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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광사 작성일2005.10.20 조회5,06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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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만 佛子 원력 모아 佛光을 환히 빛내다

서울 잠실 불광사에는 이름이 빼곡히 적힌 동판 두개가 붙어있다. 모두 2만명이다. 이들이 불광사를 창건한 주역들이다. 2만명의 이름에서 보듯 불광사는 어느 한사람의 원력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정성이 모여 만들었다.

1978년 6월29일 법당 봉납 발원법회를 연 이후 불광회는 법당 마련에 모든 관심을 집중했다. 1979년3월8일 법회주보 ‘불광 법등’을 창간하고 ‘불광인의 가슴에 불광배지를 ’캠페인을 펼쳤다.

이 캠페인을 통해 기금 모으기에 나섰다. 몇 차례 백일기도를 열고 땅 1평 사기, 1통장 만들기 등의 운동을 전개했다. 불광 회원들이 나서 화주 했다. 행정 동별로 법등을 조직해 소속된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도 모연했다.

사진설명 : 광사 현재 모습. 처음과 달리 서울에서도 뛰어난 거주지로 탈바꿈했다. 불광사는 곧 새로 건축, 제2의 도약을 준비하고있다.

‘땅1평 사기’‘1통장 만들기’ 운동으로 잠실 부지 매입

1982년 8월 ‘대각사 7년’ 마감하고 법당 이전 법요식

도심포교당 시대 선도…강남에 포교당 속속 들어서

이렇게 해서 9000만원이 모였다. 이 돈으로 잠실에 땅을 구입했다. 처음부터 잠실을 후보지로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법당 창건을 결정한 후 가장 먼저 후보지로 떠오른 곳은 조계사와 멀지 않은 세검정 쪽이었다. 지금 중국음식점 하림각 뒤편이 후보지였다. 1500평이 넘는 부지가 있었는데 바위가 많아 포기했다. 그 다음 거론된 곳은 현재 서초동 법원이 들어선 곳. 우여곡절 끝에 잠실로 방향을 돌렸다. 당시만 해도 강남이라해도 압구정동만 아파트가 들어섰다. 잠실은 아직 시골이었다.

김인숙 (불교여성개발원) 원장은 “어머니 김미희 여사가 스님께 강남으로 하시지 그 먼 곳 까지 가십니까라고 말씀드렸드니 스님께서 앞으로 이곳이 개발될 것이라며 잠실을 선택하셨다”고 말했다. 땅 값이 싼 점도 고려됐다. 석촌호수 주변 땅 270평을 먼저 확보했다. 평당 25만원 가량 했다.

사실 스님은 끝까지 절 짓는 것을 반대했다고 한다. 〈광덕스님 시봉일기〉에서 송암스님은 “스님은 불광이 자체 절 갖는 것을 오히려 반대했다. 신도들이 절이 없어서 수행에 불편이 많으니 우리 절이 있어야 한다고 아우성을 쳐도 망설였다”고 밝혔다. 송암스님은 “스님은 어떻게 하면 절을 짓지 않고 수행을 할 수있을 까, 어떻게 절 짓자는 신도들의 요구를 잠재우고 오로지 수행 정진만 잘하게 할 수있을 까 밤낮 연구했다”며 “그런 까닭에 스님은 자꾸만 절 짓는 것을 미루었다”고 말했다. 송암스님은 “오랜 숙고 끝에 절을 짓기로 결심한 뒤 스님은 몇가지 원칙을 정했는데 그 중 하나가 빚없이 절 짓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광덕스님은 끝까지 그 원칙을 지켜 공사가 끝난 뒤에도 빚이 없었다고 한다.

