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편력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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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광사 작성일2005.10.20 조회4,522회 댓글0건본문
[중앙일보] 오늘 모임이 있어서 범어사 말사와 암자의 주지 스님들이 대개는 거의 들어오실 모양이니 그 중에 누군가를 붙잡고 늘어져 따라 가라는 얘기였다. 그날은 돌계단 아래에서 기다리지 않고 아예 접견실에서 기다렸다. 아침부터 스님이 하나 둘씩 나타나더니 점심 공양이 끝나고 한참 지나서야 모임이 파하여 몰려나왔다. 나를 딱하게 생각했던지, 그것도 아마 광덕 스님의 꾀였겠지만 당직 스님이 나를 데리고 어느 체격이 건장한 스님에게로 갔다. 그가 방금 신을 꿰고 섬돌에서 몸을 일으키던 순간이었다.
- 스님 이 사람 좀 데려가세요. 원주 스님이 당부하셨는데요.
- 뭐시라, 내는 그런 얘기 못들었는데.
저희끼리 한쪽으로 가서 한참이나 속삭이고는 당직 스님이 나에게 손짓을 하며 나직하게 말했다.
- 어서 따라가요. 스님이 쫓아내두 그냥 거기 붙어 있으슈.
남방에 모직 바지 차림이었지만 머리는 완전 삭발이라 전보다는 스님들 보기에 나았던 모양이다. 내가 그의 두어 발걸음 뒤에 따라가는데도 그는 몇 번 돌아보았을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당도한 곳은 수련과 계율이 엄격하기로 소문난 선원인 해운대의 ''''금강원''''이었다. 젊고 패기 찬 젊은 승려들이 용맹정진하고 있었고 행자들 중에도 빠릿빠릿한 이들은 이곳 과정을 거쳐서 해인사로 가서 계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사정들도 나중에야 듣고서 알았다. 범어사에서 가깝고 경내가 조용하고 엄숙한 것이 어쩐지 긴장이 되었다. 주지인 원장 스님은 나를 마당에 세워두고 어느 스님을 불러서 말했다.
- 저 옷부터 좀 갈아입히라. 새로 온 행자니라.
아아, 드디어 거처가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요사채의 행자들 방에 들어가 회색 바지 저고리를 갈아입었다. 그날부터 다른 행자와 함께 경내와 마당 전체를 청소하는 직임이 주어졌다. 행자들을 단속하고 공양이며 제반 생활을 맡아 보는 스님이 나를 불러다가 면접을 했다. 그는 주의사항을 전달하고는 시민증이 있느냐면서 이름을 물었고 내가 속명을 댔다. 그가 몇 가지 기록을 하다가 말했다.
- 수영 행자라 부르면 되겠구먼. 닦을 수(修) 길 영(永).
내 이름의 한자만 바꾼 꼴이었다. 그는 그렇게 적어 두었다. 나는 어쩐지 글자를 바꾼 나의 행자명이 마음에 들었다.
얘기가 나온 김에 짚고 넘어가자. 칠팔십년대에 문단 친구들끼리 자호를 짓거나 서로 지어 상대에게 주기도 하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이문구의 명천(鳴川)은 ''''우름내''''라는 고향 마을 이름으로 흘러가는 시냇물 소리가 그럴 듯하지만 어쩐지 처연하고, 김성동의 정각(正覺)은 절집 이름으로 모범적이라 할 만한데 바를 정자가 좀 괴롭다. 고은의 일초(一超)는 섬광처럼 빛나는 면이 있으나 정감이 없어 보인다. 나중에 해남으로 내려가 김남주 등과 함께 사랑방 학교를 하면서 스스로 호를 지은 적이 있다. 조그마한 마당에 족히 삼사백년은 묵었을 몇 아름드리의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거기에 착안하여 그냥 집 이름처럼 지었다.
그림=민정기글씨=여태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