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2561년 6월 둘째주 일요법회, 윤리 귀환시대에 불자로 살아가기, 한국교원대 박명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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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은주 작성일2017.06.13 조회35,069회 댓글0건본문
초기경전들은 상항들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어 읽기가 싶습니다.
초기경전에 당시 부처님의 제자들도 올바른 삶의 목표를 어떻게 추구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보다는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질문을 했는데, 그때 부처님은 그런 질문은 근본적인 목표와 연결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초기경전속의 부처님과 제자의 대화를 보면서 일류의 스승이자 교사로서 부처님의 모습을 배우게 됩니다.
21세기 초반의 한국인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우리는 세계 10위권의 경제적 부국이 되었고, 외적인 조건에서는 동남아 뿐만 아니라 유럽의 선진국인 프랑스나 독일에 가서도 우리가 못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힘들고 불행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젊은 세대들이 특히 그렇습니다. 3포 또는 5포세대라고 합니다. 결혼 집과 아이를 포기한 세대입니다.
그리고 갑자기 늘어난 노년층은 대부분 힘들고 불안한 시기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사회의 문제로 대변되는 언어로 헬조선이라는 말을 씁니다. 헬은 지옥이고 조선은 신분제도가 있던 시대로의 전환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조선시대처럼 청년들은 부모의 지위와 경제력이 상당부분 자녀의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서 우리사회를 제대로 객관적으로 인식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온갖 지표가 쏟아져 나오면서 서로 상충되고 있습니다.
지도층에 대한 신뢰도 떨어져 있고, 의지할 정신적 지주가 없습니다. 신문도 언론도 파당적 이해관계에 따르기에 급급한 실정이라 우리가 제대로 판단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불자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부처님은 간단히 말씀하십니다.
있는 그대로를 알고 보라. 여실지견하라 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알고 보는 것이 어려운 일입니다.
여실지견의 방법을 부처님 당시는 부처님께 질문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부처님의 말씀을 담은 경전을 보는 것입니다.
오늘날이 어떤 시대인지를 규정하는데 있어 오늘날은 어느 정도 합의를 이룬 것이 있는데 첫째는 개인화의 진행입니다.
개인화는 모든 판단기준을 개인에 두는 것입니다. 개인화는 인간개개인에 가치를 두는데 기여한 부분도 있지만, 그 과정에서는 이기주의가 작동되고, 공공의 영역에서 관심을 덜 가지게 되며, 점차 사회가 붕괴되는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물질적인 가치를 삶의 중심에 두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가치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해탈 열반을 추구하는 본질적인 목표로부터 멀어지는 계기가 됩니다.
오늘날 개인화와 물질화라는 전제속에서 어떻게 불자로 살아갈 것인가?
최소한의 관계망을 가지는 것이며, 물질화는 일정한 범위를 넘어서는 것은 조절하면서 깨달음의 길로 갈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깨달음의 길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구체적인 삶의 방법을 경전속에서 확인하고 실천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의 대학자 이이선생은 공부를 학문 속에 두지 않고 일상속에서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일상속에서 점검되지 안으면 공부가 아니다고 강하게 애기합니다.
오늘날은 쉽게 경전을 접할 수 있는 시대이지만, 얼마나 경전의 내용이 우리 삶속에 살아있도록 노력하는가에 있습니다.
윤리가 우리사회에서 오랜시간 홀대 받아왔는데 이유는 윤리가 살기 어려운 시대에 경제적인 도움이 되지 못했고. 식민지주의자들에 의해 도덕이 이용되었고, 국민윤리라는 이름으로 부당한 정치권력을 유지하는데 사용되어서 우리는 윤리자체를 의미없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윤리적 기준이 의미 없어진체 살아오면서, 우리는 우리의 아이를 어떻게 키울것인가의 기준이 되었던 자들에게서 우리는 너무도 실망하게 되었습니다.
윤리적인 모델이 못된 그들은 지탄받을 뿐만 아니라 비루한 인생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진정한 윤리의 귀환시대가 왔습니다.
진정한 윤리는 ‘이렇게 살아가도 되는가’를 물어보는 것입니다. 불자들에게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깨달음과 열반이라는 것과 연결되지 않는 것은 중요하지 않는 것이다.
과도한 역할과 시선들에 의해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되던 판사나 검사들에서도, 우리가 선호하는 환호하는 것은 그 자리가 아니라 어떤 의미있는 일을 하는가로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속에서 변화를 시작해야합니다. 속물스러운 자화상과 마주해야 합니다. 죽음앞에서는 평등합니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라는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천태사상을 요약하면 일상에서 잠시 멈추고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지관입니다. 우리 삶속에 천태가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화엄은 진정한 우리의 삶을 말합니다. 우리는 생멸의 세계에서, 나서 늙고 병들고 죽습니다. 이것을 사판이라고 하는데 이속에 진여의 세계(이판)가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둘에 걸림없이 넘나드는 것을 이사무애라고 합니다.
우리가 왜 사는가를 질문할 때 이판의 세계가 들어오게 됩니다. 이 질문을 하면서 바로 걸림없는 사판의 세계로 돌아와야 합니다.
우리는 삶속에서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가를 질문하고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미루지 말고 지금 이순간 지금 만나고 있는 그 사람에게 최선을 다라라는 것입니다.
대화를 하는데 휴대폰이 울리는 것은 그 사람과 만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이 순간을 잘 살아냄으로서 과거의 업이 정리되고 차후의 미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철학의 핵십입니다. 불교 철학은 삶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며, 진심으로 우리의 삶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보고입니다.
종합하면 우리시대 어떤 시대인지를 규정짓기는 어렵습니다. 확실하게 동의할수 있게 된 것은 진정한 윤리를 중심에 두어야 하는 시대가 왔다는 것입니다. 윤리를 중심에 두지 않으면 외적성취는 초라하고 비루한 것이 됩니다.
이것 즉 윤리는 삶속에서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방법은 잠시 멈추어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판의 세계속에서 이판의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자기 이야기를 쓰는 것이 삶이다라고 합니다. 지금 이순간과 만나는 사람 이 공간 이 순간과 충실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나와 이웃과 국가와 세계가 연기적 관계속에서 있음을 생각하고 사회와 세계평화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탤레스의 말을 인용하면, 용기있는 자가 되려면 용기있는 행동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용기는 일상의 바름에 참여하려고 노력하고 공공의 이익을 확대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불자로 살아가는 것은 이순간이 사람과 눈빛이 마주하는 것이며, 어떤 요구를 하고 있는지를 파악해서 궁극의 목표로 나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