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단 발전 앞장선 스님들 새로운 길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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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광사 작성일2011.08.06 조회5,994회 댓글0건본문
1970년대 또 다른 자화상 - 진정한 변혁의 시작 (下)스님들의 변화와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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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단 행정을 접고 1970년대 중반부터 서울 대각사에서 불광운동을 펼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광덕스님 모습. |
종단 내부 갈등이 격화되는 가운데 1960년대 종단 발전을 위해 고민했던 스님들 중 일부가 1970년대 중반부터 이전과는 다른 길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1960년대 통합종단 출범 후 스님들은 종단으로 모여들었다. 창종(創宗)과 다름없었던 통합종단의 출범은 많은 스님들에게 벅찬 감동과 희망을 안겨 주었다. 대처승이 권력을 잡은 종단은 수좌들에게 절망 그 자체였다.
제 양식조차 챙기지 못하면 참선정진도 마음 놓고 하지 못하던 현실에서 정화는 수좌들에게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안도감과 희망을 주었다.
부처님 법대로 살면서 수행자로서 공부만 하면 개인적으로는 법(法)을 이루고 세간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한국불교를 건설할 수 있다는 꿈을 꿀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젊고 능력있는 스님들은 종단 행정을 맡아 원력을 펼쳤다.
대표적 인물 광덕·법정스님, 재가운동과 은둔으로 전환
해인사 수행환경 조성 앞섰던 ‘수좌’ 중광스님도 다른 길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려주고자 했던 법정스님은 역경(譯經)에 특히 관심을 기울이면서 불교신문을 통해 비구승의 길을 끊임없이 설파했다. 종헌 종법을 초안할 정도로 현대 사회 법률 지식이 풍부했던 광덕스님은 행정 정비에 관심을 기울였다. 국제관계 교류에 특히 공이 많은 범어사의 능가스님, 종무행정 분야와 승가교육에 공이 많은 월주스님 등 많은 젊은 스님들이 종단 중앙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종단의 현실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스님들은 공부하지 않았고 종단은 종권을 놓고 서로 반목했다. 자질 없는 승려들이 폭력을 행사해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종단과 사회는 한 목소리로 교육의 부재를 꼬집었다. 중앙종회 의장을 오래 역임하고 동국대 이사로 존경을 받았던 벽안스님은 1971년 1월 당시 스님들의 모습을 이렇게 지적했다.
“현실을 살펴볼 때 중ㆍ고등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기초실력 없는 아이들을 모아서 머리만 깎아주고 교육에 관한 것은 일고의 여지도 없고 보니 철이 없는 청년 승려들은 날로 타락의 길로만 휘말리어서 승려다운 행동은 한 가지도 없고 이리저리 유랑생활만 하는 까닭에 세인(世人)들의 빈축을 면할 도리가 없을 수밖에 없다. 이의 책임소재를 규명하고 만시지탄은 있더라도 하루빨리 교육기관을 신설해서 실답게 도제들을 양성함으로써 올바른 승려가 배출되어 먼저 교단을 정화하고 다음에 이 세상에 고민하고 있는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따뜻하고 평화스러운 부처님의 품안으로 귀화시킬 계기가 이루어질 것이다.”
교육을 받지 못한 젊은 스님들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종단은 노련한 몇몇의 농간과 장난에 쉽게 휘둘렸다. 교육을 강조하거나 승려 위계질서를 세우고 혹은 감찰원 규정부 등을 동원해 강압적 정책도 사용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다른 길’을 모색하는 스님들이 나타났다. 종단 중앙의 개혁과 혁신을 통한 한국불교의 변화라는 꿈을 수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어떤 스님은 아예 종단을 떠나 산사로 들어갔으며 어떤 스님은 재가자 교육을 통한 변화의 길로 방향을 수정했다.
물론 남아서 끝까지 고군분투하는 스님도 있었다. 이는 1955년 정화를 통해 종단 중앙을 장악한 뒤 지방으로 내려가 선원을 세웠던 정화 초기 지도부와 또 다른 모습이었다. 정화를 이끌었던 금오스님, 효봉스님, 동산스님, 지효스님 등 1950년대 정화지도부는 청담스님, 경산스님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지방 사찰에서 선원을 개설해 수좌들을 지도했다. 당시 선승들은 수좌들이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는 선원 몇 곳을 개설하는 정도가 정화의 목표였다.
그래서 중앙은 몇몇 스님과 젊은 학승들에게 맡기고 서울을 떠났다. 원래 예정했던 길로 간 것이다. 하지만 1960년대 신생 종단을 키우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젊은 스님들은 종단 현실에 절망해 선원 수좌가 아닌 다른 길을 모색했다.
이들이 중앙에서 새 길을 모색하는 동안 지방에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월정사 등 한국전쟁에서 폐허가 된 사찰은 하루 세끼를 먹기 힘든 과정에서도 복원 불사를 훌륭하게 성취했으며, 선원에는 많은 수좌들이 좌복에 앉았다. 비구니 스님들은 수원 봉녕사 등에서 보듯 주로 강원을 개설해 학인들을 공부시켰다.
1960년대 중앙에서 맹활약하다 1970년대 다른 길을 모색한 대표적인 스님으로 광덕스님과 법정스님을 꼽을 수 있다. 광덕스님은 1970년대 초부터 새 불교운동을 모색한다. 스님은 1964년 봉은사 주지를 맡을 당시부터 이미 대학생수도원을 개설하거나 젊은 스님들과 수행공동체를 개설한데서 보듯 종단 중앙의 변화뿐만 아니라 사부대중이 함께 수행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운동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봉은사를 나온 뒤 성철스님을 도와 승가대학 설립을 구상하는 등 승려 교육에 집중했던 광덕스님은 1971년 제3대 중앙종회에 진출, 청담스님의 총무원 아래서 종회의원 총무부장 등을 맡아 다시 한번 종단 행정의 현대화를 위해 힘쓴다. 스님은 당시까지만 해도 종단의 발전이 곧 불교 발전이라고 생각했다.
