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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포커스]스승께서 주신 보리수, 깨달음의 꽃 -광주 각화사 주지 혜담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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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광교육원 작성일2015.11.04 조회6,39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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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께서 주신 보리수, 깨달음의 꽃
광주 각화사 주지 혜담스님
2015년 11월 03일 (화) 19:33:14 유철주|객원기자
   
스승 광덕 스님에게 받은 보리수 잎을 들어 보여 주는 혜담 스님.
가을이 되니 산이 바쁘다. 아니 산은 그대로인데 사람들이 바쁘다. 희노애락(喜怒哀樂), 갖가지 사연 속에 정상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모든 것을 산은 받아준다. 그래서일까? 봉우리마다, 골짜기마다 사람들의 사연은 차고 넘친다. 그렇기 때문에 ‘산’일 것이다. 
가을의 한 가운데에서 산과 같은 어른을 찾아 길을 나섰다. 때가 때여서인지 길이 수월하지 않다. 이른 아침 가을 안개까지 찾아와 여러모로 번잡하다. 그래도 맑고 밝은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마음은 편해진다. 
목적지는 경기도 광주에 있는 각화사(覺華寺). 광덕스님의 상좌 중 한 분인 혜담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곳이다. 차를 달려 주소지에 나온 한적한 마을에 이르렀지만 각화사는 보이지 않았다. 차에서 내려 마을 어르신들에게 절 위치를 여쭈어보니 “길을 따라 쭉 올라가면 된다”고 했다. 그렇게 갔지만 좀처럼 절이 나타나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검단산의 울창한 숲과 나무들뿐. 이 길이 맞나? 라는 의문과 함께 오솔길을 따라 좀 더 올라가니 대웅전과 요사채가 전부인 작은 절 각화사가 보인다.
스님을 닮은 절, 각화사
대웅전을 참배한 뒤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요사채로 향했다. 방에 들어가려는데 커다랗게 쓰인 주련 글씨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圓覺山中生一樹 원각산중생일수
開花天地未分前 개화천지미분전
非靑非白亦非黑 비청비백역비흑
不在春風不在天 부재춘풍부재천 
원각산에 한 그루의 나무가 자라나니 
하늘과 땅이 생겨 나뉘기도 전에 활짝 꽃을 피웠네. 
푸르지도 희지도 않고 또한 검지도 않으나 
봄바람에도 하늘에도 있지 않다네.
   
혜담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경기도 광주 각화사 모습.
주련의 내용과 절 이름이 딱 맞아 떨어졌다. 각화(覺華)에는 ‘삼라만상이 그대로 깨달음의 꽃’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우주 전체가 부처의 모습을 하고 있는 ‘각화’”라는 것이다. 스님은 그래서 절 이름을 각화사라고 했다. 세상이 생기기 이전부터 우리 모두는 부처였다는 것이 스님의 말씀이다.
스님이 각화사에서 주석한 것은 벌써 오래 전부터다. 경기도 양평의 토굴에서 『대품반야경』 번역을 하던 중 1994년 조계종 개혁불사에 동참했다. 원치 않게 긴 기간 동안의 소임을 마치고 다시 주석할 곳을 찾다가 마침 각화사와 인연이 돼 십수년 전부터 이곳에서 수행하고 있다. 
스님은 그동안 『대품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번역했으며, 이후 『반야불교 신행론』, 『신 반야심경 강의』, 『한강의 물을 한 입에 다 마셔라』, 『방거사 어록 강설』, 『행복을 창조하는 기도』 등 10여 권의 저서를 펴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스님의 방에는 경전과 어록, 각종 연구서들로 가득했다. 방도 모자라 거실과 다른 방에도 오직 책뿐이다.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책을 보고 글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도움을 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나름대로 정리를 하고 있는 것이에요. 마음이 날 때마다 하나씩 쓰다 보니 책이 몇 권 됐습니다.”
스님은 얼마 전 종단의 소임을 공식적으로 정리했다. 조계종의 사법부라 할 수 있는 호계원의 재심호계위원직을 던졌다. 최근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의현 스님 재심 판결’ 때문이었다.