1981년 11월1일 기공식을 했다. 모은 돈은 땅을 사자 거의 없어졌다. 건물 설계는 효율성을 우선했다. 중요한 것은 모일 수 있는 공간이었지 새로운 건축을 하는데 있지 않았다. 현대식 건물에 지붕은 한옥으로 덮기로 결정했다. 돈이 태부족이었지만 공사가 시작되자 사람들이 와서 보고 시주를 했다. 새로 동참한 사람도 있고 더 내는 사람도 나왔다. 크게 도움을 준 사람도 있었다. 지홍스님은 “쌍용 그룹 김미희 여사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쌍용양회가 건물 공사에 들어가는 시멘트를 모두 부담했다”고 말했다.

송암스님도 〈시봉일기〉에서 “스님은 특정 개인의 큰 보시를 받지 않고 많은 사람들의 동참에 의해서만 불사를 한다는 원칙을 세웠는데 단 한사람 쌍용 그룹 창업주 부인 불국생 보살 김미희 불자가 생전에 약속한 시멘트 시주는 예외로 받아들였다”고 적었다. 이처럼 쌍용은 불광사를 짓는데 큰 공헌을 했다. 이를 매개한 사람이 현 김석원 회장의 어머니인 고 김미희 여사다. 김여사는 평소 광덕스님의 불교 현대화를 적극 찬성하고 지지했다. 특히 유치원을 짓는다는데 큰 박수를 보냈다.

사진설명 : 불광사 보광명당 입구에 붙어있는 시주자 동참록. 모두 2만여명의 시주자 명단이 적혀있다. 불광사는 이처럼 많은 신도들의 동참으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불광사 착공전 8월 갑자기 김여사가 별세했다. 어머니의 유지를 이어 불광사 불사를 도운 사람이 불교여성개발원 김인숙 원장이다. 오랜 미국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국민대 교수로 재직중이던 김 원장은 어머니 생전에 몇 번 광덕스님을 만난적이 있었다. 김 원장은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전 불광사 불사를 도와드리라고 제게 말씀을 했기 때문에 김석원 회장에게 그 사실을 말했다. 김회장이 고맙게도 흔쾌히 부탁을 들어주었다”고 말했다. 불광사 공사 현장에는 쌍용레미콘 트럭이 줄을 이었다. 김 원장은 “지금은 어림도 없지만 당시만 해도 불사를 도와줄 수있었다”며 “수백대 분량이 들어갔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김 원장의 여동생이 중앙신도회 김의정 회장이다.

불광사 공사를 감독하고 현장에 거의 상주한 사람이 광덕스님과 지홍스님 그리고 도림(제주불사리탑 주지)스님이다. 불광법당은 원래 동서남북 네곳에 세울 계획이었지만 잠실 이외 더 이상 세워지지 않았다. 너무 힘들었던 것이다.

1982년4월25일 윤고암 스님을 모시고 잠실법당 봉불식을 올렸다. 그리고 5월9일 건축중인 미완성 법당에서 첫 법회를 열었다. 법회 일시도 일요일 오전 10시로 바뀌었다. 8월11일 대각사 법당에서 마지막 공양을 올렸다. 불광회 대중들은 눈물로 7년간의 대각사 시대를 마감했다. 4일 뒤 8월15일 잠실법당에서 1200여명의 대중들이 모여 법당이전 법요식을 갖고 ‘불광사’를 현판했다. 그리고 10월24일 2500여명의 대중이 모인 가운데 준공법회가 열렸다. 당시 모습을 불교신문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서울 강동구 석촌동에 자리한 불광사는 10월24일 불광회 창립 8주년을 기념하는 의식과 함께 법당준공식을 갖고 앞으로 더욱 힘찬 열기로 시정 속에 법등을 높이 밝힐 것을 기원했다. 지하 1층 지상 3층 연건평 552평의 전법도량 불광사는 2억6천3백만원을 투입했다”

이날 준공식에서 당시 총무원장 진경스님은 “시정 곳곳에 이와같은 도량을 많이 세워서 시의에 맞고 대중의 호흡에 부응할 수 있는 활기찬 전법운동을 이 불광사를 시발점으로 전국 도처에 전파시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총무원장 스님의 발원대로 1980년대 서울 강남에는 도심포교당이 속속 들어섰다. 강남포교원 구룡사 능인선원 등 강남의 대표적인 포교당들이 1980년대 자리 잡았다. 광덕스님은 법어에서 “반야바라밀을 직관하여 진리에 의한 행복을 창조하여 사회와 겨레에 돌리는데 헌신하자”고 했다. ‘도심포교당’ 불광사의 건립이 새로운 사상의 전개에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한국불교에 강남시대, 사상을 통한 대중운동, 도심포교당의 시대가 막을 여는 순간이었다.