생전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종단을 영예롭게 하기 위해서 밤낮없이 노력했던 때가 있었다. 종단을 발전시키는 것은 종단이 이 시대에 짊어진 사명을 추구하는 것이고 완수하기 위한 종도들의 일치된 노력을 말하는 것이다.” 송암스님 <광덕스님 시봉일기>
갈수록 격화되는 내부갈등 실망, 근본적 변혁 고민 결과
지방 사찰에서도 교육 선수행 열풍 등 다양한 모습 보여
하지만 종단은 안정되지 않고 혼란은 가중됐다. 그런 가운데서도 종단 발전을 위해 무거운 서류가방을 들고 대각사와 조계사를 오가던 스님은 결국 큰 병을 얻어 수술을 하게 된다. 원래 몸이 좋지 않았던 스님은 과로로 인해 더 큰 병을 얻게 된 것이다.
상좌 지홍스님의 말이다. “결국 스님께서는 종단 일로 과로한 나머지 약한 몸에 병이 들어 큰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수술을 받고 몇 달간 회복 기간을 지난 후 스님은 종단에서 완전히 손을 놓으셨습니다. 그 후 스님께서는 오직 대중포교에만 전념하셨습니다.” <광덕스님 시봉일기 중에서>
종단행정에서 손을 뗀 스님은 서울 봉익동 대각사 골방에 주석하면서 1974년 11월1일 월간 <불광>을 창간하고 1975년 10월16일 불광법회를 창간, 불광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한다. 스님은 제4대 중앙종회에서 사의에도 불구하고 부의장에 선출되지만 종단행정에서는 완전히 손을 뗀다. 그리고 재가대중의 변화를 통한 근본적 변혁을 시도하며 불광의 기치를 든다.
법정스님 역시 1960년대 주로 역경불사에 매진하며 종단과 한국불교의 변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스님은 불교신문 논설위원을 역임하며 주로 글을 통해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을 전파하는데 매진했다.
법정스님은 당시 부처님 법에 따라 부처님 제자답게 비구의 길을 가야함을 열정적인 글로 설파했다. 그 유명한 ‘부처님전상서’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등을 통해 종단의 현실을 꼬집고 불제자의 도리를 강조했다.
“이십대(二十代)는 ‘학교병(學校病)’에, 들고 삼십대(三十代)는 ‘주지병(住持病)’ 사(四)ㆍ오십대(五十代)에는 ‘안일병(安逸病)’에 걸려있다”고 한탄한 법정스님은 “요즘 우리 주변(周邊)에서는 사문(沙門)의 분수와 체면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있다. 법(法)을 위해서 하는 다름이라면 또 몰라도 하잘 것 없는 직위(職位)를 가지고 늘어 붙고 있으니 말이다. 출세간(出世間)의 입장에서 내려다 볼 때 개가 똥을 가지고 으르렁대는 꼴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라고 꼬집었다.
스님의 질타는 종단 스님뿐만 아니라 사회를 향해서도 멈추지 않았다. 1970년 6월 <불교신문> ‘여시아문’에는 당시 월남 파병을 비판하는 글을 실어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사회를 비판하는 글을 멈추지 않아 정부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낙인 찍혔던 스님은 결국 구속될 위기에 처한다.
이에 당시 총무원의 월주스님이 나서 무마한다. 스님은 1975년 가을 봉은사 다래헌을 나와 송광사 불일암으로 들어간다. 불교와 종단에 깊은 애정을 지녔던 한 젊은 수행자가 결국 10년 넘는 종단의 변화를 향한 열정을 접고 ‘무소의 뿔처럼’ 비구의 길을 홀로 떠난 것이다.
또 기억해야 할 인물은 고중광스님이다. 기이한 선화(禪畵)로 서양에서 더 유명한 중광스님은 1970년대 중반까지 중앙종회의원을 역임하며 해인사 성역화 운동에 앞장선 수좌였다. 스님은 1960년대부터 불교신문에 해인사 공원화 반대와 수행풍토 조성을 촉구하는 기사를 지속적으로 실었다.
제4대부터는 중앙종회의원을 맡아 공원법 개정 운동을 더 강하게 펼쳤다. 선승으로 수행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오늘날의 수경스님과 비견되는 역할을 했다. 그는 또 종단을 아끼는 마음이 강해 정부의 불교 간섭을 그냥 보고 넘기지 못했다.
수좌로 종단을 아꼈던 종회의원 고중광스님은 얼마 뒤 선화가의 길을 간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1977년 영국 왕립 아시아학회 초대전에 참석해 자작시 ‘나는 걸레’를 낭송한 후 ‘걸레 스님’으로 불리기 시작하고 기행과 스캔들이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1979년 승적을 박탈당한다.
떠난 사람이 있는 반면, 끝까지 남아 종단과 영욕을 같이 한 스님들도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월주스님이다. 그 길을 두고 누가 옳으냐 그르냐로 판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당시 시대가 스님들에게 모두 요구한 소임이었다.
이 모든 것들이 불교와 조계종이라는 큰 울타리 안의 다양한 자화상이며 자산인 셈이다. 하지만 1970년대로 끝나지 않았다. 변화에 대한 갈망과 실망, 떠난자와 남은자의 고뇌는 이후에도 반복됐다.
[불교신문 2728호/ 6월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