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충일 대한인쇄정보기술협회장 50년 인쇄 외길…‘불교신문’폐간 막아준 ‘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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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광사 작성일2005.10.31 조회1,567회 댓글0건본문
1950년대 동국대 재학시절, 그는 이미 인쇄에 손을 댔다. 법학도였던 그가 판사가 아닌 ‘인쇄인’이 될 줄이야. 부친의 죽음으로 가족부양을 위해 학내 인쇄소에서 근로장학생을 지냈던 잠깐의 인연이 그 출발이었다. 박충일(朴忠一, 71) 대한인쇄정보기술협회장. 고희를 넘긴 박 회장은 50여년 평생 ‘인쇄’라는 한 우물만 팠다. 1970년대 자신의 인쇄소 간판을 내리고 기꺼이 ‘불교신문 공무국’을 개국하여 조계종 유일언론인 불교신문의 정부 폐간조치를 막아냈다. 한번 듣고 흘리기엔 아까운 선지식들의 법문을 엮어 문서포교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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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지 창간을 도운 그다. 10여 년 전부터는 프랑스 국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직지’를 반환받기 위해 혼신을 기울여왔다. 지난 12일 일산에 있는 신흥인쇄 회장실에서 그를 만났다. 고희를 넘긴 노인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박 회장은 무언가에 대한 열정이 아직도 많이 살아있는 듯 했다. 회장실 사방에 빈틈없이 놓여있는 수백 가지 상패는, 반백 년 간 그가 걸어온 발자취다. 인터뷰가 시작되기 전, 박 회장은 세월의 손때로 정감이 묻어나는 낡은 오동나무 상자를 열어 보였다. 세계최초의 금속활자본인 ‘직지’로 불리는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의 영인본이다. 한 장 한 장 넘겨 보이며 스스로 감탄을 쏟아내는 그의 손길은 지나칠 정도로 숙연했다.
법학도가 불교끌려 인쇄업에…현대불교역사의 산 증인 광덕스님 법문에 감동…문서포교위해 월간‘불광’ 창간
1953년봄. 경남 거창서 농업고를 나온 청년은 상경하여 동국대학 법학도가 됐다. 판사가 되려고 불철주야 고시공부에 열을 올렸던 그는 교양강좌인 ‘불교학개론’과 ‘불교문화사’를 접하면서 불교에 눈을 떴다. 불교식 무술을 체험하는 선무부(禪武部)에 발을 들인 것도 그래서다. 그러던 중 고향서 갑작스레 아버지의 부음이 들려왔다. 등록금 조달은 물론 하루아침에 가족들을 부양해야할 처지가 됐다. 당시 동국대 학사처장이었던 고(故) 조명기 박사는 그의 딱한 형편을 지켜보면서 학내학보인 ‘동대신문’의 편집기자직을 권했다. 낮에는 학과공부, 밤에는 신문편집에 매진했던 그는 ‘근로장학금’으로 한달에 3천원씩 받았다. 그러다 신문방송학과 개설을 앞두고, 학교법인의 재단직영 인쇄소가 생겼다. 관심이 쏠렸던 그는 인쇄소에 발을 돌렸고, 경쟁률이 높았던 근로장학생에 선발됐다. 김희옥 법무부 차관, 송석구 전 동국대 총장, 정용길 교수 등이 당시 그와 함께 한 ‘인쇄소 도반’들이다. “인쇄소에서 18개월간 견습과정을 마치고 공장장까지 지냈지요. ‘인쇄’와의 인연은 물론 당시 조계종 총무원 서무국장을 맡았던 광덕스님과의 인연도 여기서 시작됐습니다.” 대학졸업 3년만인 1965년부터 인쇄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박 회장은 ‘신흥인쇄’를 세웠다. 1972년 창사 7년 만에 ‘마침내’ 일이 터졌다. “언론 탄압정책으로 신문사는 인쇄시설을 갖추지 않으면 폐간하기로 법이 제정됐지요. 그 바람에 한국불교 유일의 불교신문(당시 대한불교신문)이 세 번이나 폐간조치를 받았습니다. 급기야 총무원 총무부장인 광덕스님은 신흥인쇄를 폐사시키고 ‘대한불교신문사 공무국’으로 전환하여 불교유일의 포교지인 ‘대한불교신문’의 폐간을 막아달라는 요청을 하셨습니다.” | |||
박 회장은 망설임 없이 응낙했다. 불교신문 공무국 현판식 날,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 석주스님과, 총무부장 광덕스님, 교무부장 월주스님, 서돈각 동국대 총장 등은 박 회장에 고마움을 표하고 격려했다. 평범한 인쇄회사가 하루아침에 불교신문 공무국으로 돌변하자, 기존 거래처 사람들 중 타종교인들은 두말없이 등을 돌렸다. 그럼에도 박 회장은 대한불교신문 공무국장임을 입증하는 그 당시의 신분증을 신주단지 모시듯 아직도 간직하고 있었다. 박 회장은 신분증 속 미남청년인 자신의 옛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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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덕스님의 주옥같은 법문은 70평생 내 인생의 나침반이나 다름없다”는 그는 “만삭인 아내와 함께 뚝섬에서 나룻배를 타고 봉은사에 법문을 들으러 다녔습니다. 