“저와 청화스님은 개혁 당시 각각 해종특위 위원과 초심호계원장을 맡고 있어서 이번 판결의 제척사유에 해당됐습니다. 그래서 심리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대중들의 뜻과는 다른 판단이 나왔어요. 저로서도 상당히 당황스러웠습니다. ‘큰일 났다’ 싶었습니다. 판결 이후 대중들의 반발은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판결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어찌됐든 구성원으로서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표를 냈습니다.”
스님은 담담했지만 단호했다. 법(法)대로 판결이 되지 못하는 것에 진한 아쉬움을 표했다. 논란이 제대로 해결되길 바라며 ‘스님의 물건’을 알아보기 위한 인터뷰는 계속됐다. 스님의 말씀을 통해 확인한 물건은 출가와 출가 이후 수행과정을 관통하는 것이었다. 

   
보리수 액자의 뒷면. 광덕 스님이 내린 법호와 법명 '혜담지상'이 보인다.
스승 광덕스님의 선물
스님의 불교 인연은 고등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불교학생회에 가입한 뒤 부처님 가르침을 접한 스님은 학교를 마치면 바로 출가하겠다는 원(願)을 세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1살에 스님은 해인사로 갔다. 그곳에서 혜암스님을 시봉하며 출가자의 삶을 시작했다. 혜암 스님은 “시간이 날 때마다 참선하라”며 ‘무(無)’자 화두를 줬다. 그러던 중 다시 범어사로 가 광덕스님을 만났다. “반듯하면서도 따뜻한 신사와 같았던” 광덕스님의 모습에 감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행자생활을 마치고 계(戒)를 받기 전까지도 은사스님을 정하지 못했습니다. 큰스님을 몇 번이나 찾아뵀지만 쉽게 허락을 안 해주셨어요. 큰스님께서는 상좌를 받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렇다고 또 냉정하게 내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뒤 큰스님께서 ‘지상(至常)’이라는 법명(法名)을 주셨습니다.”
스님은 1970년 음력 10월 15일에 계를 받았다. 이날은 동안거를 시작하는 날이기도 했다. 광덕스님은 혜담스님에게 “다들 열심히 정진하는 시기이니, 너는 앞으로 100일간 하루 1000배씩 10만 배를 하라”고 말했다. 상좌 지상에게 내리는 첫 숙제였다. 은사스님의 말씀에 따라 절을 시작했지만 강원에서도 공부를 해야 했기에 시간적으로 그리 여유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스님은 하루에 500배를 하기로 다짐하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5만 배를 해냈다.
“절을 하고 나니 스님의 삶, 수행자의 삶이 무엇인지를 조금 알게 됐습니다. 뭔가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어렴풋이나마 ‘감이 온다’는 그 느낌말입니다. 그때 큰스님께서 괜히 절을 시킨 게 아니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그때 5만 배를 한 것이 지금까지 저에게는 수행의 큰 밑거름이 되는 것 같아요.”
이후 스님은 강원 공부에 더 매진했다. 하루하루 신심(信心)을 내며 공부를 이어갔다. 그러던 중 『서장』에서 ‘神通竝妙用 運水及搬柴(신통병묘용 운수급반시), 신통이니 묘용이니 하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물 긷고 나무 나르는 일 바로 그것이라네’라는 구절을 보고 큰 울림을 느껴 오대산 적멸보궁에 가서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 스님은 이후 광덕스님의 권유로 동국대 승가학과 1기로 입학해 대학을 마치고 그 후에는 군법사로서 장병들을 만났다.
