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3년 9월 29일 다섯번째 일요법회
페이지 정보
작성자 불광미디어팀 작성일2019.10.10 조회1,999회 댓글0건본문
불기 2563년 9월 29일 다섯번째 일요법회
가을의 입문을 알렸던 9월도 어느덧 마지막 날이 되었습니다. 다소 어수선한 불광사의 분위기에도 많은 신도분들이 불광사를 찾으셨습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사람 살기에 딱 좋은 날
불광사의 신도이자 전임 회장님이셨고 서울대학의 교수이셨던 덕행 조원호 거사님 께서 법문을 해 주셨습니다.
반갑습니다.
12~3년 전에 이 자리에 서고 처음입니다.
30년 전에 불광사 입문했습니다.
7~8년 정도 광덕 스님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불광사의 특이한 점이 있었습니다.
① 마하반야 바라밀을 하는 것
② 보통은 법우라고 하는데 불광 형제 여러분이라고 하는 것
③ 법회 끝난 후 보현행원으로 보니 이루리 라고 하는 것
이 3가지가 달랐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이란 말을 많이 쓰는데 어떤 내용인가 내 나름대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은 무엇인가?
마하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은 빨리어를 중국식으로 음사를 한 것입니다.
중국사람이 읽으면 원어와 가깝게 발음이 됩니다만 우리말로 다시 발음을 하니 조금 달라진 것입니다.
중국말로 번역을 할 때
오종불번 이라고 5가지 번역을 해서는 안되는 것을 다음과 같이 정했습니다.
첫번째는 비밀고(秘密故)는 발음 그대로 쓰자
두번째는 다함고(多含故)라는 것은 발리어가 여러 가지 뜻이 있을 경우
세번째는 차방무고(此方無故) 인도 지방에만 있는 식물은 중국에 없으니까 번역이 안 된다.
네번째는 순고고(順古故) 인도말 그대로 써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 예를 들어 나녹다라 삼막 삼묘의
다섯번째는 존중고(尊重故)
뜻을 번역하면 뜻이 훼손되는 것
마라하는 것은 다른 말로 육조대사법보단경(六祖大師法寶壇經)이라고 합니다.
경이라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인데 율은 부처님이 지켜야 할 계율 논장은 고승들이 하신 말씀입니다.
법보단경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에 버금가는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마하(摩訶: maha)
[육조대사법보단경(六祖大師法寶壇經)]
“何名摩訶 摩訶者 是大 心量廣大 猶如虛空”
<어떤 것을 마하라고 하는가? 마하는 크다는 말이니 심량이 마치 허공과 같아서 가이 없으며, 또한 모나거나 둥글거나, 크고 작은 것이 없으며, 청 황 적 백 등 빛깔도 아니며, 위 아래도, 길고 짧음도 없으며, 착한 것도 악한 것도 없으며, 머리도 꼬리도 없으니 제불의 국토도 또 한 이와 같이 다 허공과 같느니라.>
무량수(無量壽)라는 것은 시간을 헤아릴 수 없다.
무량광(無量光)은 공간을 헤아릴 수 없다.
시간은 없다.
이태리 카를로 로벨리 박사가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절대성의 상실, 방향성의 상실, 현재성의 상실
시간이라고 하면 절대성이 있어야 하는데 이 이야기는 시간은 어디에 가든 같아야 하는데 아이쉬타인 박사의 상대성 이론에 보면 시간의 개념은 절대적이지 않다. 빠른 로켓을 타고 가면 여기가 1년이라면 거시서는 1초 밖에 안 된다. 이것이 실제로 증명이 되었어요. 원자시계로 시험을 했는데 뉴욕에서 서울로 왔는데 지상에서 잰 것과 제트기를 타고 온 시계가 늦게 갔다는 것이 증명이 되었어요
실험적으로 시간은 정해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떨어지는 것은 중력 때문인데 중력이 크면 예를 들어 목성에 가면 지구의 5년이 1년 뿐이 안됩니다.
가만히 있는 사람은 시간이 빨리 가요. 뛰어 다니는 사람은 느리게 가요.
이건 심리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고 측정을 해 보면 느리게 가요.
이런 것은 물리학자들이 다 증명을 했습니다.
불교는 현대 과학자들이 부처님 말씀을 하나하나 증명을 해 가고 있는 거예요,
기독교는 과학이 발달할수록 기독교 교리와 벗어나요.
