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법문] 마하반야바라밀 수행(2부) (1986년 7월 6일, 잠실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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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광사 작성일2020.04.18 조회2,110회 댓글0건본문
금주의 다짐
예전에 제가 한번 말씀드렸습니다. 월간 「불광」의 구도문답에도 썼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하고 일심 염송할 때 그 때는 어떻게 하느냐? 그 때는 부처님도 생각하지 마라. 부처님 은혜도 생각하지 마라. 부처님 공덕도 생각하지 마라. 내가 병 있다고 아프다고 생각하지 마라. ‘오직 마하반야바라밀 그것만 해라’이거야. 그건 일심이라고 그럽니다. 일심, 일심반야바라밀을 염송한다. 부처님 은혜, 부처님의 위신력, 부처님의 한량없는 은덕을 생각하고 일심 반야바라밀을 염송한다. 우리는 그럽니다. 부처님의 은덕은 그렇게 알고, 그렇게 믿고, 그렇게 관하는 거야. 그리고 평소에 그러는 것이지만 반야바라밀을 염송할 때는 반야바라밀만 염송하라. 문제는 그 다음부터 예요. 반야바라밀만 염송한다. 염송해 보니까 아마 경험이 있을 겁니다. 일심으로 반야바라밀만 염한다.
부처님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부처님 은덕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내가 병고가 있다든가 무슨 소원이 있다든가 뭐가 뭐다 엊저녁에 좋은 꿈을 꾸었다든가 하여튼 일체 생각을 싹 버려요. 싹 버리고 오직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그 일념뿐이여. 그것 일심 그것만 쥐어 가는 거여. 그렇게 하다보면 제각기 경계가 나와요. 불교 공부하는 데서 제일 중요한 것이 이 대문입니다.
이 대문을 모르기 때문에 다들 헤매는 것입니다. 왜? 이것은 마음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의 세계는 문이 없어요. 문이 없으니까 무한의 세계여. 무한의 세계이기 때문에 길도 없어요. 어느 길로 가야하는지 모르고요. 그렇기 때문에 다들 잘 묻습니다. 또 이 부분은 직접 체험해 보지 않고 가보지 않은 사람은 대답도 못해요.
체험해 보고 가보고 부처님의 말씀, 조사님의 말씀을 챙겨 보고 그렇게 해서 선지식의 방망이를 맞든지 스스로 얼마간인지 제가 거기에 대해서 체득한 바가 있어야 명백한 답을 해요. 그렇지 않고는 말 못 해. 한마디로 말해서 이렇게 일심으로 수행해 가는 과정에서는 일체 경계를 취하지 마라. 일체 경계를 취하지 말고 오직 일심으로 가라. 이 한마디를 드립니다.
그리고 생각 마하반야바라밀 그 생각, 염불이면 염불 그 생각 그것만 잡고 한 가지만 하면 좋지만 이 생각 저 생각 일으키면 망념이 일어나는 거야. 거기에 산란심이 일어나고 나중에는 독어라고 그래가지고 거친 생각이 일어나는 독어라고 그러지요. 마침내는 산란심, 독어 다 그것이 공부의 장애가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조용하고 편안한 데에 빠지는 것이 맨 처음으로 오는 경계인데 절대 그건 경계이니까 거기 빠지지 마라. 마치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몇 사람을 만났습니다만 꼭 경에도 그 말씀이 있어요. 조사어록에도 그 말씀이 있어요. 엿을 물고 있는 것과 같다. 엿을 입에 넣고 있으니까 단물이 나오거든 그걸 입에다 넣고 녹여서 그것만 꼴깍 꼴깍 삼키고 있다. 고요하고 안락하니까 다 앉아 가지고 그 재미에 취해 있다 이거여. 그래가지고는 어둑해져요. 지혜가 나지 않아요. 그 고요하고 맑은 가운데서 말끔한 생각 반야바라밀이 항상 살아 있어야 해요. 그 성성(惺惺), 성성하다는 것은 말끔하다는 뜻이고 깨일 성자 적적(寂寂) 고요 적자 고요하고 고요한 가운데 말끔한 게 항상 살아 있어야 해요. 맑고 고요하고 살아있어야 해요.
소천 노화상께서는‘수정, 맑은 수정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는 비유를 한 적이 있습니다. 맑고 고요한데 투명하게 아주 밝으란 말이야. 그것은 그런 경계를 지켜가자면 일심으로 반야바라밀을 오직 염하는 방법 밖에 없고 염해 가되 어떤 고요한 경계가 오더라도 절대 빠지지 마라.
