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우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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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광사 작성일2010.02.16 조회5,351회 댓글0건본문
지난 4일 서울고등법원 집무실에서 만난 박홍우 부장판사는 “후배 불자법조인들이 늘어나 나눔을 실천하고 열심히 수행하는 문화가 조성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대법원에 가면 오른손에는 저울을, 왼손에는 법전을 들고 있는 ‘정의의 여신상’이 조성되어 있다. 법조인이라면 누구나 공정한 판결을 내리길 원하지만, 인간의 잣대로 항상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일이란 쉽지 않다. 그 판단이 삶과 죽음까지 결정할 수 있는 것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佛法 마음에 품고 공정한 ‘法’ 실천위해 정진”
高2 때 접한 청담스님 법문 감명…불교와 인연
대학·연수원 등 가는 곳마다 불자회 창립 주도
지난 4일 서초동 고등법원에서 만난 박홍우(58, 법명 현진)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는 “공정한 판결을 내리기 위해 언제나 법전과 경전을 가까이 한다”며 평소 주로 읽고 있다는 <앙굿따라니까야>를 건네주었다.
“12장 무죄의 품을 보세요. ‘수행승들이 죄악이 아닌 것을 죄악이 아닌 것이라고 밝힌다면, 또 수행승들이 죄악을 죄악이라고 밝힌다면, 그들은 참으로 많은 사람의 이익과 행복과 신들과 인간들의 유익, 이익, 행복을 가져온다...’”
경전을 읽어 내려가는 그의 목소리가 사뭇 진지하다. “부처님은 이미 오래전 법에 대해 말씀하셨던 거예요. 경전을 읽다보면 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저도 그 지혜를 터득해 적용해야 할 텐데 말이죠.”
박 판사는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따라 절에 다녔다. 그는 9세 때 세상을 여읜 아버지의 영향인지 사춘기 무렵부터 삶과 죽음, 인생, 종교에 대해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 무렵인가 길을 걷고 있었는데 당시 나무 전봇대에 법회 광고지가 붙어 있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어요. 대구에서 열리는 대불련 행사에서 청담스님이 법문한다는 소식이었지요. 그 때 처음 법회를 보고 법문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지요. 장엄한 독송소리도 기억에 남지만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스님의 얼굴이 맑고 평화스러웠다는 거예요.”
법회 참석 이후 그는 불교서적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불서를 구하기 힘들었던 당시에 <숫타니파타>를 문고판으로 구해서 읽기도 했다. 서울대 법대 입학 후 그는 ‘공부나 하라’는 교수님의 말씀에도 불구, 법대불교학생회에 가입해 여름.겨울 수련회 마다 적극 참여하는 학생이 되었다. 2학년 때는 서울대 총불교학생회장으로 선출되었고, 당시 부회장이었던 김외숙(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 씨는 지금의 반려자로 인연을 맺었다.
힘들 때면 ‘무상’ 떠올리며 흔들린 마음 다잡아
“퇴임 이후 ‘불교와 법학’ 접목한 연구 해보고파”
“당시 회장직을 수행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여름, 겨울수련대회를 개최할 사찰을 섭외하는 일이었어요. 그래도 당시 봉선사 운허스님과 월운스님은 항상 산문을 열고 학생들을 언제나 반갑게 맞아주시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또 그가 대학시절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청담, 성철, 광덕, 법정스님 등을 뵙고 좋은 말씀을 들었던 시간이었다. “특히 1973년 처음 인연을 맺은 광덕스님은 당시 데모가 많았던 시절에 ‘어둠이 물러서게 하려면 횃불을 들어야 한다. 그대들은 부처님의 제자로서 모든 것을 갖추고 있고 쓰기만 하면 된다’고 항상 말씀하셨지요. 입적 11년째를 맞는 지금,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상의할 어른이 계시지 않아 가슴이 아려옵니다.”
대학 졸업 후 대학원에 다니면서 사법시험을 준비해야 했던 그는 불교학생회 활동을 후회할 만큼 사법시험에서 연거푸 낙방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좌절의 시간도 겪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 힘을 냈다. “보조스님의 수심결을 다시 되뇌었지요.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야 한다’는 말씀을요.” 이후 공부하는 틈틈이 관음기도 정진을 시작했다. 기도 덕분인지 그는 1980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그는 불법을 회향하고자 하는 마음에 부임하는 곳마다 불자회를 창립하고 이끌어 갔다. 그 첫 시작은 사법연수원 시절부터다. 1980년 9월 사법연수원 내 반야회 창립을 주도했다. 반야회는 현재 다르마법우회의 전신이 됐고, 반야회원들은 현재 판사, 검사, 변호사로 사회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당시에 연수원에 들어와서 보니 기독교 모임밖에 없더라구요. 지금까지 불법을 만나서 좋은 결과를 얻었으니 여러 도반들에게 이를 알리고 함께 나누고 싶었지요.”
