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파구, 백제의 옛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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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광사 작성일2006.06.17 조회3,458회 댓글0건본문
6월 넷째주 초청법회에서는 송파의 역사 문화유적지에 대하여 강의를 진행합니다. 송파구에 의외로 역사 유적지가 많이 있습니다. 조금 멀리보면 암사동 선사유적지부터 시작하여, 한성백제시대의 토성까지.... 조선시대 나라의 굴욕을 상징하는 삼전도비도 송파구 석촌동에 있습니다. 불광사가 위치한 송파의 역사와 문화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실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한 나라의 임금이 무릎을 조아려서 이마를 땅에 대는 치욕을 당한 모습을 기린 삼전도비>
강연은 김기섭(서울역사박물관 전문위원)님께서 해주실 예정입니다. 김기섭 전문위원은 백제사를 전공하였고, 몽촌토성 내에 있는 ‘한선백제박물관건립추진반 전문위원이기도 하십니다. 아래는 강연 내용 요지로 당일 주보에 실릴 예정입니다.
< 송파구 - 백제의 옛 수도 >
김기섭
서울을 포함한 한강 하류지역은 비옥한 충적지가 많아 농경에 적합하고 주위에 산과 구릉이 발달해 군사적으로도 유리하므로 선사시대부터 많은 사람이 모여 살았다. 암사동선사주거지와 역삼동․가락동의 청동기시대 주거지 등이 대표적인 선사유적이다.
철기시대에는 한강유역에 큰 나라들이 생겨났다. 중국에서는 한강․금강․영산강유역의 나라들을 모두 마한(馬韓)이라고 불렀는데, 그중 지금의 서울지역에 있던 백제국이 점차 세력을 넓혀 마한 땅을 대부분 차지하였다.
<풍납토성 전경>
백제사람들은 왕이 사는 곳을 처음엔 위례성(慰禮城)이라고 부르다가 나중에 한성(漢城)으로 고쳤다. 그래서 지금의 서울이 백제의 수도였던 때를 ‘한성도읍기’ 혹은 ‘한성시대’라고 부른다.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 의하면, 백제는 서기전 18년에 건국해서 서기 475년에 수도를 웅진으로 옮겼다고 한다. 무려 493년 동안 서울이 백제의 수도였다는 것이다.
백제의 위례성과 한성이 지금의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그동안 학설이 분분하였다. 그런데 최근 역사학과 고고학 양쪽에서 모두 서울시 송파구 일대에 분포한 토성과 고분군이 백제의 왕도(王都)유적이라고 단언하게 되면서 적어도 백제 한성시대의 중심지에 대해서만큼은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왕도란 왕이 도읍한 곳이다. 그러므로 왕궁이 있어야 하고 관청도 있어야 한다. 당연히 전국에서 가장 큰 도시가 형성되어, 다른 곳에서 쉽게 볼 수 없는 큰 가옥들이 도시 중심부에 즐비하고, 일반 민가는 외곽 곳곳에 군집하였을 것이다. 그에 따라 시장을 비롯한 각종 시설들이 도성 내부에 위치하며, 주민들에게 각종 식료를 공급할 농경지가 근교에 넓게 펼쳐진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왕을 비롯한 지배층의 무덤도 도성 근처에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전문학자들이 대규모 건물지가 다수 확인된 풍납토성․몽촌토성, 그리고 왕릉급의 무덤들이 떼를 이룬 석촌동․가락동고분군에 주목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들 유적은 모두 서울시 송파구 일대에 분포한다.
<불광사에서 아주 가까운 곳, 석촌 고분>
1997년에 풍납토성 내부를 발굴 조사해 지금의 지표로부터 4m 아래에 백제유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음을 확인하였다. 백제의 흔적은 아직도 땅 속에 묻혀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전에 수해를 많이 입은 송파구․강동구에서는 뒤늦게 백제의 귀중한 유적․유물이 발견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땅 속에 묻힌 선조의 발자취가 지니는 가치를 인정한다면 우선 땅 위의 흔적부터 잘 관리하고 연구해야 한다. 그런데 500년 가까이 백제의 중심지였으며 앞으로 백제사 및 한국고대사 연구․교육의 보물창고라고 할 송파구 일대에 문화도시 아닌 신흥 주거․유흥도시의 이미지가 뒤덮이고 있으니 참으로 아쉽다.
지금부터 불과 30~40년 전에 풍납토성의 성벽 수 백 미터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일제 때만 해도 적석총 23기와 봉토분 66기 등이 떼를 이루었다는 석촌동고분군이 근래 불과 6~7기만 흔적을 남긴 이름뿐인 고분공원으로 바뀌었다. 백제의 왕성 중 하나로 꼽히는 몽촌토성은 올림픽공원의 산책로․운동코스로 전락한지 오래다. 역사를 소홀히 한 잘못만큼 뼈저린 것이 없다. 후손들은 그 책임을 우리에게 물을지 모른다.
서울시에서 뒤늦게 한성백제박물관을 지어 문화재를 보존․관리․연구하고 그 의미를 전시․교육하겠다고 나섰다. 뒤늦었지만 참으로 다행스럽다. 뒤늦게 시작한 만큼 주민들이 그 의미를 충분히 살리는 데 앞장섰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