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법문] 반야바라밀은 생명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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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광사 작성일2020.03.21 조회1,949회 댓글0건본문
"우리가 자기를 상상한대로 우리는 이루어져 간다. 위대한 인간이라 상상하면 우리는 그렇게 되고 어둡고 불운한 인생이라고 생각하면 불운한 인생이 된다. 우리의 마음이 전능자인 조물주인 까닭이다"
- 금주의 다짐 -
반야바라밀은 생명의 진실
(1988년 2월 7일, 잠실법당)
☞ 육성법문 들으러 가기『BTN반야의 지혜로 세상을 밝히다 금하당 광덕스님, 방영일 : 2017.02.21 (화)』
형제 여러분들, 아마 ‘반야바라밀’에 대해서 제가 거의 집중적으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만 『대반야경(大般若經)』에 대해서도 아마 제가 몇 년 동안 조금씩 조금씩 말씀드립니다만 그 가운데 특별히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대문 같은 것은 몇 번이고 나누어서 말씀드릴 때도 있고 주로 마하반야바라밀의 불가사의 위신력과 관계되는 부분과 그 수행에 관한 얘기가 아마 여태까지 말씀드린 내용이 아니었던가 생각됩니다.
거기에도 보면 이해를 하고 저부터가 말을 하는 이상, 이론이 있었고 합리적인 수긍이 어느 정도 돼야 말을 하고 서로 이해가 되고 믿음이 생기고 행이 따른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에 이론으로 설명을 합니다만 역시 얼핏 보기에는 이론으로 다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얘기를, 그런 생각을 다시 하게 됩니다.
그러나 반야바라밀을 수행해서 그 생뿐만 아니라 다음 생까지 계속해서 참 그와 같은 수승한 복덕을 누리게 된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역시 놀라운 생각이 금해지지 않습니다.
또 “금생뿐만 아니라 금생에 부처님 그렇게 반야바라밀 수행한 사람이라면 내 생애 부처님 국토에 태어나게 되고 부처님 법문을 듣게 된다”그런 말씀도 있습니다. 역시 그것은 우리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는 것입니다만 부처님 말씀이 진실인 것을 믿고 오늘 「반야바라밀」법문으로써 부처님 앞에 결정적인 믿음을 심는 사람이 그 밝은 믿음이 근원이 되어 가지고 다음 생도 밝은 국토에 태어난다고 하는 것도 이해가 가는 대목입니다. 하여튼 부처님 말씀을 공부를 하고 배우다보면 어느 부분은 이해가 가고 이해가 가면서도‘참 불가사의 하다’하는 생각이 끊어지지가 않습니다. 우리들도 불법을 배우면서 역시 믿을 뿐입니다.
처음에는 이론을 따지고 헤아려서 이렇다 저렇다 했는데 스스로 닦고 행하고 생활하다 보면 “부처님 말씀 진실이다”하고 부처님 말씀을 찬탄하고 믿고 그대로 행할 따름이다. 다 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행하지 못하더라도 믿음을 굳건히 세우고 행할 수 있는데 까지 행하는 것이다. 뭐 그러한 다소곳한 자세가 우리의 자세 결론으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제 믿음, 생각으로 될 때 불법은 역시 불가사이 그 불법은 불가사의인데 그 불가사의 법문은 밖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와 생명과 더불어 영겁으로 함께 있는 것, 이것은 의심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도리를 아주 밝게 활짝 밝히신 부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할 따름이다.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법 하나 밖에 없습니다. 대립이 없습니다. 일체가 반야바라밀뿐입니다. 일체가 광명일 뿐 입니다. 거기에는 적개심을 품은자도 없고, 악심, 악자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무(無), 공무라고 하는 것은 청정한 자리가 드러났을 때 그를 대립하는 존재는 그림자도 없어집니다.
저는 이 「반야바라밀」 법문을 공부하면서 이런 대목들 이해가 되는 듯 싶으면서도 불가사의 한 것을 다시 느낍니다. 얘기가 너무 길어졌습니다만 지난 번 까지는 주로 그런 대목들이 계속해서 나왔고 마침내는 그 제천들이 부처님께 꽃을 흩고 공양하면서 부처님께 찬탄하고 “부처님이시여, 이 사바세계에 「반야바라밀」법문이 오래 오래 머물게 하여 주옵소서. 그렇게 해서 이 사바세계에 삼보가 끊이지 아니하고 보살마하살의 도를”, 보살도죠 보살마하살도라고 경에는 그랬으니까 보살대도입니다. “대보살의 도를 알게 하여 주옵소서.”이렇게 부처님께 청을 올립니다.
