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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마음마저 쉬어가는 절터 순례] 3. 파주 혜음원사지(惠蔭院寺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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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광사 작성일2025.03.18 조회1,06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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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마저 쉬어가는 절터 순례는 옛 절터 유산의 답사를 통해 불교문화재의 가치를 재인식하고 고즈넉한 빈터에서 좀 쉬어가자는 취지도 있지만, 오히려 기존 사찰 순례에 더한 신행문화로 확장해보고자 발원의 걸음이기도 하다.

 

 곧잘 누구나 옛 절터의 고상함에 격려의 박수를 치고 동행을 원하지만, 막상 아무것도 없는 텅빈 폐허에 서성이다 보면 어느새 여기는 어디? 나는 누구? 하며 치솟던 호기심도 사그러진다.그래서 불자들과 함께 절터에 가면 금당 자리나 석탑 앞에 이르러 항상 예불 의식을 하고 명상도 한다. 주로 예불과 정근, 순례 발원문, 보현행원품, 반야심경을 함께 독송한다. 그리고 목탁 정근을 하며 탑돌이 의식을 갖는다. 옛 조사들의 향훈을 기억하고 추모하면서 지금 여기서 함께 살아갈 불교를 다짐해 보는 시간을 열어 보는 것이다.

 

 1999년 혜음원사지의 첫 절터 발견자는 당시 동국대 대학원생이었던 김경섭 연구원이었다. 혜음령 인근에 깨진 기왓장이 널려 있다는 인근 주민의 제보를 받고, 현장을 조사를 하다가 결정적인 발견, 바로 惠蔭院(혜음원)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의 암막새를 발견한 것이다. 사적 제464호 발굴의 시작이라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공식적인 명칭은 혜음원지(惠蔭院址)이다. 그러나 우리는 파주 혜음원사지로 부르기로 했다. 지금은 흔적조차 없지만 원래 혜음원을 관리하던 혜음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을 과거 파주 국립호텔 혜음원이라고 그럴싸하게 부르기도 하지만, 사실 고려 왕실사원지 혜음사가 있었고 사찰의 관리 영역에 혜음원이 있었다. 창건 당시 혜음사는 사찰이면서 길손을 위한 여관을 운영했었고 빈민구제기관으로서의 역할도 하는 등 사회복지 시설을 겸한 종합적인 큰 규모의 왕실 사원이었다. 

 

 혜음사는 고려 예종 17년 1122년에 완공되었다. 왜 이곳 파주에 절을 짓고 여관을 짓고 무료 식당을 열게 되었을까? 김부식이 저술한 『동문선』의 <혜음사신창기>를 살펴봐야 한다. 

 

 “남방에 있는 모든 고울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사람이라든지 또는 위에서 내려가는 사람이 모두들 이 길을 사용하기 때문에.... 산 언덕이 깊숙하고 멀며, 초목이 무성하게 얽혀 있어서 호랑이가 떼로 몰려다니며... 불한당들이, 여기에 와서 은신하면서 간악한 짓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반드시 많은 동행자가 생기고 무기를 휴대하여야만 지나갈 수 있도록 서로 경계 하였는데도, 오히려 살해를 당하는 자가 1년이면 수백명에 달하게 되었다.

 

 이에 1119년 고려 예종 15, 8월 왕의 측신인 이소천이 국가 재정을 사용하지 않으며 민력을 동원하지 않고도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묘책으로서 사찰의 건립을 상주하여 왕의 윤허를 받고 묘향산에 가서 주지 혜관을 설득하여 승려 증여 등 16명을 동원하고 비용을 마련하였다.”

 

 고려 수도인 개경에서 남경(지금의 서울 강북권)으로 가는 길은 파주 일대를 지나는 코스가 가장 빠른 길로 혜음령 고개를 통과해야만 되는데 이 혜음령을 넘기가 수월치 않았다. 길이 좁고, 호랑이와 도적떼가 출몰하여 그 어려움과 시급함이 왕실에까지 이르게 되어, 대규모의 숙박시설과 사회복지시설, 그리고 이곳을 관리 운영할 사찰을 짓게 되었으며, 수도인 개경과 남경을 오가는 왕의 행차시 머무를 수 있는 행궁 또한 조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혜음사신창기>를 통해 알 수 있지만 혜관스님을 비롯한 여러 스님들의 물심양면의 노고와 노동력이 결집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고, 더불어 많은 불자들의 모연 불사도 동참되었으리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만, 역사적 사료가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현재 혜음원사지는 크게 세 구역으로 구획되어 있다. 유물전시관을 겸하고 있는 방문자센터에서 볼 때, 전면이 숙박시설이었던 원(院) 지역, 중간 구역의 왼편은 혜음원을 관리 운영하던 사찰인 혜음사(寺)가 들어섰던 곳, 오른편은 왕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인 행궁(行宮)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혜음원사지는 원(院)과 사(寺)와 궁(宮)이 함께 들어간 복합시설로 그 중심에 혜음사가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파주 혜음원사지는 1999년에 발견된 이후 10여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총 37동의 건물지 포함 우물지, 연못지, 배수로, 용두, 청자, 금동불 등 많은 유구와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산등성이를 계단식으로 깎고 다져서 모두 11단의 건물터를 조성하면서 흘러 내려오는 물을 가두었다 흐르도록 하는 집수(集水) 시설은 매우 흥미로운 수로(水路) 축조 기술로, 양주 회암사지의 배수 방식과 비교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혜음사의 법당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금당으로 추정되는 공간과 과거 윤장대를 설치했던 열십자 모양의 돌을 확인할 수 있다. 

 

 <혜음사신창기>에 의하면 혜음원에는 창건 당시부터 법당이 있었다고 전한다. 또 <삼국사기> 편찬 책임자인 김부식이 남긴 글에도 “혜음원에는 별궁 외에 사찰도 포함돼 있다”고 적혀있다. 하지만 고려 무신난 이후 급격히 쇠퇴하면서 조선 초 혜음사 사찰은 없어지고 혜음원은 겨우 명맥만 유지하여 작은 규모로 축소된 것으로 보인다.

 

 이번 혜음원사지 순례를 통해 공익적 가치를 실행하였던 고려시대 사찰의 역할과 위상을 생각하게 된다. 그에 반해 지금은 ‘고려 국립호텔 혜음원지’ 또는 ‘고려의 복합문화공간’이었다는 본말이 전도된 홍보만이 횡횡한 채, ‘혜음사’의 역사와 위치는 사라지고 없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혜음원사지는 사찰에서 국가의 역원을 운영하던 고려만의 독특한 원관(院館) 사찰이면서 왕의 행궁이 함께 조성된 특별하고 중요한 사례다. 그동안 크게 주목된 행궁과 역원의 의미에 비하면 사찰로서의 혜음사는 그 존재가 미비하기에 이제라도 ‘혜음사지’로서의 위상을 찾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숙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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