불교에서는 삼천대천 세계라고 했는데 거기서는 천동지지라고 지구는 가만히 있고 태양이 돈다고 했는데 이미 틀렸다는 게 증명이 되었어요.
지동설 주장한 학자들 종교재판을 열어서 화형 시켰잖아요.
기독교는 신이 창조했다고 했는데 불교에서는 조건이 되면 생성이 된다고 했거든요. 다윈의 진화론이 나왔잖아요. 창조된 것이 아니고 단세포에서 시작되어서 진화 해 왔다. 과학이 발전할수록 기독교는 틀린 것이 증명이 되고 불교는 과학이 발달할수록 부처님 말씀이 증명되어 가고 있습니다.
용수 [中論] 중론이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 세계 학자들이 가장 많이 읽는 책이 중론입니다.
19품 관시품에 보면 그 옛날에 어떻게 이런 것을 알아내고 설명할 수 있었는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금강경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과거는 증명할 수 없다. 미래는 오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겠어요. 현재는 이미 말하는 순간 지났어요. 0.0001 현재라는 것을 증명할 수가 없어요.
무량원겁즉일념 일념즉시무량겁 (無量遠劫卽一念 一念卽時無量劫)
일겁이라는 것은 사방십리 3년에 한번씩 천사가 내려와서 천의로 스치고 지나가서 다 닳아 없어지는 시간이 일겁이라고 했습니다.
아주 긴 시간인데 그런데 일념즉시무량겁이고 했어요. 한 생각이 즉시 무량한 시간이라고 했어요. 그러면 이런 개념은 생각과 틀렸다.
시간은 방향성이 있어요. 시간은 미래로만 가는 줄 알고 있는데 엔트로피라는 것이 있는데 엔트로피가 커지면 미래로 가는 것이고 줄어들면 과거로 가는 것이에요. 그렇게 정의를 정확하게 할 수가 있어요. 과학적으로 그런데 엔트로피 현상이라는 것은 어떤 방향에서 보면은 엔트로피가 줄어든다는 것이에요.
이것은 시간이 거꾸로 간다는 것이에요. 이것은 과학이에요.
시간에 방향성이 있다. 상대성이 있다. 그러니 시간을 정의 할 수가 없다. 그러니 시간은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잘못된 번뇌망상으로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공간을 볼까요.
0차원이라고 있어요. 0차원, 1차원, 2차원, 3차원, 4차원 이런 소리 들어 보셨죠?
0차원은 점이예요. 사실은 점도 있으면 안 되요.
면적도 없는 하나의 위치 1차원은 하나의 선이에요. 선도 폭이 있으면 안돼요. 폭이 없는선 1차원에 사는 인식체, 생명체라고도 안하고 인식체라고 할께요. 인식을 할 수 있는 물체가 있다면 1차원에 사는 인식체는 선만 따라 가는 거예요.
2차원은 뭐냐? 면을 말하는 거예요.
직선에다 수직한 선을 하나 세우면 그것을 2차원이라고 해요. X, Y 두 축에 의해서 형성되는 공간.
2차원에 사는 인식체가 있다면 여기다 맛있는 음식을 주었다고 하면 그러면 2차원의 인식체는 3차원은 못 들어와요. 그러면 3차원은 뭐냐? X, Y의 선이면 여기에다 선을 하나 더 수직으로 세운 것이 3차원이예요. 우리가 사는 공간이 3차원
정육면체 2차원은 3차원을 모르니까 3차원에 사는 사람이 2차원을 보면 우스운데 2차원의 인식체한테 알려주려고 그려보면 2차원은 아무리 3차원의 형편을 가르쳐 줄래도 실 모습은 가르쳐 줄 수가 없어요.
4차원은 어떤 것이냐?
4차원은 우리가 아는 공가 X, Y, Z에 또 하나의 수직의 선이 있는 거예요. 4차원의 세계에 물건을 놓으면 우리는 꺼집어 낼 수가 없어요. 4차원에서는 간단히 잡을 수가 있는데 그래서 우리와 차원이 다른 거예요.
부처님은 몇 차원이냐?
무한차원이예요. 그러니까 다 볼 수가 있고 다 알 수가 있는 거예요.