그리고 “반야바라밀이 있는 곳에는 바로 이것은 밝음이 비치는 곳 반야바라밀이 있는 곳은 밝은 빛”이라고 그랬어요. “조명처(照明處)”라고 그랬어요. 그리고 이제명, 모든 어둠이 사라집니다. 반야바라밀은 바로 이것이 일체지, 일체지는 부처님 지혜죠. 일체지혜고 일체지가 반야바라밀, 그렇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수지하는 사람은, 저희들은 부처님과 같이 봅니다.
거듭 거듭 바로「반야바라밀」법문의 신비, 불가사의한 위신력 그것을 믿게 되는 것이며 이 법문이 바로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생명에 넘치고 있고 내 생명에 움직이고 있는 진리의 진실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부터 이 법을 더욱 잘 배워서 행할 것을 마음속에 다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라밀, 육바라밀이 있는데 보시바라밀, 지계바라밀, 인욕바라밀, 정진바라밀, 선정바라밀 그리고 반야바라밀해서 육바라밀, 보살이 이 육바라밀을 닦아서 성불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왜 육바라밀법을 모두 칭찬하지 아니하시고 어째서 유독 반야바라밀만 찬탄하십니까?”
이렇게 아난존자가 부처님께 여쭤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반야바라밀은 오바라밀, 육바라밀 외에 다른 바라밀, 다섯 바라밀 내지 심지어 부처님만이 가지신, 부처님이 갖추고 계시는 독특한 위신력인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 이것은 그전에 한두 번 메모해 드린 기억이 납니다만 부처님만이 가지신 독특한 수승한 법, 수승한 공덕이라고 그러면 좋겠습니다. “오 바라밀 내지 십팔불공법에 거기에 있어서 으뜸이 되는 도사다.” 경에는 존도(尊導)라고 그랬습니다. 높을 존자 인도할 도자, 저는 으뜸가는 도사라고 번역을 했습니다만 “반야바라밀이 으뜸가는 도사다. 일체법(一切法) 가운데 으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법보다도 반야바라밀을 찬탄하는 것이다.” 부처님 대답이 그런 것이죠. 그리고 이 아난에게 반문을 합니다.
“아난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살바야(sarva ̵jña)에
회향하지 않는 보시를 보시바라밀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역시 이것은 좀 어려운 대목입니다. ‘살바야(sarva ̵jña)에 회향하지 않는 보시’, 살바야(薩婆若)가 무엇인가? 살바야는 살바쥬니아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이 일체지(一切智)라고 그런 뜻입니다. 일체지로 회향하지 않는다. 그런데 일체지라고 그러는 것은 무엇인가? 일체지라고 하는 것은 어떤 머리로 알아차리는 번뜩이는 지혜가 아니고 일체와 통해 있는 존재입니다. 그렇게 이해하시면 좋습니다. 말하자면 일체지라고 하면은 일체와 통해서 하나가 되어버린 존재 그것이 지혜여.
이 몸을 가지고 비유하면 얼마간 편리합니다. 손, 발, 이목구비 우리가 몸을 여러 가지로 갖추어 있습니다만 이 가운데에 몸이라고 하는 동일체가 있어서 바로 내 손이고, 내 발이고, 내 머리이고, 내 눈이고, 내 입이고, 내 코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이 근본적으로 내 몸이라고 하는 동일체가 없으면 손발이 각각입니다. 바른손, 왼손이 각각입니다. 그런데 이 몸이라고 하는 것이 중심이 되기 때문에 몸으로 봐서는 손도 내 몸이요, 발도 내 몸이요, 얼굴 뭐 할 것 없이 모두가 내 몸입니다.
그런데 이 내 몸이라고 그러는 동일적인 중심체가 없으면 손발이 각각 흩어지죠. 살바쥬니아, 일체지, 살바야라고 하는 것은 일체를 통합한 진리입니다. 통합이라고 그러면 조금 어폐가 있습니다만 어쨌든 일체를 통일해서 그를 초월해서 존재하는 진리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 진리는 하나의 존재여.
