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이 내리던 2월 12일 새벽, 서울 잠실 불광사 대웅전에서 주지 동명 스님의 집전으로 572일째 기도정진이 이어졌다. 불광사 대중 화합을 염원하며 2023년 7월 22일 시작된 천팔십일기도로 기도일은 중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572일의 기도
“귀한 인연을 맺었음에도 저희들은 자신의 견해만 옳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야 할 부처님 성전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있으니 통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부디 저희들이 이 천팔십일기도를 통해 깊이 뉘우치고 널리 깨달아, 분노하는 마음, 비난하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을 과감하게 버리고, 너그러운 마음, 자비로운 마음, 슬기로운 마음을 갖게 하소서! (…)”
- ‘불광화합을 위한 천팔십일기도 발원문’ 중에서
기도발원문을 외는 동명 스님의 목소리가 간절했다. 스님은 죽비를 내리치며 참회의 절을 한 배 한 배 올렸다. 그렇게 지금껏 61,776배가 쌓였다. 새벽기도는 “마하반야바라밀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루리”라는 인사와 함께 마무리됐다.
불광사는 창건주 광덕 스님이 전국 불자 2만여 명과 함께 불사한 결실로 1982년 10월 창건된 도심포교당(2013년 2월 중창불사 준공)이다. 그런 불광사가 꽤 오랫동안 내홍을 겪고 있었다. 2024년 부처님오신날도 둘로 나뉘어 5층 대웅전과 지하 4층 보광당에서 각각 따로 봉축법요식 행사를 진행했다.
반목과 갈등으로 얼룩진 불광사에 2023년 6월 17일, 동명 스님이 주지로 취임했다. 스님은 취임식 때 “불광사와 불광법회의 화합을 최우선으로 삼겠다”라며 기도·법회·교육의 재건을 약속했다. 그리고 한 달 뒤인 2023년 7월 22일, 불광의 화합을 기원하는 1,080일 기도 입재식을 봉행했다. 스님은 입재식에서 “오직 마하반야바라밀 화두만 갖고 3년간의 정진에 앞장설 것”이라며 대중에게 참회의 3배를 올렸다.
“신도들에게 삼배를 받기보다 해야 할 입장이라 참회의 절을 올렸어요. 1,080일 기도에서도 매일 참회의 108배를 올리고 있고요. 불광사의 이 사태는 근본적으로는 우리 문도들이 단합하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지금이라도 문도들이 단합하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불광화합을 위한 천팔십일기도’는 매일 새벽기도(바라밀정근-기도발원문-108배 참회)와 사시기도(바라밀정근-기도발원문-금강경독송)로 봉행된다. 이날 새벽의 기도는 ‘동안거 해제 및 정월조상합동 천도재’가 있던 사시로 이어졌다. 불광사 스님들의 “나무아미타불” 염불 소리가 보광당에 울려 퍼졌다. 갈등이 있기 전보다 훨씬 적은 인원이 동참했지만, 스님들과 신도들이 한마음으로 올리는 기도만은 법당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우리가 정성을 다해 간절히, 아니 간절하기를 넘어서 처절하게 기도해야 한다고 늘 신도들에게 당부해요. 우선 제가 그런 마음이고요. 광덕 큰스님께서 ‘너는 원을 세우고 열심히 기도하고 그 일에 매진하라 그러면 결과는 부처님께서 만들어 주신다’라고 했듯, 큰스님께서 불광사를 세웠던 그 방향대로 정당하게 운영하며 오직 기도하는 마음으로 실천해 나갈 뿐입니다.”




