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2560 년 4월 둘째주 일요법회 반야심경을 통해본 반야바라밀 > 불광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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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60 년 4월 둘째주 일요법회 반야심경을 통해본 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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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은주 작성일2016.04.12 조회34,83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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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야심경을 통해본 반야바라밀
                                                                                               
                                                                  전남대 철학과 이중표 교수
   
   광덕큰스님께서 평소 반야바라밀을 중요하게 생각하셨고 반야바라밀로 세상을 구제해야한다고 하신 줄로 압니다. 불광불자들은 반야바라밀을 많이 듣었겠지만 다른 시각에서 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반야바라밀이란 말이 왜 세상에 출현했나?
   저는 초기경전을 연구하는 자로서 부처님이 살아 계셨을때 부처님이 설하신 말씀에 주목하는데, 부처님이 설하신 말씀 속에 반야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부처님이 입멸하신지 500년이 지났을 때 반야경, 금강경, 소품반야경, 대품반야경 등의 반야 사상이 출현하고 이들이 주장한 것이 반야바라밀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으신 법은 너무 심오해서 일반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어 바로 열반에 들까를 고민하셨는데, 이때 범천이 중생들은 진리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고통을 받으므로 부처님이 잘 가르쳐 주셔서 알아들으면 괴로움을 이기고 행복을 얻을수 있을거라고 간청하여 설법하신게 불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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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심오한 진리가 연기법입니다.(우리의 사고와 다름)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끊임없이 흐르고 있고, 이 시간 속에 내가 때어나서 일정시간 흘러가다가 멈추면 죽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공간적으로 몸둥이를 지닌 내가 시간적으로 태어나 죽는 것이다고 생각하나 부처님의 깨달음은 이것과 다릅니다.
   부처님은 우리가 무명으로부터 시작해 잘못된 삶을 살아가면서 잘못된 의식을 형성하기 때문에, 자기가 아는 형태로 세상을 별려놓고 고통을 받고 있다고 통찰하셨습니다. 이것이 12연기법 입니다.
   대승 반야사상의 발생배경은 연기법이 너무 심오하고 이해할 수 없기에 부처님 열반 후 이 연기법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의해 수많은 부파가 생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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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의 아비달마학파는 연기법을 삼세양중 인과설로 설명했습니다. 차츰 아비달마학파는 부처님이 요청했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면서 선정을 통한 해탈을 얻으려는 방향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태국, 스리랑카불교의 전통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12연가를 삼세양중인과로 해석할 경우 해탈하려면 삼세를 벗어나야 합니다. 윤회의 세계가 따로 있고 열반의 세계가 따로 있다고 하면, 생사의 세계에서 윤회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현실을 떠나야 합니다. 마치 기독교인이 예수님이 구원해줄 것으로 믿으면 죽을때 천당으로 이끌어 준다고 하는 것과 같아집니다.
   
  아비달마가 중시하는 선정은 개인적인 경험으로 다른 이들은 알 수가 없고, 나 자신이 느끼는 의식의 세계는 남과 공유할 수가 없습니다. 남과 공유할 수 없는 것은 열반이 아닙니다.
   이렇게 모호한 열반을 애기하면 다른 사람들과 충돌하게 되기에 아비달마불교는 필연상 분쟁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부처님 입멸 후 300년 뒤 이쇼카왕이 인도를 통일하고 불교에 귀의한 후 사찰에 많은 재산을 주자 절이 부자가 되어 탁발의 의미가 없어지고 형식적이 됩니다. 불교계가 썩게 된 원인이 되었다고 봅니다.
   세상에 돌아다니면서 헌신해야 할 스님들이 호의호식을 하면서 삼매로 들어가게 된 것에 반발이 반야사상의 대승불교가 나오게 된 배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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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승반야사상의 발전>
   