일체를 초월하고 일체를 감싸고 그를 넘어서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이 우주가 있고, 하늘 ․ 땅이 있고 해와 달이 있고 그리고 자연세계가 있고 우리 인간이 살고 중생들이 가지가지 벌어져 살고 제가 각각 있을 때는 각각인데 이 살바쥬니아, 일체지의 입장에서 거기서 보면 그 모두를 감싸고 그 모두를 통일하고 있는 다시 그것을 넘어선 중심체, 그것이 살바쥬니아, 지금 몸으로 비유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봐서는 하늘, 땅, 사람, 짐승, 물건 각각 흩어져 따로따로 있지만 살바쥬니아, 그 일체지, 살바야의 입장에서 볼 것 같으면 모두가 하나인 것입니다. 손발이 각각이라도 내 몸의 입장에서 봐서는 하나인 것처럼 살바쥬니아에서 봐서는 모두가 하나입니다. 하나이기 때문에 대립적 존재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 몸이 있기 때문에, 몸이 중심이 되기 때문에 바른 팔, 왼 팔이 바로 내 한 몸이고 바른 발, 왼 발이 내 한 몸입니다. 한 몸인 것처럼 대립이 되지 않습니다. 있으면서도 몸으로 봐서 몸뿐이요. 손이 없는 것도 아닌데 손이 그대로 두고도 내 몸인 것입니다. 이것을 좀 생각해보시면 조금 있다가 말씀드려야 할 불이법(不二法)이나 무이법(無二法)이니 하는 도리를 알게 됩니다. 공(空)의 의미도 알게 됩니다.
일체지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해서 일체를 통일시키고, 일체를 하나로 이루게 하는 진리가 일체지다. 이렇게 알면 좋습니다. 기왕 말난 김에 이 생각을 조금 더해 봅니다만 손과 발이 각각이라고 알 때는 그것은 내 몸이라고 하는 것이 내 한 몸이라는 것을 몰랐을 때 입니다. 내 한 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손과 발이 내 한 몸입니다. 살바쥬니아, 일체지를 통했을 때는 일체 우주가 각각이 아닙니다.
하늘 ․ 땅과 우주와 산하, 대지와 일체중생이 각각 흩어져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살바쥬니아, 일체지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다 하나 그 가운데 있는 거여. 각각 남이 아니에요. 별개가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대립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하나가 다 그대로 놔두고 그것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공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말입니다. 없다는 뜻이에요.
또 ‘불이(不二), 둘이 아니다’라고 하는 그런 말이 있습니다. 둘이 아니라고 하는 말은 그것도 각각이란 뜻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근본적인, 동일적인, 그 초월적인 진리 자리에 도달해서 거기에서 보면 각각 낱낱 물건이 거기에 놔둔 채 한 덩어리인 까닭에 한 덩어리인 입장에서 볼 것 같으면 대립이 없어요. 그러니까 그 자리를 공이라고 그래요. 불이(不二), 둘이 아니라고 그럽니다. 각각이여. 바른 손, 왼 손이 둘이 아니고 각각 이었는데 한 몸의 입장에서 볼 것 같으면 둘이 아니에요. 내 한 몸이다 말이에요. 발도 마찬가지여. 우주 존재 전부 둘이 아닌 거예요. 진리에서 볼 것 같으면, 그 진리의 입장에서 볼 때 우주와 모두가 하나이고 한 몸이고 둘이 아니다. ‘둘이 없다. 무이법(無二法)이다’하는 말도 거기서 이해하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살바쥬니아, 일체지이라고 하는 것은 우주를 감싸고 우주를 포함하고, 우주를 넘어선 근원적인 진리당처, 그것이 바로 일체지고 살바쥬니아고 반야바라밀이고 거기서 볼 때에 일체법은 불이(不二), 둘이 아닌 것입니다. 일체법은 둘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대립하는 존재가 아니고 한 몸입니다. 모든 사람은 서로 각각 따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도와주고 함께 살고 있는 것이 실체입니다. 이것이 일체지여. 반야바라밀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