는 무한으로 확대되며, 결국 무한으로 해체된다. 내가 무한이 되고 너도 무한이 되며, 결국 나와 너의 구분이 없어지면서 일체가 하나의 무한이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 개체의 경계가 안에서 사라지고 해체되는 무한은 의식성이 배제된 순수 물질이 아니라, 오히려 ‘순수 의식 자체’이다. 개별 사물의 경계나 개체적 자기의식의 경계를 넘어 일체를 포괄하는 무한의 마음, 한마음, 일심이다.
또 하나의 질문이 남아 있다. 무한의 지평인 일심 안에서 윤회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개체와 세계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무명으로 인해 무한의 지평 안에 신체를 따라 구획 지어진 일부분인 개별 오온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신체의 경계를 따라 그 경계 안의 오온을 나로 간주하고, 그 경계 밖의 일체를 타자 또는 세계로 간주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안과 밖, 나와 세계를 서로 상이한 별개의 것으로 분별 사량하게 된다. 이것을 ‘의(意)’라고 하며 의식은 집착의 자의식을 갖는데, 이런 집착에 기반한 의식과 의지의 작용이 윤회를 일으키는 업(業)이 된다. 이렇듯 오온이 멸해도 업력을 따라 새로운 오온이 형성되는 윤회가 성립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