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 만큼 새 삶이 찾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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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광사 작성일2006.03.01 조회2,052회 댓글0건본문
허공에 햇빛이 있어 나무가 푸르게 자가고, 숲이 있어 새가 즐겁게 노래한다. 땅이 있고 길이 있기에 사람들이 살 수 있고 이 모든 생명들이 그렇게 활기차게 잘 살 수 있는 텅 빈 허공이 있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 그리고 온 세상을 다 담아도 텅 빈 허공(虛空), 그 빈자리가 있었기에 지구가 돌 수 있으며, 태양이 빛을 뿌릴 수 있고, 대지가 생명을 키울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크고 소중한, 텅 빈 자리가 사람들 내면에도 있다. 우리는 가끔 한 점 번뇌도 욕망도 찾아볼 수 없는 해맑은 미소에 깃들인 텅 빈 마음을 볼 때가 있다. 그 비어잇음이 사람들에게 잔잔한 기쁨과 따사로운 위안을 준다. 높고 파란 하늘이 비어 있어서 산이 웅장하듯이 비어 있는 여백은 모두를 감싸 담아주고, 삶을 여유있게 한다.
충청도 어느 산골에 아름다운 노부부가 있다. 그들은 욕심 없이 생명을 키우고 있다. 이른 아침 한바탕 일을 끝낸 다음의 한가로운 시간, 들녘에선 농작물이 자라고 텃밭에선 푸성귀들이 싱싱하게 자라고 있다. 노부부는 먹을 것을 염려하지는 않지만 결코 부자는 아니다. 그렇다고 자식들이 가까이에서 봉양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더 이상 바랄 것없이 충분하다.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일할 수 있어 매일매일이 행복하다. 청빈한 삶이 주는 여유와 만족이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들은 어떠한가. 그저 많이 배워서 많이 알고 많이 모아서 많이 가져야만 잘 살 수 있고, 그렇게 채우고 채워야만 만족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쉴 틈이 없다. 간혹 시간이 난다 해도 시간을 비워두지 못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잠자리에 들기까지 쉬지 않고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채워보려고 서두르는 사이 탐욕, 이기심, 아집 등 부질 없는 것들로 가득 찰 뿐 만족은 없다. 그 황량하고 거친 마음엔 나 이외에는 그 누구도 들어놓을 틈이 없다. 풍족한 물질만이 삶의 여유를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비워서 얻게 되는 충만함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다.
마음의 여유를, 생활의 여유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삶은 당연히 삭막하고 고통스럽다. 어디 그뿐인가. 지금 세상은 개인이기주의를 너머 집단이기주의가 팽배하다. 오직 이익을 위해서 모이고 또 힘을 발휘한다. 그러다가도 이해타산이 맞지 않으면 금방 헐뜯고 흩어진다. 이 모두는 바늘 하나 꽂을 틈 없이 가득 찬 사람들의 욕망 때문이다. 산하대지를 다 품고도 여전히 비어 있는 허공같은 마음에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도리를 모르는 까닭이다.
요즈음 세간에선 참선수행이 유행이다. 분주한 일상에서 떨어져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다. 번뇌들로 가득 차 있는 나를 보려하는 것이다. 부질없는 것들을 비우고 또 비우는 시간이다. 그 비어있는 마음에서 따뜻한 사랑과 배려의 감성이 싹트고, 밟은 지혜의 안목이 열려 간다. 그리고 욕심을 덜어낸 빈 마음이 삶을 여유있게 한다. 그 비워둔 자리에 청결하고 만족스러운 삶이 찾아 드는 것이다.
불광 3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