“군법사를 마칠 때쯤 10·27법난이 일어났습니다. 국가권력의 부당한 폭력적 탄압을 받았지만 스님들은 너무 무기력해 보였어요. 그래서 공부를 해 ‘힘 있는 불교’를 해보자는 생각을 했어요. 동국대 교수를 하며 후학들을 길러내고 싶었습니다. 저의 바람과는 다르게 큰스님께서는 ‘동국대 교수는 거사들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거사는 중노릇을 못 한다’며 수행에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혜담스님은 이후 토굴과 지리산 칠불암, 해인사 선원 등에서 기도와 정진을 이어 나갔다. 1982년에는 광덕스님을 도와 불광사 문을 열었다. 한국불교에서 공식적인 도심포교가 시작된 것이다. 이어 1986년에는 일본 교토의 불교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공부했다. 석사와 박사를 함께 하기 위해 유학을 떠나는 것이 보통이지만, 스님은 “딱 석사만 하기 위해” 유학을 했다고 한다.
“출가 직후부터 큰스님께 ‘반야바라밀’에 대해 들었지만 좀처럼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했어요. 그래서 관련 책과 자료가 많았던 일본에 가서 좀 더 체계적으로 공부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공부를 해보니 학문적으로 반야바라밀에 대해 조금은 이해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광덕 스님의 삶과 사상을 이해하기 시작할 때쯤 평생 간직하게 될 ‘물건’이 생겼다. 
광덕 스님이 상좌들을 불렀다. 제자들에게 법호(法號)를 주기 위해서다.
“1988년에 큰스님께서 저의 맏사형부터 여덟 번째 사제까지를 불러 법호를 내려주셨습니다. 저에게는 ‘慧潭(혜담)’을 주셨습니다. 굳이 뜻을 해석하자면 ‘지혜의 연못’이라고 할까요? 그러면서 각자에게 보리수 잎을 주셨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는 법이 없으니 보리수를 깨달음의 징표로 삼아서 수행정진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법이 없다’는 것은 반야바라밀의 사상 그 자체입니다. 깨달음조차 없다는 것이죠. 오직 내 안의 불성을 그대로 드러내 세상과 나누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광덕 스님은 또 다른 제자들에게도 보리수 잎을 건네며 끊임없는 정진과 사회적 회향을 강조했다고 한다.
“저에게는 이 보리수 잎이 생명과도 같습니다. 여기에는 큰스님의 가르침과 당부가 온전히 녹아 있습니다. 제가 게을러지거나 나태해질 때 이 보리수를 보면서 저의 마음을 다 잡아 왔습니다.”
스님은 현재 보리수 잎을 정성스럽게 표구해 놓았다. 유일한 상좌인 불광사 주지 본공스님에게 건네줄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어른들을 모시고 함께 한 사진. 왼쪽부터 혜담, 일타, 혜암, 광덕스님.
“반야바라밀이 부처요, 공(空)이요, 불성(佛性)”
스님은 학문적으로 이해했던 ‘반야바라밀’을 최근에 다시 새롭게 느꼈다고 한다. 계기가 되었던 것은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하면서다.
“몇 년 전에 뇌출혈로 병원에 한 달 이상 입원했었어요. 병원에 있으니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그래서 퇴원하자마자 ‘반야바라밀’ 염송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반야바라밀에 대한 큰스님의 법문과 저서들을 다시 찾아 듣고 읽었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하루 24시간 내내 반야바라밀에 집중하게 되었고, 어느 순간 반야바라밀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반야바라밀이 보이면서 조사스님들의 어록이 쉽게 이해되기 시작했고, 화두의 의문도 풀리게 됐다고 한다. 그럼 혜담 스님이 생각하는 반야바라밀은 무엇일까?
“반야바라밀은 부처의 다른 이름입니다. 이것은 반야부 경전에도 나와 있습니다. 반야바라밀이 부처라고 말입니다. 부처는 완전한 지혜와 자비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부처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반야바라밀이 곧 부처이고 공(空)이고 불성(佛性)입니다. 이름만 다를 뿐, 그래서 반야바라밀은 세상의 근본이 됩니다.
미혹한 상태에서는 모르지만 눈을 뜨고 보면 모든 주변의 생명은 완벽함과 환희심을 갖춘 반야바라밀 생명입니다. 반야바라밀은 막연하게 텅 빈 공(空)이 아니라 한량없는 위신력과 무한한 능력과 기쁨으로 꽉 차 있는 것입니다.”