또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기쁨이 온다. 고요하다 말고 자기도 모르게 기쁜 생각이 확 일어난다. 그래서 인제 기쁨이 나서 웃음이 나온다든가 고요한데 빠지다 보면 그런 경계가 올 때가 있는 것입니다. 또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져 나와요. 이제까지 거친 구름과 안개 같은 속에서 살고 있었는데 이 세계가 전부 그런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맑고 맑은 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하다 계속 하다 보면 그 거친 안개 같은 구름 같은 데서 있다가 차차 밝은 데로 조금 나타나진단 말이야.
밝은 데로 나타나면 이제까지 전혀 겪어 보지 못했던 밝은 힘이 나타나기 때문에 자기도 감내하지 못할 정도로 그냥 웃음이 나고 기쁨이 나고 그럴 수도 있어요. 그러나 이것은 잠시 지나가는 현상이여. 그런 때라도 처음 한 것처럼 십년공부 도로 나무 아미타불이라고 말을 하듯이 십년 공부해서 도를 통했다 하더라도 도를 처음 시작할 때처럼 나무 아미타불을 시작해라 이거야.
그런 경우를 당하더라도 그것도 경계니까 경계에 따라가지 말고 그냥 마하반야바라밀을 그냥 지어가라. 그래야 무한이라고 그러는 지혜, 무한이라고 그러는 일심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는 그게 기쁨도 있고 슬픔이 올 때도 있습니다. 기쁨과 슬픔이 그냥 연달아 와 가지고 웃다가 울다가 하고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전부 잠시 일어나는 경계여. ‘누가 그것 보고 저 사람 어떻게 잘못 되지 않았나?’그것에 빠져서 그 경계에 머물러 있으면 잘못 되는 것입니다.
마하반야바라밀 일심으로 그냥 가다보면 없어지는 거지. 저절로 슬그머니 없어져 버려요. 잠시 지나가는 안개여. 없는 거여. 그러니까 고요하다고 고요한데 빠져 있지도 말고, 그냥 기쁘다고 기쁜 일이 있다고 해서, 기쁘다고 하는 것은 이제까지 속박된 관념 가운데 있다가 속박된 관념이라고 하는 대립 관념에서 벗어나서 통일된 일념에 가까이 오니까 속박에서 벗어나서 기쁜 생각이 나는 거여. 항상 기쁜 거여 그냥. 그런데 항상 기쁘다고 항상 싱글벙글 웃고 다닌다고 해서 불법이 다 된 게 아니다 이 말이여.
역시 그 경계도 지나가야 하는 것이다. 원래 마음 가운데에 마하반야바라밀 일념으로 순수하게 해 나가는 사람은 그런 것이 없이 다 지나가버려요. ‘왜 그런 것이 생기느냐, 왜 경계가 생기느냐, 예컨대 왜 보이지 않았던 무지개를 봤다든가, 태양을 봤다든가, 무슨 귀에 소리가 들렸다든가, 알지 못했던 것을 알았다든가, 지금까지 까마득하게 몰랐던 옛날 일을 알아졌다든가, 무슨 전생 일을 봤다든가, 누구 일을 미리 예견했다든가, 뭔지 하여튼 가지가지 경계가 벌어진다고 하는 것은 그 원인이 무엇이냐? 그 원인은 이 범상적일 때는 몰랐는데 왜 염불할 때 마음이 고요하고 맑게 염불할 때 알아졌으니 자기가 도가 얼마만큼 열린 게 아니야’그렇게 생각할지 몰라도 그것은 아닌 것입니다.
왜 생겼느냐 하면은 고요하고 고요한 것 까지는 좋습니다. 우리는 산란심 가운데 있거든 이 생각 저 생각 일어나고 하는 이 산란심 가운데 있다가 산란심이 아닌 고요한 마음에 가까이 가는 것은 좋다고. 고요한 마음으로 가서 고요한 마음으로 자기를 끌고 갔던 그 말끔한 생각이, 말끔한 생각의 핵심이 흐렸기 때문에 그래요.
마하반야바라밀을 일심으로 염해서 산란한 생각이 없어지고 고요한데로 갔단 말이야. 고요한 데로 갔을 때 그 마하반야바라밀을 일심으로 관하는 그것이 흐려져 버렸어. 놓쳐버렸어. 잊어 버렸어. 약해 버려졌어. 그리고 고요한데 자기도 모르게 푹 빠져있다 이 말이야. 그것다 경험이 있을 겁니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어요. 그래 가지고 아침부터 앉았든가, 초저녁에 앉아 가지고 새벽까지 앉았다든가, 어떻게 잠깐 앉아 있다 보니까 새벽이 되어 버렸단 말이야. 그 뭔가? 그렇다고 머리가 말끔한가? 말끔하지 않아. 그 사이 내 생각에는 금방 지나가 버린 것 같은데 맑지가 않을 때가 있어요. 혼혼상태에 빠진 거여.