불광사의 발전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86년10월19일 법당을 증축했다. 1992년에는 인근 건물을 매입하여 포교원 학생법당을 개원했다. 또 안성에는 수행원 ‘불광원’을 건립했다. 광덕스님은 불광사를 새로 짓고 더 넓힐 계획을 가졌다고 한다. 불광사는 스님 입적 후 불광사 옆에 교육원 부지를 확보해 건물을 넓힌데 이어 불광사를 곧 새로 건축한다.

박부영 기자 chisan@ibulgyo.com

사진 신재호 기자 air501@ibulgyo.com

# 불광사의 모습들

신도들이 운영주체 ‘혁명적’

재원 조달 호법법회도 눈길

현대 도심포교당의 문을 연 선구자 답게 불광사와 불광법회가 보인 모습은 여러 가지다. 지금은 많은 사찰이 하고 있어 화제가 되지 않지만 당시는 파격이었다. 불광사의 가장 큰 특징은 신도들이 주체적으로 운영한다는 점이다. 신도들이 모임을 만들어 사찰 운영과 법회등을 논의하고 결정한다.

신도주최 사찰운영을 뒷받침하는 것은 신도 단위 조직인 법등이다. 법등은 행정구역별로 모인 공동체와 같다. 1976년 법회대중들을 10개의 소모임으로 구분하면서 시작됐다. 1980년대 들어 급속히 늘어나면서 법등들이 모여 구법회가 생겼다. 지역별에 이어 연령별 세대별 법등이 만들어졌다. 불광은 이 법등들의 모임인 것이다. 법등에는 임원을 두어 연락이나 관리 행사 기획 등의 임무를 맡았다. 법등은 월 1회 이상 모여 신행 전법기도 심방 등의 활동을 하고 병이나 경조사등을 챙겼다. 이중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가족모임이었다.

호법발원법회도 눈길을 끈다. 호법법회는 불광의 목적 사업을 실현하는데 필요한 재원을 조달하는 법회다. 염불원 연수원 건립과 포교당 확장 불서간행 불교학 연구 지원, 자선 구호 사업 국제 평화운동 등이 모두 호법활동에 들어간다. 불광사의 증 개축도 이 호법활동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다른 사찰의 화주와 불사 동참과 비슷한 이 활동이 눈길을 끄는 것은 정기적 법회로 고정시키고 그 의미를 불교사상적으로 뒷받침한다는데 있다. 불광사는 매월 첫째 수요일 호법발원법회를 열고 이 활동이 “정법호지와 불국토 성취의기초가 된다는데 있음”을 분명히 각인시킨다.

불광사의 가장 큰 특징은 교육에 있다. 1979년 처음 기초교리 강좌를 개설한 이래 규모가 커지면서 법등임원교육, 습의교육, 바라밀교학강좌 법사 후보자 교육 등 기초부터 고급 나아가 법사양성 까지 체계화된 교육과정을 마련했다. 불광사는 교육만 전담하는 교육원을 두고 있다.

이 세가지가 불광법회와 불광사를 유지하는 내부 토대다. 불광사는 이를 토대로 찬불가 보급, 출판사, 유치원운영, 어린이집 지원 등 각종 사업을 펼친다. 지홍스님은 이를 “큰 스님께서 강조하신 수행 교육 사상중심의 불광운동을 펼쳐나간다”고 말했다.

[불교신문 2329호/ 5월23일자]

2007-05-19 오전 11:52:43 /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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