이후 그는 부임지를 옮길 때 마다 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 반야회, 헌법재판소 반야회, 창원지방법원 법조불자회 등의 창립을 주도해 왔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지금 회장직을 맡고 있는 서초반야회 창립이었다. “1995년 서울대 법불회 출신들이 인연이 되어 판사 뿐 아니라 변호사, 검사, 법원직원 등이 회원으로 가입했었지요. 지난 4월 서초반야회 수련회를 다녀왔는데 평소보다 배가 늘어난 170여명이 참석했어요. 회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덕분에 회원과 가족들이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요.”
그는 1991년 미국으로 유학을 가면서 불교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갖게 됐다. 영역본 <육조단경>과 한글본 <육조단경>을 비교해 가면서 번역작업을 시작하게 된 것도 그 이유다. 내친 김에 국제포교사 자격증도 취득해 회원들과 영어 불교서적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도 정기적으로 열고 있다.
법조계 활동을 하면서 “불교 덕분에 힘든 인생의 고비를 넘겨왔다”는 박 판사는 어려운 재판을 겪을 때마다 생전 아버지의 유훈이 꿈이 되어 시작한 법조인 생활이 후회되기도 했다. 그러나 어려움에 처했던 피고인이 재판 후 감사의 편지를 보내올 때는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몸도 마음도 지칠 때면 집 근처인 석촌동 불광사에 가서 108배를 하고, 생전에 아버지처럼 모시던 광덕스님 초상화 앞에서 오랫동안 참배를 올리곤 했지요. 또 일전에는 금산사 수련회에서 스님이 ‘자신을 위한 기도보다 남을 위한 기도를 하라’는 말씀을 듣고 제 주위의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를 했어요.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 지는 것을 느꼈지요.”
그는 올해 서초반야회 회장직을 맡으면서 ‘수행과 나눔’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정기적인 법회와 교리강좌 뿐 아니라 매달 종로 원각사에서 어르신들을 위한 무료급식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또 서울대 총불교학생회 동문회장을 맡으면서 매달 15일 한끼를 나누는 ‘바라밀의 날’운동을 펼치고 있다.
“제가 불교를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무상’의 개념 때문입니다. 불교의 핵심이기도 하지요. 실패와 좌절을 겪으면서도 이를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마음공부를 중요시 여기지 않습니까. 실체를 정확하게 보기 위해서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아야 하죠.”
초임판사 시절부터 그는 출근하자마자 늘 잉크펜으로 반야심경을 사경했다. 지금은 영어로 된 불교성전을 늘 소리내서 읽는다. 집에서는 틈틈이 100일 기도를 부인과 함께 올리고 있다. 스위스 법계사에 모셔진 불상 사진과 광덕스님의 사진을 걸어두고, 작성한 ‘발원문’을 읽은 후 108배와 관세음보살 염불을 주로 한다. “늘 자식을 위한 기도를 하게 되는데, 이제는 어머니를 위한 기도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불광사에서 새벽기도를 10년 이상 해 오신 어머니를 위한 기도를요.”
그는 벌써 퇴직 이후의 꿈을 명확하게 정립했다. “공부도 하면서 불교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야무진 꿈이다.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던 ‘불교와 법학’을 연구할 계획이다. 그가 보여줄 ‘불법(佛法)과 법(法)’과의 만남이 사뭇 기대된다.
임나정 기자 muse724@ibulgyo.com
박홍우 부장판사는…
서울대 법학과 및 동 대학원 석.박사과정을 졸업하고, 미국 코넬대학교 로스쿨 객원연구원을 지냈다. 1980년 제22회 사법시험을 합격하고, 춘천지방법원 판사, 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 판사, 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 서울고등법원 판사, 창원지방법원 부장판사, 서울지방법원 의정부지원 부장판사, 서울중앙지방법원 부장판사, 사법연수원 교수 등을 거쳤다. 현재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재직 중이며, 국제헌법학회 한국학회 부회장, 대법원 헌법연구회장을 맡고 있다.
사법연수원 다르마법우회 지도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재단법인 탄허불교문화재단 이사, 불광사 불광장학회 이사, 서울대 총불교학생회 동문회장, 서초반야회장, 국제포교사 11기 회장을 맡고 있다.
[불교신문 2558호/ 9월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