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한국불교의 뉴리더, 지홍 스님
페이지 정보
작성자 불광사 작성일2006.05.19 조회3,145회 댓글0건본문
지홍(52) 스님이 유명해진 계기는 불교 조계종의 대표 사찰인 조계사 주지를 맡으면서부터다. 조계사 주지는 예나 지금이나 조계종 사암(寺庵) 주지 중 가장 정치적인 자리, 그는 1998년부터 2004년까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불교 뉴스의 한복판에 있었다. 그러나 스님을 한국 불교의 뉴리더로 꼽은 것은 조계사 주지를 지낸 이력 때문만은 아니다.
불광회 회주 스님 지홍 스님 인터뷰기사가 2006년 5월 18일, 문화일보에 게재되었습니다. 이에 전문을 실었습니다.
스님의 현 직책은 서울 잠실에 있는 불광사와 경기 광명의 금강 정사 법주(法主·법회를 주관하는 사람. 해당 사찰의 최고 실력자인 경우가 많음). 불광사는 그의 은사인 광덕(1927~1999) 스님이 1974년 순수 불교 운동지 ‘불광’과 함께 창립한 ‘불광회’가 1980년대 초반에 창건한 도심 포교당이다. 불교의 현대화, 대 중화, 생활화를 기치로 1600여년간 산중에 머물던 절을 도시로 끌어내린 광덕 스님은 이후 포교에 새바람을 일으키며 구룡사, 능 인선원, 삼보사 같은 대규모 포교당의 선구가 된다.
광덕 스님이 열반한 뒤 정체 상태에 빠졌던 불광사가 재작년 지홍 스님이 법주로 취임한 뒤 다시 주목을 끌고 있다. 20여명에 이르는 광덕 스님의 제자 그룹 중 서열이 한참 뒤지는 그가 법주를 맡은 것도 파격이었거니와, 주요 법회에 모여드는 신도의 수 가 이미 광덕 스님 생전의 전성기를 능가한 것이다. 신도 교육 프로그램의 질적인 수준도 몇 단계 높아졌다는 평가가 주류다. 이 여세를 몰아 스님은 불광회 창립 31주년이던 지난해 제2의 중창 불사를 선언하기도 했다.
인터뷰를 위해 지난 15일 불광사 법주실에서 만난 스님의 인상은 야심찬 도심 포교의 비전을 밝힌 사판승과 거리가 멀었다. 이렇 게 정치와 멀어 보이는 사람이, 어떻게 그 바람 잘 날 없는 조계사 주지를 했을까. 스님은 말했다. “가능하면… 일만 하려 했습니다.”
문제는 조계사 주지가 하는 일이란 게 한결같이 정치성을 띠고 있다는 점이었다. 파란은 그가 주지로 부임할 때부터 시작됐다.
전임 주지의 해임을 반대하는 신도 100명 정도가 조직적으로 후임 주지를 막고 나선 것이다.
“1998년 분규때 폭력사태를 일으킨 측을 지원한 것으로 드러난 전임 주지가 해임된 뒤 주지를 맡으려는 사람이 없었어요. 3~4명 만 소란을 피워도 법회를 할 수 없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조직적으로 나섰으니. 떠밀리다시피 그 자리에 들어가긴 했지만, 정말 며칠 견디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방법은 원칙 밖에 없었지요 . 반대하는 이들을 껴안으면서 재정을 비롯한 모든 일을 온전히 공개했습니다. 한편으로는 거금을 횡령, 또는 유용한 것으로 드 러난 전임자를 사법 당국에 고발하기도 했습니다. 공개하고, 껴안고, 애쓰며 몇 개월이 지나는 사이 반발하던 신도들이 생각을 바꾸기 시작하더군요.”
정치적인 사건은 막판까지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2004년 부 처님오신날을 한달 앞둔 어느날, 갑자기 조계사 주지직에서 해임 된 것이다.
