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2561년. 7월 둘째주 일요법회. 신심과 행원.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해주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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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은주 작성일2017.07.11 조회35,132회 댓글0건본문
신심과 행원
동국대 명예교수 해주스님
불광사는 도심불교의 선두에 서서 포교하고 신행하는 곳으로 알고 있습니다.
불광보살님들은 부처님의 가피력을 잘 알고,
광덕 큰스님의 보현행원의 원력을 실천하리라 생각합니다.
여기서 신심과 행원을 말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이라 생각하기에
확고한 믿음으로 시작하는 화엄경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무엇을 믿는 마음고 어떤 마음인가.
어떤 원으로 살아야 하며, 무엇을 성취해야 하는가
화엄경 현수품의 믿음의 공능을 설명한 게송에
신심은 도의 근원이고 공덕의 어머니다.
모든 선법을 길러낸다.
신심의 뿌리는 어떻게 하면 깊어지는가?
바라밀행 하나하나가 믿음을 깊게 해주고 믿음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선재동자의 선지식순례에서도 믿음을 발심케 해주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믿음을 다 다르게 생각하는데
믿음의 첫단추는 선법을 실천하는 것이다. 선법을 길러내면 믿음이 깊어진다.
모든 의심그물을 끊어지게 한다.
불법에 대해 일체 의심이 사라진 마음이 믿음이다. 열반에 도달하게 하고
믿음은 모든 공덕의 수승한 지혜를 늘어나게 하고 모든 부처님을 시현시킨다.
무엇을 믿는가?
삼보를 믿는다.
우리는 삼귀의를 하는데 스스로 믿음을 내기에 自歸偈라고 한다.
불보 법보 승보를 믿는 것은
무상대보리,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위없는 대보리를 철저히 믿는 것이다.
부처님을 믿는다는 것은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스님이 아닌 불자라고 부처님의 깨달음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행복은 상락아정의 즐거움
불교의 고는 무상한 것이므로 잠시의 즐거움을 따라가는 것은 소금물을 먹는 것과 같다. 신기루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고의 해결을 통해 확실한 깨달음으로 열반사덕의 진짜 즐거움을 얻어야 한다. 열반을 증덕하는 것이다.
고의 해결은 대보리의 믿음이다.
부처님이 믿는다는 것은 삼보의 가피를 믿음이다.
자기구제만 아니라 고통받는 중생도 구제해 부처님세계로 같이 가자는 것이
자리이타의 수행을 하는 것이며, 이것이 일불승의 가르침이다.
자력이 극대화 되면 타력이 완성된다.
부처님의 가피는 하늘의 햇빛에 의해서 갖가지 색을 보는 것처럼
부처님의 힘으로 여래를 보는 것이다.
내가 열심히 해서가 아니고 부처님의 가피에 의해서 완성된다는 말이다.
자력 타력이 둘이 아닌 자력이며
자력 타력이 둘이 아닌 타력이다.
자타불이를 철저히 믿을 때 성불한다.
화엄은 비로자나 부처님의 본원과 일체 모든 부처님의 가피력과
그 원을 세운 보살의 행원력에 의해 하나가 되었을 때 감응이 되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내리는 것이 아니라 감응되었을때 있는 가피를 철저히 믿는것이다.
믿는 마음은 무엇인가?
믿음의 대상은 삼보이며, 믿는 주체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믿는 그 마음(청정한 마음淨心)이 부처님 마음이 되었을때 무상대보리이고 가르침을 따르게 된다.
화엄경에는 믿는 마음은 청정한 마음이며, 부처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집을 지을때 터가 튼튼해야하는 높이 지을때 무너지지 않는 것처럼
수행이 깊어지려면 믿는 마음이 깊어져야
하나하나 나타나는 경계를 극복하여 나아갈 수 있다
돈돈한 믿음의 마음은 부처님 마음이고,
그 마음이 우리의 본래 마음임을 철저히 믿는 것이다.
본래마음 부처님 마음을 철저히 믿는것, 부처님처럼 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과, 자성청정심, 여래심, 모든 존재에게 있는 불성, 불세계 장엄의 공덕이 드러나는 무한한 마음 이것을 여래의 성품이라 한다.
신구의 삼업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본래 구족해 있는 마음은 부처마음이고 우리가 쓰는 마음은 중생심이다.
가능성으로서의 불성 지금 여기에 드러나는 마음은 여래성기심이다.
부처님의 마음인 일체지지(법성원융)를 수습하고 연마하려면
무명 미혹 망상 업상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화엄의 성불은 지금 여기서 바로 가능하다.
의상스님은 화엄세계를 법성게 210자로 드러내었다.
법성신은 개개의 존재이며 구래불을 표현함
우리는 본래주인이나 그 자각없이 살지만 주인임을 알면 원래주인이고
지금 바로 부처로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화엄의 법성신은 눈을 감고 있어서 모르는 것이지 눈만 뜨면 되는 것이다.
불을 켜는 노력을 해야 보이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이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셨다는 믿음이 없이
망상으로 고통받고 있다.
부처님이 이미 마음을 편히 해주셨다는 굳건한 믿음이다.
부처님이 마쳤지만 내몫이 있는데 이를 자타불이력이라 한다.
자타불이력은 가피를 믿는 것으로 그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 마음이 부처이고 중생이다. 이것을 화엄경 제1게로 一切唯心造로 설명한다.
화엄의 대의는 일심을 밝히는 것이다.
부처님을 믿는다는 것은 본래구족된 지혜 마음을 믿는 것이다.
중생이 부처이므로 본래 구족된 부처님 마음과 내마음을 믿는것,
마음이 모든 여래를 만들었다.
화엄의 성불은 본래 내 마음을 믿고 부처님의 지혜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더불어 사는 주변의 모습을 봤을때 어떤자는 마음에 안들고, 윤회하고,
잘난자와 못난자 가진자와 못가진자 등이 왜생기는가?
인연따라 생기는 것이다. 인과를 믿어야 한다.
인과는 인연화합 인과률 업인 과보, 업보 때문이다.
업보는 잘못된 것이고 전생과보인가 생각하지만, 잘되는 것도 업보이다.
화엄경은 인과가 동시에 일어난다고 한다.
불교의 상징인 연꽃이 필 때 연밥이 함께 생기는 것처름
보살행을 하는 순간 부처로 사는 것이다.
부처님 마음이 현현한 것이 보현보살의 행이다.
모든 보살행을 보현보살행으로 포섭해서 말한다.
대행보현보살행은 부처님과 보살이 둘이 아니며
인과가 둘이 아닌 불세계를 보면 보현보살행이며 불과의 행이다.
이순간의 나는 현재의 나만은 아니다.
삼세는 삼세동일체다.
현재의 현재, 미래의 과거, 과거의 미래이다.
오늘의 나에 촛점을 두면 소외되는 것이 많다.
지금 수행하는 것은 현재의 현재, 미래의 과거, 과거의 미래임을 믿는 것
나의 미래불이 현재의 나를 제도하는 것
이 입장에서 수행하는 것이 보현관행이다.
보현 10대원은 모든 원을 포함한다.
모든 것을 포섭하는 것이 중생회향이다. 불과를 얻기 위해 뿌리에 물을 주는데,
그 뿌리가 중생이기 때문이다.
내가 수행해서 부처님처럼 되는 것은,
선재동자의 부처님의 행원으로 출발하여 깨달아 마친 부처의 행을 한 것이다.
성불해 가는 것은 이타행을 하는 것은 각자의 인연에 의해 나아가게 된다.
회향송으로 법회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