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고양시 북한산성의 중흥사(重興寺)는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전후 복구의 전초기지였다. 북한산성 축성 전까지도 30여 칸에 불과하던 작은 사찰이었지만 1712년 왕실 지원아래 북한산성 축성의 중심이 되면서 136칸에 달하는 대규모 승영(僧營)사찰로 확장됐다.

북한산성 안에서도 전략적 요지에 위치한 중흥사에는 팔도도총섭을 겸한 승대장이 머물렀고, 산성의 유지관리는 물론 승군 지휘 사령부의 위상도 갖춘 종합도량이었다.

임진왜란에서 승병의 역할이 커지고 왕실에서 선대왕의 제사를 사찰에 넘기는 등 변혁의 중심에 섰던 중흥사의 면모는 화려하다. 그만큼 왕실의 불교에 대한 신뢰가 컸다.

북한산성 축성 · 한양 방위 거점

전국 산성 복원 승병 18만명 동원

조명제 교수(신라대 사학과)는 관군이 패전을 거듭한데 비해 평양성 탈환 전투를 비롯해 의승군이 커다란 성과를 거둬 지배층의 불교에 대한 인식이 전환되는 계기가 마련됐다며, 한양 탈환 이후 전쟁이 소강 상태에 들어가면서 승군 일부가 장기전에 대비해 각종 물자 운송과 산성 축성, 곧 남한산성 공산성(경상도) 교룡산성(전라도) 수양산성 등에 동원됐다고 밝혔다.

산세가 웅장한 서울 외곽의 북한산 중흥동 일대에는 고려 현종이 거란 침략시에 피난처였다. 숙종 37년(1711)에 부분적 토성을 석성으로 고치는 등의 축성이 이뤄졌고, 승군도 동원됐지만 구체적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다만 동래부 축성역의 기록을 근거로 추산한 내역으로 전국 축성 부역 승군은 18만1482명으로 부역 노동력 전체의 43.5%에 달하며, 일반인의 부역일이 2일간인데 비해 승군이 17일 이상 부역으로 나왔다. 특히 기율이 엄정하고 고된 작업에 능숙한 노동력의 질적 우수성에 경비 자부담의 승군에 대한 가치는 상당히 높아졌다는 분석이다.

이후 북한산성의 승영에는 팔도도총섭 겸임의 승대장(당시 휴정선사)를 위시해 군사조직 편제로 전국을 관할하고 국가의 공적기구나 군대와 함께 산성의 관리와 방어에 의승군이 상주하는 중심역을 담당했다.

1904년 소실되기 이전의 136칸의 대찰이었던 중흥사 전경.
조선후기 국토방위전략에서 북한산성의 위상에 대해 박재광 연구원(전쟁기념관 교육팀장)은 “국왕을 정점으로 관료와 장졸, 도성민으로 이어지는 삼군민(三軍門) 도성방위체제 이후 북한산성의 축성과 수비를 담당한 중흥사를 비롯 전국에 11곳의 승영사찰이 조성됐다”며 “승영사찰은 승군이 주둔하는 사찰로 산성 수축과 수비를 담당이외에도 국가 방위의 일환으로 군사훈련을 하여 국난에 대비하였으며, 무기 제조와 각 창고를 지키는 역할도 했다”고 밝혔다.

특히 중흥사는 군기고.화약고 등 군사시설을 갖춰 북한산성 내의 총섭본부로서 성을 수축하고 수성하는 역할을 수행토록 하면서 북한산성 거주 150여 명의 승려를 승군으로 편성하고 1714년(숙종 40) 남한산성 거주 의승 400여 명 중에서 200여 명을 북한산성에 이주시켜 북한의 의승을 350여 명으로 증원했다고 밝혔다.

조명제 교수는 이런 승군은 “호국불교론에서 거론되는 것과는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라며 전국 불교계가 자발적으로 의승군으로 참전하고 일반백성이 기피하던 국가의 각종 역과 함께 근무 여건이 좋지 않아 기피하던 산성 방어와 관리까지 수행했다고 밝혔다.

이어 “국가가 불교계에 대한 가혹한 수탈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험난한 시대를 겪으며 불교계를 유지 계승한 과거사를 통해 불교계의 자화상 이해” 등으로 진단이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쇠퇴를 거듭하던 중흥사는 1904년 원인 미상 화재 발생과 1907년 일본군이 중흥사에 헌병대를 주둔시키면서 폐사에 이르게 된다. 중흥사복원추진위원회(회장 지홍스님)가 10년 전부터 복원불사에 들어가 오는 4월18일 대웅전 상량식을 앞두고 불광연구원 주최로 3월31일에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학술연찬회를 연다.

[불교신문 2802호/ 3월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