“조계사 주지는 원래 총무원장의 당연직입니다. 그래, 법장 스님이 신임 총무원장으로 당선됐을 때 사의를 표명했지요. 문제는 신임 총무원장이 붙잡는다고 주저앉은 것이었습니다. 그 뒤 총무원 청사 재건축 문제 등을 두고 갈등이 계속됐거든요. 총무원장 스님은 조계사 주변의 대규모 불사를 주장한 반면, 나는 주요 국가 문화재인 조계사를 보호해야 한다는 원칙을 양보할 수 없었 습니다. 이런 와중에 멸빈자 구제 관련 투표가 1표차로 부결되자 이 투표에 제대로 협조하지 않은 것으로 지목한 나를 주지에서 해임하더군요. 사실 난 그때 찬성표를 던졌는데.”
이런 저런 일들을 겪으며 그가 상처를 받진 않았을까. 스님은 은사 스님이 금강경을 가르치며 특히 강조한 구절이 있다고 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무릇 모양이 있는 것은 모두가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상을 상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깨침)를 보리라.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고, 고정된 진리가 없는데 주지에서 해임된다고 슬플 것이 무엇있으며, 유임한다고 기쁠 것은 또 무엇이겠는가.
조계사 주지로는 이례적으로 환경정의와 인드라망생명공동체의 공동대표를 맡으며 환경운동에 깊이 관여한 것도 눈길을 끌었다.
스님은 특히 재작년 지율 스님의 단식이 위기 상황에 넘어가자 뜻을 같이하는 몇몇 스님, 신부들과 함께 동조 단식을 하기도 했다. 자연 생태를 지키는 것은 인간이나 동물 뿐 아니라 벌레와 나무, 풀 한 포기까지 함부로 하지 말라고 한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또 파업 농성중 조계사로 피신한 어느 노동 조합원들이 경내에 들어온 경찰에 잡혀가자 강력히 항의해 서울 경찰청장의 사과를 받아내기도 했다.
스님의 사회활동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니, 그의 사회관을 읽을 수 있는 이력을 간략하게 살피자. 지난 1970년 범어사에 출가한 스님은 얼마 뒤 광덕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는다. 그 뒤 서울에서 은사 스님을 시봉하며 잔뼈가 굵은 그는 1991년, 20년 가까이 모시던 스승의 슬하를 떠나 경기 광명에 금강정사를 설립해 분가한다.
구로공단 노동자와 빈민을 위한 포교를 하면서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실천해보겠다는 원(願)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스님의 이같은 못 가진 자에 대한 관심은 전남 무안의 가난한 집안 에서 10남매 중 다섯번째로 태어나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낸 것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던 스님이 16세의 어린 나이로 출가한 것도 “평생 수행하고 공부만 할 수 있다”는 말에 솔깃해서였단다. 그가 경기 광명에 세운 금강정사는 조계사 주지로 옮길 즈음 신도수가 2000여 세대에 이를 정도로 번창한다.
그렇다면 그가 지난해 선언한 중창불사 역시 능력있는 스님이 흔히 그렇듯 건물을 멋지게 치장하고 신자들을 끌어 모으겠다는 것 일까. 이에 스님은 “재건축은 중창 불사의 일부일 뿐, 외형은 중요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중창불사의 핵심은 수행과 교육, 그리고 사회복지를 더욱 강화 하겠다는 것입니다. 교육원의 교육과정을 세분화, 신도들의 필요에 맞게 내실을 강화하고 수행원과 정진원을 설치해 수행을 위한 물적·제도적 토대를 더욱 굳건하게 할 계획입니다. 우리 사회에 가난하고 병든 사람이 사라지지 않은 이상 이들을 위한 사회 복지 프로그램 강화도 미룰 수 없는 일입니다.”
수행이라…. 출가해서 수십년 선방에서 참선만 한 스님도 깨치기 쉽지 않은데, 재가 불자가 수행을 한다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 까.
