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먼저 무엇부터 공부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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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광사 작성일2006.12.31 조회5,687회 댓글0건본문
두 사람의 대화
수학에 정통한 사람과 바른 이치를 추구하여 환히 깨우친 사람, 이렇게 둘이서 높은 누각에 올랐습니다. 수학자가 말했습니다.
“이 누각은 1층에서부터 시작하여 2층, 3층으로 올라갑니다.”
수행자가 대답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수학자가 또 말했습니다.
“동물을 길들이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한 단계 한 단계 훈련을 시킵니다. 처음부터 어려운 동작을 하라고 채찍을 휘드르지는 않습니다.”
“맞습니다. 그렇게 해야 동물들은 아주 멋진 묘기를 훌륭하게 익힐 것입니다.”
“우리처럼 수학을 담당하는 사람들도 처음부터 어려운 공식을 외지 않습니다. 1,2,3····이라는 숫자를 배우고, 그 숫자들을 하나씩 더하고 빼는 산수공부를 충분히 해가면서 차츰 어려운 문제에 도전합니다.”
수행자가 끄덕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해야 어려운 수학문제도 잘 풀수 있고 재미도 느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들처럼 바른 이치를 깨친다고 하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당신들도 어떤 단계가 있습니까”
느닷없이 수학자가 수행자에게 물었습니다.
수학자는 그게 알고 싶었던 것같습니다. 마음으로는 수행자를 따라서 뭔가 깊은 이치를 탐구해보고 싶은데 차분히 알아가는 과정이 과연 있는지, 초보자도 마음만 내면 따라갈 수 있는지가 궁금했던 것입니다.
수행자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어떻게 첫술베 배부를 수 있겠습니까? 성자들이 일러주는 신앙의 길에도 차례가 있습니다. 그 차례를 따라서 걸어가야만 합니다.”
불교공부의 첫단계
수행자는, 여러분도 짐작하셨겠지만 석가모니 부처님입니다. 수학자는 당시 수학에 정통해 있던 목건련이라는 사람입니다. 목련존자와는 다른 인물이지요.
부처님이 일러준 불교공부의 첫걸음은 놀랍게도 ‘몸과 입과 뜻을 잘 보호해서 나쁜짓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좀 싱겁기까지 합니다. 심오한 철학이나 사상을 알고 싶고 심지어는 나의 전생이나 내생, 뭐 이런 것에 대해서 좀 들을만한게 없을까하고 부처님과의 첫 면담을 시도한 사람에게 부처님은 이것부터 시작하라고 합니다.
‘몸과 입과 뜻을 잘 보호하라’
이것은 한마디로 열가지 선업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불교를 알고 싶어서 절에 다니고 강좌나 법문을 듣는 사람들, 삼천배를 올리거나 금강경 수십만번 독송하는 사람들, 수행의 깊은 경지에 이미 들어간 대덕들을 친견하기 위해 전국을 찾아다니는 사람들, 이런 분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첫째, 살아 있는 것을 미물이라도 내 목숨만큼 소중한 생명을 지니고 있으니 함부로 죽이지 말라.
둘째, 주지 않은 것은 절대로 무단으로 갖지 말고 정당한 노력으로 얻은 것에 만족하라.
셋째, 아름답고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어지러운 이성 관계를 갖지 말라.
넷째, 진실하지 않은 말을 하지 말라.
다섯째, 거친말이나 욕을 하지 말라.
여섯째, 사람들의 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말을 하자말라. 사이가 벌어진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만들려는 마음을 품지 말라.
일곱째,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지나치게 과장해서 말하지 말라. 사실에 근거해서 진심이 담긴 말만을 건네라.
여덟째, 욕심을 부리지 말라.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 아니다. 인과법을 무시하여 더 많은 것을 바라지 말라.
아홉째, 화를 내지 말라.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제 사소한 감정에 얽매여서 화를 내는 일은 삼가라.
열째, 자꾸만 배우러 다니면서 현명해지도록 노력해라.
의 열가지라는 것입니다.
이 속에는 부처님 말씀이니 믿어야 한다든가, 막연하게 집착을 버리라는 식의 내용은 들어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너무 싱거운 가르침에 피식 웃음을 터뜨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기본이 되고, 이 열가지 사항이 완전히 내몸과 마음과 언어 습관에 붙어버린 사람에게만 부처님은 다음 단계를 열어줍니다.
묵언수행을 한 보살님
“아이고, 내가 또 업지었네”
“ 요놈의 구업····. 항상 탈이라니까. 그저 입 다물고 있어야 하는데····.”
절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아주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업이라는 것이 전생에 지은 죄이므로 내가 지금 입만 벙긋하고, 손가락 하나만 슬쩍 들어 올려도 그건 죄짓는 일이니 멈춰야 하는데 살아있는 목숨인지라 눈에 보이는 일들, 몸으로 부딪치는 일들에 사사건건 참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니 마지 못해 참견을 하고 행동을 하지만 그때마다 ‘업짓는 중생’이라는 씁쓸한 마음을 금할 길 없습니다.
구업, 입으로 하는 말이 죄다 구업짓는 일이니 조심해야 한다는 법문을 어떤 분이 스님에게 들었나 봅니다.
그 분은 그 날 이후로 묵언수행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아주 활발한 성격을 지닌 분인데 자기는 아무런 생각없이 남의 일에 끼어들기도 하고 이런 저런 말들을 쏟아 놓기도 했는데 구업짓지 말라는 법문을 듣고 보니 그게 얼마나 죄짓는 일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날 저녁 그 분은 가까운 친구에게 전화로 하소연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난 구업 짓지 않으려고 가급적 말하지 않고 지냈는데 왜 사람들이 내게서 멀어지는 걸까?
대체 이분의 묵언 수행에 무슨 하자가 있었던 것일까요?
이 글은 월간 불광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글을 써주신 이미령님은 동국대 불교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