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실 없는 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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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광사 작성일2006.09.29 조회4,786회 댓글0건본문
얼마 전 졸저 『방거사어록 강설』이 출간되어 가까운 지인들에게 한 권씩 보내 드렸다. 책을 받아본 스님들의 반응은 대체로 ‘수고했다’는 인사말이었는데, 그 가운데 현재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수학하고 있는 어떤 스님이 찾아와서는 “스님, 이 책을 출판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습니까?”라고 불쑥 물었다. 그래서 필자는 “글세, 한 30여년 걸렸을 걸.” 했더니, 그 스님은 놀라는 얼굴을 하고 물러갔다. 아마 그 스님은 필자의 대답이 너무 과장되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책을 저술한다는 것이 어찌 원고를 쓰는 그 시간만을 상정할 수 있겠는가!
필자는 1997년에 『반야불교 신행론』이란 책을 집필한 적이 있다. 그 책이 출간되던 날 저녁에 『반야불교 신행론』출간에 걸린 시간을 계산해 보았다. 놀랍게도 11년이라는 세월이 소요되었다. 반야불교를 공부하기 위하여 일본에서 보낸 시간이 3년이고, 귀국해서 『대품반야경』을 번역하는 데 3년이 소요되었으며, 다시 자료를 정리하고 원고를 쓰는데 4년이 걸린 것이다.
물론 이 기간 동안 오로지 그 작업만을 한 것은 아니었다. 원고를 쓸 토굴을 마련하기도 하고, 불광사 일도 했으며, 때로는 종단의 소임을 맡아서 분주하게 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의 한 모퉁이에는 『반야불교 신행론』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은산철벽 앞에서
이렇게 책을 한 권 집필하여 세상에 내놓는다고 하는 것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신 많은 기간이 소요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방거사어록 강설』을 집필하는데 30여년이 걸렸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말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필자가 출가하여 처음 봉착한 난제가 공(空)이라는 말이었다. ‘공이란 무엇인가?’ ‘왜 삼라만상이 공인가?’ 참으로 어려운 문제였다. 이러한 난제를 안고 범어사 강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1년이 지나자 『서장(書狀)』을 배우게 되었는데, 그 때 필자는 인생을 바꿀 한 마디 글귀를 만나게 되었다. 방거사라는 도인이 말했다는 “물 긷고 나무 나르는 일이 바로 신통이고 묘용이다.‘라는 게송을 접하게 된 것이다. 이 때 필자는 너무나 황홀하고 기뻐서 잠을 이루지 못할 지경이되었다. 세상에 이렇게도 훌륭한 말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것으로 공의 문제까지도 해결된 것처럼 여겨졌다.
더 이상 강원에서 문자공부를 하는데 흥미가 나지 않았다. 더 이상 구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수행이라는 것에는 차제(次第)가 있었다. 그 뒤 동국대학교 졸업식 다음날 걸망을 지고 지리산 칠불사의 운상선원을 찾아갔는데, 거기서도 공과 방거사의 게송은 항상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렇게 수행의 길을 가는 길목에서, 방거사가 마조 선사에게 “일체의 존재와 상관하지 않는 자, 그것이 어떤 사람입니까?” 라고 묻자, 마조 선사가 “자네가 저 서강의 물을 한 입에 다 마시고 나면, 그 때 그것을 자네에게 말해 주겠네.”라고 대답한 선문답을 만나게 되었다.
이 때 방거사와 마찬가지로 필자도 불법의 현묘한 이치를 깨달은 것처럼 착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선사(先師)이신 광덕 스님게서 일본어판 『방거사어록』을 건네주시면서 번역하여 불광지에 연재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겁도 없이 『방거사어록』의 번역을 6개월 정도 연재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연재를 중단했다.
방거사가 약산 선사의 제자들에게 “참 멋진 눈이다. 한 송이 한 송이 다른 곳에는 떨어지지 않는구나!”라고 한 말에서 한 발자국도 내디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 긷고 나무 나르는 일이 바로 신통이고 묘용이다.”라는 게송도, 졸저 『신반야심경 강의』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은산철벽이었다.
그로부터 십수년이 흘렀다. 그 사이에 조사어록을 닥치는 대로 탐독하고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 그 결실물로 내놓은 것이 『방거사어록 강설』이다. 조금은 주제 넘는 짓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혹여 필자의 강설이 방거사나 당대 큰스님들의 뜻을 왜곡하지는 않았는지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인간의 삶에 하나의 결실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