   
광덕 스님을 모시고 제등행렬에 나선 모습.
혜담스님은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세상이 생기기 이전에 우리 모두가 깨달음의 꽃이었듯, 반야바라밀은 세상의 근본이라고 했다. 그래서 광덕스님의 생전 가르침은 혜담스님에게 아직도 절절하게 남아있다.
“큰스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철저하게 부처로 태어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부처고 너도 부처라는 것이 큰스님 말씀의 핵심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부처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런 큰스님의 말씀은 쉽게 들을 수 있는 법문이 아니었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불교를 짓누르고 있는 ‘비관’, ‘허무’, ‘은둔’, ‘염세’와 같은 것들을 다 걷어내야 한다고 큰스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큰스님께서는 불교의 어둠을 걷어내고 맑고 밝은 희망의 불교가 가능하다고 항상 강조하셨죠.”
그래서 스님은 이러한 광덕스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마하반야바라밀 염송은 불자들이 쉽게 할 수 있는 수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염송을 하다 보면 어렴풋하게나마 공부의 맛을 볼 수 있어요. 하루에 30분만이라도 한다면 큰스님께서 가르치려고 하셨던 것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행복에만 집착하지 말고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길을 우리가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인자하게만 보이던 스님의 얼굴이 다소 상기되기 시작했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반야바라밀을 공부했으면 하는 바람을 스님은 숨기지 않았다. 
스님은 올해 들어 큰 수술을 두 번이나 했다고 했다. 그래도 온화한 미소는 여전했다. 혜담스님은 오래 전부터 해온 한 달 두 차례의 불광사 법문도 어김없이 진행하고 있다. 매월 첫째 수요일과 세 번째 일요일에 불광사에서 진행되는 호법발원법회와 일요법회에서 혜담스님을 만날 수 있다. 호법발원법회는 광덕스님의 가르침을 올곧게 전하기 위해 생긴 법회다.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을 주제로 진행되며, 다른 사찰에서는 접할 수 없는 것이다.
   
체육대회에서 어린이 불자의 손을 잡고 함께 뛰는 광덕 스님. 스님의 포교원력을 상징하는 듯한 사진이다.
“1982년에 잠실에 들어 선 불광사는 소박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언젠가는 중창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지홍스님이 회주를 맡으면서 불사가 추진돼 번듯한 공간이 마련됐습니다. 지홍스님의 원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제 생애에 웅장한 불광사를 다시 보게 돼 마음을 모아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할 뿐입니다.”
앞서 밝혔듯이 스님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주변 상황들을 정리하고 있다. 불자들을 만나 법문하고 공부하는 일만 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스님은 조만간 새로운 책을 쓰는 일을 시작할 계획이라고 한다.
“각화사에 와서 한 20년을 살면서 도량도 새로 정비하고 또 많은 불자들도 만났습니다. 그 중 제일 열심히 한 것은 경전과 어록을 본 일입니다. 어느 날 제가 저를 바로 보니 한가한 무사도인이 돼 있습니다. 일 없는 사람이 되었어요. 하하. 그래서 이제는 특별히 무엇을 하기보다 지금까지 공부했던 반야바라밀을 정리하는 책을 쓰려고 합니다. 
가제이긴 하지만 첫 번째 책의 제목은 ‘달마의 종교, 혜능의 불교’로 정해 놓았습니다. 달마스님이 인도에서 오셔서 새로운 불교를 정립했고 육조혜능 스님이 오늘날의 선불교(禪佛敎)를 구체화시킨 역사와 이야기를 풀어내 볼까 합니다. 
두 번째 권은 이론보다 실제 생활에 관한 내용입니다. ‘반야바라밀’을 중심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각자의 삶에서 어떻게 구현해야 하는 지에 대해 정리하고 싶어요. 몇 년 안 남았지만 70이 되기 전에는 시작해보겠습니다. 하하.”
스님의 말씀을 듣는 사이 자욱했던 아침의 안개는 사라지고 모습을 감췄던 절 앞의 풍경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금세 눈이 시원해진다.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다시 서울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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