과학자들은 우리 우주를 어떻게 보느냐? 12차원 중에서 우리가 9차원의 한 면에 있는 것을 우리 우주라고 보는 것이예요. 스티브호킹스가 정확하게 정의를 했잖아요.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안돼요. 우리가 갖고 있는 기존의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완전히 바꾸지 않으면 안돼요. 이러한 공간 개념을 다 갈라 놓으면 어떻게 되느냐?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우리가 생각으로서 헤아릴 수 있는 영원불변하고 무상지오한 진리의 시계가 무량수 무량광이라고 하는데 무량수 무량광은 부처님 명호로 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무량수 무량광이 부처님 명호로 아미타블이라고 합니다.
아미타불의 뜻이 무엇이냐?
아(阿): 법신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미(彌): 보신 원광법신 노사나불
타(陀): 화신 천백억 화신 석가모니불
아미타는 청접법신 비로자나불 원광법신 노사나불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을 다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금타화상이 청화스님의 은사 스님이신데 금타화상의 말씀을 청화 큰스님께서 엮은 것이 금강심론인데 이것을 좀더 알고 싶으면 다음 카페에 http://cafe.daum.net/vajra 들어가면 알 수가 있습니다.
저는 부처님 말씀을 전해드리는 것이지 제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마하하면 엄청난 뜻을 가지고 있다. 온갖 부처님을 다 부르고 온갖 진리의 세계를 다 말하는 것이다.
반야는 번역하면 지혜라고 번역하기도 하고 혜라고도 하고 무분별지라고도 하고 반야지, 통찰지라고 하는데 반야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 초기 경전에 보면 정확하게 나와 있어요. 무상, 고, 무아를 체득하는 것이 반야다.
무상은 시간이 가면 다 없어진다. 없어지고 없는 것.
고는 우리가 느끼는 모든 것 즐거움도 고다.
무아는 내가 없다. 초기 경전에 보면 만약에 어떤 나라 왕인데 왕은 죽이고 살리고 마음대로 할 수가 있잖아요. “아” 라는 것은 색수상행식이예요. “색”은 육체 수상행직은 정신을 말해요
“색” 육체가 부처님은 뭐라 했느냐 현대식 표현으로 바꾸면 얼굴이 예쁘지 않는데 예뻐집니까. 내 마음대로 됩니까?
“수”는 느낌 뜨거운 것이 있는데 차갑게 느끼라고 한다 해서 차갑게 느껴집니까? 느낌은 마음대로 조정이 안되죠.
“상”은 생각인데 어떤 표상자리예요. 책상을 보고 의자라고 생각하라 해서 의자가 됩니까?
“행”은 의도예요. 내가 화가 나는데 화내지 말라고 한다 해서 화가 안 납니까?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없애란다고 해서 없어집니까?
“식”은 의도 작용이예요. 나쁜 기억이 있는데 좋은 기억으로 바꾸라고 한다 해서 바꾸어 집니까?
색수상행식중에 우리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게 하나도 없어요.
색수상행식중에 하나도 내 마음대로 쓸 수가 없는데 이것을 나라고 할 수가 없어요. 이것은 내가 아니예요 무아라는 것은 내가 없다는 것입니다.
대승으로 내려오면서 반야를 무엇이라고 설명했냐 하면 중도를 체득하는 지혜를 반야라고 했습니다.
중도가 쉬운 것 같지만 만만치 않거든요.
중도는 이분법적 사고를 극복해야 중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분법적 사고는
중도(中道): 이분법적 사고(이원론)의 극복
- 생멸(生滅), 단상(斷常), 일이(一異), 거래(去來), 유무(有無), 생사(生死), 자타(自他), 주객(主客),선악(善惡), 시비(是非), 고저(高低), 장단(長短)
생멸한번 볼까요?
반야심경에 보면 불생불멸 생이라는 것은 나타난다. 멸이 나는 것은 없어진다.
이분법적인 생각인데 생사라고 하는데 숨을 쉬면 살고 있구나 숨을 안 쉬면 죽는구나 생각하는데 숨이 딱 끊어지면 죽는 생각이 없다고 생각해봐요. 그러면 거기서 죽는 게 아니야 생각이 없으면 죽는다는 것이 정의 안되면 산다는 것이 정의가 안돼 하나가 있어야 다른 개념이 생성이 되는데 유란 존재한다. 무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냐 비존재라는 것도 존재가 없으면 비존재도 정의가 안되는 거예요. 유가 없으면 무가 없고 무가 없으면 유도 없고 생멸인데 죽는 것이 없다면 사는 것이 정의가 되겠습니까?
