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0년 3월 둘째주 일요법회' 일체유심조'에서' 다름'과 '느림'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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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은주 작성일2016.03.16 조회34,794회 댓글0건본문
이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행동의 자유"를 주장하지만
그대가 알아야 하는 것은
청정한 삶을 위해서는 "행동하지 않을 자유"가 필요하다.
바르지 못한 것을 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는 자유가 필요한 것이다.
'일체유심조'에서 '다름'과 '느림'을 보다
불광교육원 목경찬 전임강사
생각해보면, 어릴때 통도사에서 비몽사몽간에 들었던 스님의 새벽예불의 소리가 불교에 대한 인연이 된 듯합니다. 새벽예불 소리에 대한 좋았던 인상에 남아 대학에서 불교 동아리 활동으로 이끌었고, 불교의 핵심어인 '일체유심조'에 대해 생각으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
'일체유심조'를 마음먹은 대로 된다고 해석하면 두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가진자가 못가진 자를 구슬리는 말로 악용되고 있습니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 그 말은 오히려 사치로 들릴 수 있는 말입니다. 아파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상태에서 마음먹기 마음이라고 위로한다면 그 말은 무심한 침묵보다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마음먹기 나름이다는 이말은 내 의지에 따라 세상이 다를 수 있다는 의미인데, 세상이 진짜 의지대로 될 수 있는가요?
다른 문제는 일체유심조가 신비주의를 조장하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못깨달았으니 잘 안되지만 깨달은 자는 세상을 마음대로 할수 있을거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석가모니 부처님은 망하는 자신의 나라도 구하시지를 못하셨고, 신통으로 나라를 구하라는 제자에게 부처님도 인연의 법칙은 어쩔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세상일이 마음먹은 대로 된다면 이 세상은 당연히 불국정토여야 할 것입니다.
신행생활을 하면, 우리가 물질적인 세계를 내려놓고 정신적인 세계를 추구하면 쉽게 신비한 체험을 하기도 합니다. 이때 자기가 알지 못한 세계를 경험하면 쉽게 빠지게 되는데, 자신이 이성적이라고 판단하는 사람이 신비주의에 더 잘 빠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잠깐의 체험으로 인해 신비한 능력을 얻으려는 욕심을 버리기 어렵게 되기도 합니다.
'일체유심조'라하면 원효스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원효스님이 지난밤에 모르고 마신 맛있었던 물이 해골바가지 속의 물이라는 것을 알고는 구토를 하게 되면서 깨친 큰 깨달음으로 일체유심조를 기억합니다. 원효스님이 가진 해골물이 물이 더럽다는 생각은 그 이전 생활에서 만들어진 생각이고, 그 생각이 저절로 구토를 하게 만든 것입니다. 마음은 '의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온 삶의 흔적을 마음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서양적인 사고를 하는데 서양문화는 마음을 주관적이고 허무맹량하다고 봅니다. 불교에서는 삶의 흔적인 마음은 주관과 객관이 같이 있는 것이고, 마음에 저장된 삶의 흔적을 '업'이라 합니다. 이 업은 사라지지 않으며 마음이라는 창고에 저장되며, 관심있는 부분을 더 강하게 저장되었다가 그때그때 생각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같은 기차소리도 우리는 칙칙폭폭이라 들리고 미국인는 츄츄라고 표현하는데 그 문화가 그렇게 들리게 합니다.
마음은 본래 청정한 부처님 마음과 개인의 살아온 흔적이 저장되어 있는데 중생의 욕심 때문에 그 흔적이 먼저 더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 힘든 것은 각자의 '업' 즉 마음이 다르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우리 삶이 저장되어 있고 그 저장된 정보를 통해 현상을 해석해 내며, 살아온 흔적이 다르기에 다르게 보게 됩니다. 그러기에 부처님의 가르침은 삶의 흔적인 '다름'을 자세히 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이 세상에 적용된다면 그것은 '다름'입니다.
각자 다른 업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는 사회, 모든 사람의 의견이 존중되는 사회가 불국정토라고 본다. 이것이 연기 대한 이해이고 연기를 이해하는 사회가 불국토입니다. 다양한 사고를 가진 것을 인정하는 사회, 의견이 다르면 다투게 되나 끝이 깨끗한 사회가 아닐까요.
훌륭한 지도자는 다양한 의견이 제시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고 그 정책을 수립하는 자입니다. 하나의 의견을 고집하는 사람은 독제자가 되기 쉽습니다. 모든 의견을 들고 종합하려면 어렵고 느리게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양함을 받아들이려면 종합적으로 사고하여야 할뿐만 아니라 느리게 사고해야 한다. 다름을 해결하는 열쇠는 '느림'입니다.
천천히 가는 열차속에서 바깥의 풍경을 제대로 볼수 있지, KTX안에서 바깥의 지나가는 사람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습니다. 주위를 세심히 살펴볼 여유를 가져야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이 여유를 지난한 노력과 수행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앞만 보고 사는 사람의 삶은 건조하고 넓게 보는 삶이 행복함을 되새기면서 ''다름'을 항상 놓치지 않으며, '느림'의 삶을 살려고 노력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