   부처님은 깊은 선정을 체험하셨으나 선정에서 나오면 달라지지 않음을 아셨습니다. 현실을 떠난 어떤 것도 열반이라고 말씀하지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현실속에서 열반을 바르게 통찰해야만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지혜를 동반하고, 집중되어 있고 깨어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깊은 선정이 아니라 올바른 지혜임을 강조하면서 대승불교가 탄생했습니다. 대승을 주장한 사람들은 삼매가 열반으로 가는 길이 아니고 반야가 열반을 열어준다고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는데 큰 홍수가 나서 이강은 물이 넘쳐서 갈수가 없고, 저쪽언덕은 언덕이 높아서 안전하게 갈수 있다. 저 언덕으로 가기 위해서 땟목을 만들어 건너갈 수 있다. 바라밀은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간다는 것이다. 바라밀은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위험하지 않는 안전한 곳으로 건너갔다는 것이다. 이 때 건너가게 하는 것이 배이고 이를 반야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우리가 도달해야 할 최고의 목표입니다. 아뇩다라는 ‘최고’의 뜻이며, 삼먁은 ‘같이 간다’는라는 뜻이며, 삼보리는 ‘같은 깨달음’이라는 것입니다. 같은 깨달음으로 같이 가는 것입니다. 반야로 통찰하면 공유할수 있으나 삼매속에서는 누구나 공유할 수가 없습니다.
   반야바라밀을 주장하는 선각자는 선정이라는 개인적인 몰입에 빠져 있으면 대중적으로 공유할 수 없기에 함께 갈수 있는 세상이 못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혼자 공부해서 혼자 행복을 얻는 것을 부처님이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부처님이 탁발을 다니신 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행복하게 사는 길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부처님은 한걸음도 편한 곳을 찾지 않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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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 가르침의 궁극적 목적은
   
   괴로움에서 벗어나 행복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가르침이 사성제이며, 그 처음이 고성제이며, 고집성제 고멸성제 고도성제입니다. 괴로움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핵심인듯 합니다.
   먼저 괴로움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괴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괴로움을 느끼기는 합니다. 하지만 괴로움을 느끼는 것과 괴로움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는 괴로움을 느끼다가, 괴로움이 사라지면 괴로움이 없는 줄 안고 문제삼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괴로움을 제대로 알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부처님은 나를 오온, 보고(색) 느끼고(수) 생각하고(상) 행동(행)하고 의식(식)하는 것으로 분석하셨는데 이 오온의 작용이 나라고 집착하게 하며, 무언가를 붙잡고 사는 순간 괴로움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나라는 것이 의식되지는 않습니다. 괴로움 속에 있을때 나가 의식됩니다. 기분이 좋을때는 나라는 자아의식이 사라지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나'라는 것에 집착되는 때임을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은 괴로움을 진리라고 하시면서, 괴로움의 실체를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괴로움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모르면 진리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괴로움은 생로병사, 구부득고, 원증회고, 애별리고, 오음성고 등을 말하는데, 이 괴로움을 한마디로 하면 오취온이 괴로움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취온의 중심에 ‘나’가 있어 이 괴로움들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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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텅빈 자신을 깨달으면 모든 괴로움이 사라진다.
   부처님은 나를 철저하게 성찰하신 분입니다. 부처님은 나를 오온, 보고(색) 느끼고(수) 생각하고(상) 행동(행)하고 의식(식)하는 나로 분석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다섯가지가 순간순간 바뀌어도 모두 '나'라고 인식합니다. 그러나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의식하지 않을 때는 '나'라는 생각자체가 없습니다.
  
 또한 매순간 이 오온이 다른 것을 보고,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고, 다른 것을 의식합니다. 이것을 '오온은 무상하다'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무상하다는 것은 항상 변하므로 그 속에 어떤 불변의 실체가 없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두고 "오온은 무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무상, 고, 무아로 보는 것을 반야지혜라 하며, 반야의 통찰로 자아라는 망상에서 벗어나는 깃이 <반야바라밀>입니다.
   반야심경의 핵심은 오온은 색, 수, 상, 행, 식이며 이 오온이 공하다는 것입니다. 오취온은 색,수,상,행,식을 나라고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나’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음을 반야로 통찰하여 자아라는 망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반야바라밀>입니다.
    