죽는 개념이 있으니까 산다는 개념도 생기는 것이지 죽는다는 것이 없으면 산다는 것을 정의 할 필요가 없잖아요.
이런 이분법적 개념을 대립적인 개념을 극복하는 것이 중도라는 것이 좌와 우가 있는데 중간에 어정쩡하게 있는 것이 중도가 아니야
생멸(生滅), 단상(斷常), 일이(一異), 거래(去來), 유무(有無), 생사(生死), 자타(自他), 주객(主客),선악(善惡), 시비(是非), 고저(高低), 장단(長短)
있다고 해도 안되고 없다고 해도 안되는데 이것을 초월해야만 중도라고 할 수 있는데 이분법적인 것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야 중도가 되는데 이것을 증명해 보일게요.
이떤 큰스님이 시자에게 방이 비었는지 안 비었는지를 확인하라고 했습니다. 이 시자가 방에 들어가서 이 방은 비었습니다 라고 하는데 큰스님이 주장자로 한대 때렸어요. 이 시자가 들어가는 순간 빈방이 아니죠. 네가 들어가는 순간 빈방이 아니다. 이거는 주관과 객관이 다르죠. 분리된 상태에서는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이 시자스님이 방에 들어가는 순간 방은 이미 빈방이 아니야
이발사가 동네의 규칙이 이발사는 면도를 해 주어야 하는데 자기 스스로가 면도를 안 하는 사람한테만 면도를 해 주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발사는 면도를 해야 합니까? 안 해야 합니까?
자기 스스로 면도를 하는 사람은 면도를 해 주면 안 되는데 해야 합니까? 안 해야 합니까? 이렇게 자타가 분리되어 있으면 모순이 생겨요. 주객이 분리되면 자가 당착에 빠집니다.
저 먼 별이 우리 눈에 들어 올려면 몇 광년이 걸려요. 우리가 보는 별은 오년전의 별이예요. 우리가 보는 별 중에는 없어진 별도 많을 거예요.
본다는 것은 캄캄하면 안보여요. 빛이 내 눈에 들어와 망막에 맺혀야 보는 것인데. 내가 보는 것은 현재가 아니예요. 모든 상이라는 것은 비상 실체가 없다고 느껴야만 부처님의 진실한 세계를 알 수 있습니다.
3차원 공간을 보면 플라톤의 [국가] 제7권 에 보면 우리가 인식하는 공간이 얼마나 엉터리인가가 나타나 있어요.
동굴에 사람이 태어나자 말자 동굴의 벽면만 보도록 고정이 되어 있어요.
동굴 밖에서 보면 그림자가 동굴벽면에 비추면 태어나자 말자 벽면만 보게 되어 있는 사람은 그림자가 실체야 다른 것은 본적이 없으니까
우리가 태어나자마자 3차원만 보았기 때문에 3차원에서 보이는 것을 실체라고 생각해요. 4차원에서 3차원을 보면 그림자를 실체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야
바라밀은 도피안이라고 한자로는 되어있는데
저 언덕에 이르는 것을 바라밀이라고 합니다. 이런 언덕에 이르기 위해서 보살이 닦는 수행 실천을 바라밀이라고 합니다.
진리의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 하는 실천 수행
계(戒) 정(定) 혜(慧) 를 닦아라
계(戒)를 닦아라는 것은 정언(正言), 정업(正業), 정명(正命)을 말하는 것이고
정(定)은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을 말하는 것이며
혜(慧)는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를 말하는 것입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닦으라고 해요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은 계(戒)
정진(精進), 선정(禪定)은 정(定)에 해당하고
지혜(智慧)는 혜(慧)에 해당되는데 딱 하나 빠지는게 있어
이것이 보시 바라밀이야
다른 것은 똑같은데 보시의 중요성은 초기 불교에서도 많이 말했는데 진리 본체를 성취하기 위해 팔정도(八正道)를 닦으라고 했지만 보시는 말씀을 안 하셨어요.
그러나 보시의 중요성 수없이 말씀하셨어요.
공을 체득하는 지혜가 반야인데 생략하겠습니다.
바라밀을 통해서 반야을 이용해서 마하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