왜 혼혼 상태에 빠진 게 뭐냐? 마하반야바라밀로 말하면 마하반야바라밀의 그 성성한 생각을 들고 가는 것이 성성한 기운이 허약해서 그렇다 이거여. 성성한 것을 놓쳐버리면 그거 고요한데 빠져 들어가 버리면 경계가 벌어지는 거여. 고요한 게 깊으면 깊을수록 경계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인제 세상에 모르는 것을 알아지기도 하고 때로는 남이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세계를 보는 때도 있다고 그럽니다.
그러나 “무한이라고 그러는 진리세계에 가는 사람은 그 모두가 일체 경계이기 때문에 그 경계를 취하지 마라” 거듭 말씀드립니다. “일체 경계를 취하지 마라. 오직 마하반야바라밀만을 염해 가라.”
오늘 이 자리에 오셔서 공부하는 가운데서 의심나시는 분들이 있거든 ‘이 일체의 경계 보고 듣는 경계를 취하지 말라’고 하는 이 법문과 ‘일체법의 근원인 근본 진리인 일심이라고 그러는 이 진리, 이것은 형상이 없는 것이다’하는 것으로 알아서 그런 데 머물지 아니하고 오직 처음 공부한 것처럼 경건하고 간절한 자세를 가지고 일심으로 반야바라밀을 염해 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 불광 형제들은 스스로도 진실하게 하지만 하는 것만큼 딴 사람에게도 꼭 일러 주어야 합니다. 나는 이렇게 배우고, 이렇게 기도하고, 이렇게 수행하고, 이렇게 생활한다. 정말 자기가 한 것만큼 더 강한 것이 없습니다.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을 남에게 가르쳐 줘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불광에서는 자랑스러울 만큼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줄게 많습니다. 왜냐하면 절에 많이 다닌다 하는 분들을 봐도 일 년에 몇 번 가시는 분들입니다.
또 몇 번 안 가시고 자주 가신다 하면서도 이러한 믿음에 대해서 궁극적으로 여러 지식을 있어도 실지 생활을 어떻게 처리해 나갈 것인가, 어떻게 내가 지혜의 문을 열어 갈 것인가, 어떻게 고난을 극복하고 내 소망을 밝게 성취해 갈 것인가, 이 참으로 살아가는데 진리의 활용의 길을 아시는 분이 그렇게 많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불광형제들은 그것을 알고 실천하고 있는 만큼 남에게 알려주는 무기, 가르쳐 주는 무기를 가지고 있어요. 잘 가르쳐 드려라.
다들 아는바와 같이 정리해 보면 우리 불광의 수행이 뭡니까? 제일은 『금강경』 읽고, 『반야심경』 읽고, ‘마하반야바라밀’을 염송하는 것 아닙니까? 『지장경』을 읽든지, 관세음보살을 부르든지, 지장보살을 부르든지, 약사여래불을 부르든지, 아미타불을 부르든지 다 좋지만 근본적으로 마하반야바라밀을 알아야 해. 그래서 『금강경』 읽고, 『반야심경』 읽고, ‘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하라. 누구든지 그건 다 하지요. 그리고 마음에서 관한다. 부처님의 은혜, 부처님의 위신력, 부처님의 크신 공덕이 내 생명에 우선 넘쳐 나고 있는 것을 관한다. 우리 가족, 우리 형제, 우리 이웃 모두에게 넘쳐나고 있는 것을 관한다.
부처님의 은혜, 부처님의 광명 그것을 관하는 것 이게 아마 우리 불광 형제들의 수행의 내면의 중요한 부분일 겁니다. 그 다음 그렇게 되니까 감사한 생각이 나는 것이지요. 『금강경』 읽고, 『반야심경』 읽고 ‘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하고 그리고 부처님의 광명이 내 생명, 내 집안에, 내 사업에, 내가 가는 길에 충만한 것을 항상 생각하니까 감사한 생각에 이르는 거여. 충만해 있고 감사하고 마음이 이렇게 바뀌기 때문에 운명이 바뀌는 거여. 일이 바뀌고 잘 되는 거여.
형제들 아시다시피 밖에 뭐가 있어 되는 게 아니라 진리는 안에 있는 것입니다. 안에 진리가 바뀌기 때문에 밖이 바뀌는 거여. 그래서 불광 식구들이 이렇게 염송하고, 이렇게 부처님을 관하고, 그 관한 것이 현실로 받아들여서 감사하기 때문에 기도 성취가 되는 거여.
그 다음에는 세 번째로 우리 말할 수 있는 것은 미움을 버리는 것이지요. 불광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미워하지 않는다. 나를 아무리 해치고 나한테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했다 하더라도 절대로 원망하지 않고, 미워하지 아니한다, 대립하지 아니한다, 증오하지 아니한다 그런 것들이지요.
마음의 감정, 마음의 파동, 마음의 거친 것을 다 쏟아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