“오늘날 유럽의 종교가 껍데기만 남은 채 형해화한 것은 기복 기도만 있고 수행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갈수록 심해질 것입니다. 수행을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종교가 해야 할 가장 큰 역할이자, 향후 포교의 핵심이 될 것입니다. 반드시 확철대오를 하진 못 하더라도, 스스로를 성찰하고 삶을 제대로 꾸려가기 위해서라도 수행은 필수적입니다.”
그러면서 스님은 하안거 결제일인 지난 12일 불광사의 신도들도 하안거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안거 기간, 일주일에 1~2차례 출석 해 지도 스님의 점검을 받고, 나머지 날들은 집에서 시간을 정해 규칙적으로 수행하는 방식이란다.
“참선에 전념하는 선방 스님보다 조건이 못하지만, 이 프로그램 을 온전히 실천하기는 선방 스님보다 힘들 수도 있습니다. 직장인이면 직장생활, 주부면 가사를 병행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고요한 산사에서 온갖 지원을 받으며 편안하게(!) 하는 참선보다 가족을 부양하는 가데 하는 참선이 훨씬 가치있고 참된 수행일 수 있습니다.”
그는 참선 이외에도 독경, 염불, 보살행 등 불교의 전통 수행법을 다양한 계층의 욕구에 맞게 프로그램화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강원 횡성에 정진원 건립을 추진중이라고도 했다.
수행원이 도시 생활을 하는 가운데 수행하는 공간이라면 정진원은 휴가 등 약간의 시간을 낼 수 있는 사람이 가서 수행하고 기도하고 휴식하는 곳. 잠실의 불광사가 도시 사찰의 모델을 제시했 다면 정진원을 통해 산중 사찰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할 계획이란다.
이렇게 해서 그는 불광사가 어떤 절이 되길 원할까, 신도들 이 어떻게 변화하길 바랄까.
“불교의 최종 목표는 깨침입니다. 당연히 불광사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진면목을 깨달아 부처가 되고 보살이 되는 게 목표입니다. 물론 나 홀로 깨쳐 잘 살겠다는 게 아닌, 더불어 잘 살겠다는 원을 세우고 이를 실천하는 이들이 돼야겠지요.”
긴 이야기 뒤, 시내에 가야 할 일이 있다는 스님의 차를 얻어 탔다. 스님이나 기자나 대화를 이어가는 솜씨가 좋지 못해 침묵이 자주 이어지고…, 말없이 운전하는 스님의 옆모습이 참선에 든 납자같아 “안가철인데 선방에 가고 싶은 생각은 없느냐”고 불 쑥 물었다.
스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참 선방에 가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불광사에서 벌인 이런 일, 저런 일 때문에 나 홀로 선방 에 들 시간을 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럼 스님도 절 식구에 대한 책임 때문에 선방에 들지 못한 채 수행하는 생활 수행자?
이렇게 스님의 말을 새기는 순간, 차창 밖으로 바쁘게 거리를 오가는 이들이 사람들이 와락 가깝게 느껴졌다. 그저 먹고 살기 위 해 애쓰는 거리의 사람들이나 불광사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애쓰는 지홍 스님이 모두 부처요, 보살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김종락기자 jrkim@munhwa.com
[ 약력 ]▲1970년 범어사 출가 ▲1971년 사미계 ▲1974년 비구계 ▲1990 년까지 광덕 스님을 시봉하며 불광사에서 포교 ▲1991년 금강정 사 개원 ▲1992년 금강불교문화교육원 설립 ▲1994년 조계종 개 혁회의 의원 겸 포교부장 ▲1998년 조계사 주지 ▲11, 12, 13대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불광회·금강정사 법주 ▲환경정의 공동 대표, 인드라망생명공동체 공동대표, 지구촌 공생회 이사
[문화일보 2006-05-18 1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