  2. 텅빈 나는 업에 의해서 나타난다.
   오온의 실상은 어떤 것일까?
   색 즉 몸의 실상을 알기 위해서는 몸을 잘 관찰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을 관찰하면 몸을 먹는 것에 의존하고 있고, 음식이 몸에 들어오면 음식은 우리의 몸이 되고, 소화가 배설하고 나면 배설물은 내 몸이 아닙니다.
 
    이 배설물은 논밭에서 쌀이 되고 과일이 되어 내몸에 들어와 다시 내 몸이 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내 몸과 음식물은 결코 둘이 아닙니다. 그리고 음식은 땅이 있어야 생길수 있고, 나무 공기 태양 물 등이 있어야 생길수 있으므로 음식과 태양 공기 물은 둘이 아니며, 이 세상 어느 것하나 나의 몸 아닌 것이 없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의 몸은 무상하여 상주불변하는 실체는 없지만 인연 따라 나타납니다.
   이것을 반야심경에서는 무상하여 실체가 없는 모습을 공이라고 부르고, 인연따라 나타나는 모습을 색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나의 몸의 참모습은 '색즉시공 공즉시색'인 것입니다. 수, 상, 행, 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께서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고 했습니다.
   
깨달았으니 부처고, 도둑질을 하면 도둑놈이 되는 것이지, 부처가 따로 았고 도둑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 공이라고 합니다.
   금강경에도 부처가 될 수 있는 법은 없다고 했습니다. 깨달음은 있고 없고가 아니고 어떻게 사느냐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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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우리는 본래 생사가 없다.
   
  우리의 모든 생명과 함께 인연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본모습에서 본다면 우리는 태어난 적도 없고 죽은 적도 없습니다.
   모든 법은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는 공성의 특징을 나타내나니. 발생하지 않고 소멸하지 않으며, 더럽니 않고, 깨끗하지 않으며, 부족하지 않고 완전하지 않다.
   부처님처럼 살면 부처님이 되는 겁니다. 부처님은 걸식하고 맨발로 다니고 가난하고 없는 사람들의 삶을 사셨습니다. 신발이 없는 사람들의 삶을 체험하고 같이 행복하게 살도록 노력하셨습니다.
   
 일본의 사업가 마쓰시다는 자신이 세가지 행운을 가지고 태어났다 했습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기에 가난을 면하려고 열심히 일하게 된 것이 행운이고, 몸이 약하게 태어났기에 아프지 않으려고 건강에 신경 쓴게 된 것이 행운이며, 가난해서 학교에 다닐수 없었기에 평생 배우려고 노력하게 된 것이 행운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공성이라고 말합니다. 몸이 공성이기에 건강이 안좋다면 어떻게 하면 몸이 건강해질 것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무슨 업을 지어 이몸이 되었는지를 반성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반야바라밀은 수상행식의 정신적 고뇌도 삶과 연결되어 있음을 성찰해야 합니다. 몸은 공성과 따로 있지 않고 몸은 공성이다. 수상행식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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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과 마음은 업보입니다. 불교의 공은 업보를 말하는 것입니다. 윤회설을 말하려고 업보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개개인의 몸은 보다 큰 인류라는 생명의 구조에서 보면 하나의 세포와 같습니다. 우리 몸의 세포들이 우리의 몸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듯이. 우리 개개인은 인류를 떠나서 생존할 수 없고, 인류는 다른 생물들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생명은 개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 생명이라는 큰 생명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생명이기에 결코 죽음은 없다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은 바른 지혜로 성찰해서 바른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삶입니다.
   
  삶을 살아가는 바탕은 모든 중생이 동일하기에 일체중생 실유불성이라고 합니다.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음을 통찰하고, 부처님의 지혜를 나의 지혜로 만들어, 부처로 살자는 것이 반야바라밀입니다.
   우리가 반야심경을 외울때. 실체가 비어있음을 알고, 지금 현재의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어떤 행동을 성찰하는 마음이 반야이고 이 반야를 통해 고통을 건내갈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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