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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과 해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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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광사 작성일2006.07.06 조회3,74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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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년에 들어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대지진과 자연적 재앙이 계속되고 있다. 재앙이 한 번 일어나면 수많은 인명피해가 발생된다. 재앙을 예고하는 조짐이 있었다 할지라도, 아무도 그 같은 참상이 자신에게 닥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천재지변만이 아니라 우리 앞에 닥쳐오는 여러 가지 불행도 언제나 가늠할 수 없는 일로 다가온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나약한 우리는 두렵기만 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누가 구원을 바라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삶이 고통스럽고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부딪쳤다고 생각될 때 간절히 구원을 받고자 한다.


 

 

 언젠가 병원치료를 거부하고 신앙의 힘으로 죽어가는 자식을 살려보겠다고, 밤낮없이 기도만 하는 부모를 보았다. 부모의 어리석은 판단으로 그 자식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저 세상으로 가고 있었다. 맹목적인 신앙의 독이 인간의 이성적인 사고를 멈추게 하는 현장이었다. 시대가 혼란스럽고 어두울 수록 일부 종교는 구원을 빌미 삼아 타락하곤 했다. 면죄부를 팔았던 중세의 교회가 그러했고, 미륵불의 화현을 내세우며 가엾은 백성들을 혹세무민했던 사름들이 그러했다.

 

 지금도 여전히 세상은 살기 어렵고 사람들은 삶의 돌파구를 찾아 헤매고 있다. 어쩌면, 힘겨운 자신의 삶이 그 무엇에 기대는 것만으로 가벼워 질 수 있다면, 그것에 마음껏 의지하고 싶은 것이 사람들의 심정일 것이다. 급하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은 이해하지만, 이 세상에서 고달픈 자신의 삶을 구원해 줄 것은 자신의 성실한 삶 뿐이다.


 부처님께서는 숙세의 업을 인연으로 생사를 거듭하며 육도를 윤회하는 중생의 삶 자체를 고(苦)라고 전제하셨다. 태어남(生)과 죽음(死), 그 사이에서 한계를 가지고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의 삶은 그 자체가 고통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을 통해 악업을 소멸하고, 스스로 고통으로부터 자유스러워지는 것이 불교가 말하는 구원이며 해탈이다.

 

 부처님은 세속적 가치들을 버리고, 인간의 근본적인 고뇌를 해결하기 위해 출가하셨다. 그리고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이루고, 자비심으로 중생을 구제하시다 열반에 드셨다. 깨달음을 닦는 수행에 의해, 스스로 해탈하고 또 세상을 해탈케 하는 것이 불교의 구원론이다. 모든 존재들이 자신의 무한 가능성(佛性)을 실현해가는, 끝없는 스스로의 노력과 정진의 길에 구원과 해탈이 있다. 이러한 자신의 현실적인 노력만이 오랜 세월 지은 죄업이 일으키는 고통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새는 날아다니는 자요, 나무는 서있는 자”라는 시구가 있다. 새가 날아다닐 수 있는 날개를 잃었다거나 혹 나무가 뿌리를 잃어 서있을 수 없다면, 그들은 구원과 해탈의 세상에 실존할 수 없다. 자신의 생명활동의 근거인 날개와 뿌리를 잃었다면, 자신의 의지와 노력도 실현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절대자 신도 손쓸 수 없기 때문이다.

 

 

 월간 불광 2006년 7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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