시인에서 스님으로
동명 스님은 출가 전 20여 년간 문단에서 활동했던 시인이다. 1989년 등단해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 『나무 물고기』 등을 썼고, 1994년에는 김수영문학상을 받았다.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문학평론가로도 활동했다. 그러다 2010년 해인사로 출가해 ‘차창룡’ 시인에서 ‘동명’ 스님이 됐다. 40대 중반의 중견 시인으로 활발히 작품활동을 할 때였고, 출가하기엔 늦은 나이였지만 미련 없이 떠났다.
“시인으로서는 할 만큼 했다 싶었어요. 우리가 문학이든 뭘 하든 세상에 보탬이 되거나 세상을 바꾸는 꿈을 꾸곤 하잖아요. 그걸 생각했을 때 문학 내에서의 제 한계를 스스로 잘 알고 있었죠. 문학보다는 새로운 길을 가는 게 낫다고 판단했어요. 부처님께서도 늘 새로운 시도를 하셨잖아요.”
고등학생 때부터 『불교성전』과 법정, 정다운, 향봉 스님 등 스님 에세이를 많이 찾아 읽었다. 광주 원각사 고등부 불교학생회를 다녔고, 대학에서는 문학 동아리와 원각사 청년회 활동을 병행했다. 문인으로 활동할 때는 ‘인도를 생각하는 예술인 모임’을 만들어 성지순례도 여러 번 떠났다. 그래서인지 스님의 시는 불교적인 색채가 강했다.
“문학에는 아름다움을 중시하는 미학적인 면과 사유를 중시하는 종교·철학적인 면이 있는데, 저는 대체로 사유 쪽이었던 것 같아요. 인간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또 구원이란 무엇인지 이런 근본적인 문제는 문학에서도 꾸준히 제기돼 왔어요. 세 번째 시집 『나무 물고기』에는 인도 여행하면서 썼던 시들이 많은데, 문학적으로 불교를 많이 반영한 시집이었죠. 문학과 종교는 본래 하나였다는 생각이 그 시집으로 정립됐어요.”
산문집 『무소유』로 잘 알려진 법정 스님의 다비식이 있던 날, 동명 스님은 해인사로 출가했다. 해인사 행자실, 은사 지홍 스님이 있던 불광사, 동명사, 중앙승가대를 거쳐 중흥사와 연이 닿았다. 당시 중흥사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찰이었음에도 컨테이너로 만든 임시 법당에서 십여 명의 신도들이 예불을 드렸다. 불사부터 모든 걸 새로 시작해야 하는 시기였는데, 중흥사를 알리기 위해 템플스테이를 추진했다.
동명 스님이 가장 먼저 시작한 프로그램은 ‘해설이 있는 템플스테이’였다. 구파발역에서부터 참가자들과 함께 셔틀버스를 타고 북한산성에서 내려 같이 산행하며 북한산의 역사와 불교를 설명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이어서 진행한 불서 읽는 모임은 문학으로 넓혀, 산사에서 2박 3일 동안 머물며 책을 읽고 저자와 직접 대화하는 ‘책 읽는 템플스테이’로 성황리에 이어갔다. 문태준, 김소연, 김중식, 이병률, 정호승, 나태주, 정여울 등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문학가들을 초대했고, 호응이 좋아 언론에도 자주 소개됐다.
“출가하면서 문인들과는 인연이 다 끊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중흥사에서 템플스테이를 진행하며 문학인들을 많이 만났어요. 이후에는 저와 동인 활동을 함께했던 허수경 시인의 49재를 지냈고, 소설가 박상륭 선생님의 7주기 추모재도 불광사에서 이어갔고요.”

온몸으로 기도하라
동명 스님은 불광사에 취임 후 그동안 중단됐던 청년법회를 3년 6개월 만에 재개하고, 4년째 중단됐던 불교기본교육도 다시 열었다. 4년 만에 신입생을 받았던 19기 불교대학은 올해 첫 졸업생을 배출한다. 어린이·청소년 법회도 활성화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 중이다. 작년 11월부터 일요다라니기도도 시작했다.
“작년에는 법회를 재개하고, 외부 강사 초청 불광아카데미, 불광 창립 50주년 학술대회를 기획해서 외연을 확장했다면, 올해는 더욱 기도에 정진하려고 합니다. 내실이 확실히 다져지면 우리 안에 흔들리지 않는 바위 같은 신심이 형성되면서 불광의 문제도 해결되는 방향으로 갈 거예요. 그래서 항상 기도 먼저 하고 일을 도모하자는 생각으로 모든 일을 해 나가고 있어요.”

동명 스님은 김수영 시인이 시론집 『시여, 침을 뱉어라』에서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라고 했듯, 기도 또한 형식적으로 하는 게 아닌 온몸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중흥사에서 제일 처음 했던 기도가 신도 18명과 패널로 세워진 법당에서 한 신중기도였다는 스님은 그때도 간절했지만, 불광사에서 기도에 대한 생각이 더욱 강해졌다 한다.
“불광사 주지를 제안받았을 때 부처님 일인지 또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인지만 생각했어요. ‘마음은 언제나 새벽같이 입은 굳게 다물고 바보처럼 그렇게 가라. 송곳 끝은 날카롭게 그러나 밖으로 보이지 말라. 그래야 멋진 수행자니라.(-<시료묵(示了默)>)’ 진각 혜심 스님의 이 선시처럼 바보처럼 앞뒤 재지 않고 일단은 부딪쳐 가는 게 수행자잖아요.
불광사에서의 기도는 그야말로 일념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느껴요. 원을 세우고 간절히 간청하고 기도하면 부처님께서도 오시고 또 신중님들도 돕는다는 확신이 있어요. 앞으로 저를 비롯한 불광사 스님들과 신도들 모두 자기를 내려놓고 자비의 마음을 가지고 늘 함께해야 합니다. 오직 기도하는 마음으로 한마음이 되면, 그게 바로 화합이겠죠.”
동명 스님과 함께하는 불광 화합을 위한 1,080일 기도는 2026년 7월 5일 회향한다. 불광사로 온 이후부터 시 창작을 놓고 있다는 스님. 기도를 회향할 때쯤이면 스님은 마음 편히 시를 쓸 수 있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