주말 대각사는 광덕스님의 법문을 듣기 위해 찾아온 인파로 종로거리까지 사람들이 흘러넘쳤고요. 스님의 법문은 아주 평범한 진리였지만 우리 부부에겐 유일한 삶의 희망이었지요.” 그 희망의 등불을 더 많은 이들에게 더 오래 밝히기 위해, 그가 선택한 것은 법문을 활자화하는 작업이었다. 지금까지도 발행되는 월간잡지 〈불광〉의 탄생이다. 1974년 11월, 마침내 박 회장은 ‘잉크가 마르지도 않은’ 뜨끈한 법문집 〈불광〉을 들고서 스님에게 달려갔다. “너도 이제 법사가 됐다. 한권의 책은 한 사람의 법사나 마찬가지라.” 씽긋 웃으며 책을 받아들고 어깨를 다독여줬던 스님의 손길이 참 따스했다며 박 회장은 당시를 회고했다. 광덕스님과의 에피소드는 끝이 없다. 위에 탈이 난 스님이 혼자 절방에서 떼굴떼굴 구르며 심한 통증에 죽어갈 때, 스님을 등에 업고 서울대 병원까지 달려가, 수술대에 올라 위를 절개하는 모습까지 지켜봤던 그다. “지금 생각하면 무엇을 하든지 참으로 어렵고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가난으로 얼룩진 암울한 시대에, 스님이 내곁에 없었다면 제대로 살아가지 못했을 겁니다. 불광사에 부처님 성상을 모시는 인연을 허락해주신 스님, 그 영광과 은혜로 지금도 이렇게 제 밥값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박 회장에겐 스님이 아니었으면 잃을 뻔했던 둘째 아들 ‘덕운(德雲)’이 있다. 1968년 딸 넷을 본 뒤에야 아들을 얻어 5남매를 키우던 중 계획에 없는 여섯 째 아이가 생겼던 박 회장. 그는 아내의 만류에도 중절수술을 결정했다. “왜 생명을 죽이려 하느냐?” 수술을 하루 앞두고 스님의 호출에 달려갔다. “스님, 5남매를 키우기도 힘에 부칩니다.” “쯧쯧. 사람 노력은 한계가 있어도 부처님 능력은 한계가 없다. 사람은 태어날 때 모두 자기 복은 가지고 오니, 괜한 악업 짓지 말고 낳아 키워라.” 둥그런 얼굴에 또릿한 눈빛이 영락없이 관세음보살을 닮은 둘째아들은 커서도 ‘스님의 아들’로 불렸고, 스님은 ‘부처님 아들’이라 칭했다고 한다. 부처님 아들로 치면 박 회장도 마찬가지다. 아들을 낳지 못해 애태우던 어머니가 고향마을에 있는 거창 연수사에서 지극한 기도로 박 회장을 맞은 것이다. “어머니가 쉼없는 기도정진으로 저를 낳았다면, 저 또한 세상구경을 시켜주신 부처님께 정진과 수행으로 보은(報恩)해야지요. 이제 얼마나 더 살지 모르겠지만,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본래 제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광덕스님은 생전에 ‘합당하고 온건하고 유유하게 살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청년시절 젊은 혈기가 앞서 불의가 생기면 ‘불뚝’하는 성격이 앞선 그를 두고, 스님은 ‘하산(何山)’이란 법명을 주었다. “‘산은 산인데 어찌 산인가’라는 의미지요. 진정한 산이 되라는 가르침이 담겨 있어요. 스님은 열반에 들기 전, 어느 날 저를 부르시더니 새 법명을 주시더군요. 똑같은 하산인데, ‘하’자 위에 초두를 붙여서 ‘하산(荷山)’으로 적어주셨어요. 풀어보면 연꽃동산이란 뜻이더군요.” 기자의 수첩에 정성껏 ‘하산’을 적어보인 그는 한참동안 눈을 감고서 눈물을 머금었다. 고양=하정은 기자 jung75@ibulgyo.com
박 회장의 ‘직지사랑’… ‘직지’운동 10년만에 세계기록유산 등재 쾌거
박 회장의 명함에는 대한인쇄문화협회장, 대한인쇄연구소 이사장, 대한인쇄정보기술협회장 외에도 범국민직지회장이란 명칭이 붙었다. 이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직지’를 반환하는 운동을 펼치고 ‘직지’를 통해 인쇄종주국의 위상을 제고시키고, 우리 민족의 문화적 위상과 자긍심을 고취시키는데 기여해온 데 따른 이름이다. 직지가 인쇄된 장소인 청주 흥덕사지에 1992년 3월 청주고인쇄박물관이 세워지면서 본격화된 직지운동으로 10여년만인 2001년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설을 뒤집고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한 국가임을 세계로부터 공인받게 됐다. “청주시는 ‘직지’를 인쇄했던 본고장답게 직지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습니다. 청주시민의 직지사랑과 저를 비롯한 인쇄인들의 부단한 노력이 좋은 결실을 얻었습니다. ‘직지’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고, 관광지에 머물러 있는 흥덕사지가 아닌, 인쇄의 생명이 꿈틀대는 도량으로 다시 살아나길 발원합니다.” 박 회장은 또 ‘직지’의 마지막 장에 적혀 있는 ‘시주 비구니 묘덕’이란 글귀를 가리키면서 “‘직지’에 대한 조계종의 관심도 절실하다”고 당부했다. [불교신문 2172호/ 10월22일자] 2005-10-19 오전 8:54:02 등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