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마음의 어느 자리에 서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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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광사 작성일2007.01.05 조회5,772회 댓글0건본문
겨울밤 산사에 앉아 차를 마셨다. “제가 한달에 보시를 너무 많이 받아요. 화림원 대중이라 20만원, 학장이라 40만원 그리고 주지라 57만원, 도합 117만원을 받아요. 미안하데요. 그래서 그 돈 다시 사중에 반납했어요. 저번에 해인사 회의를 5번 다녔는데 한 번에 30만원씩 주더군요. 그 돈 받을 때마다 학인 스님들 대중공양금으로 내놨지요.”
실상사 주지 스님 이야기를 들으며 가만히 나를 생각해 보았다. 나는 얼마나 받는가. 그렇게 아무 생각없이 주머니를 비울 수가 있는가. 자신이 없었다. 주머니를 깡그리 비우고 산다는 것이 주머니를 비워 본적이 없는 내게는 좀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 주머니를 전부 비우고도 아무 불안이나 두려움 없이 달아갈 수 있다면 그는 아름다운 시간을 살아온 사람임에 틀림없다.
출가자의 멋은 아무 미련없이 비우는 데 있다. 길을 가다가도 논두렁 베고 죽을 수 있어야 출가자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나는 못 그런 것 같다. 앞뒤를 재고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한다. 세속적인 것이다. 이건 어디에 쓰고 이것은 또 어디에 쓰고 그런 셈을 하고 산다. 마음에 시원한 구석이 없다. 가끔씩 나를 돌아보면 출가할 적의 정신을 얼마나 잊고 사는지 금방 알 수가 있다. 내가 살아온 출가의 시간에 나를 비추어 보면 참 많이 어긋나 있음을 알게 된다. 함부로 시간을 살아온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인과를 벗어나지 않기에
너무 많은 시간을 허투루 살아왔다. 나는 어쩌면 오래도록 이 아름다운 시간을 만날 수 없을는지 모른다. 너무도 많은 시간을 허비한 까닭에···. 시간이라고 어찌 자기를 외면한 일생을 모르겠는가. 시간은 나를 ‘시간을 함부로 사라온 죄인’으로 기록할 것만 같다. 그래서 이 실존의 시간은 오래도록 나를 비껴 갈 것만 같다. 다시 인간이 되지 못한 시간 동안 나는 어쩌면 시간을 아름답게 사는 철저한 훈련을 받을지도 모른다. 인간 밑의 세계를 윤회하는 그 시간들의 훈련은 얼마나 처절하게 고통스러운 것일까. 끔찍하다. 인과는 이렇게 역연한 것이다.
사람들은 때로 자신에게 다가온 일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착하게 살아왔는데 왜 자신에게 이렇게 어려운 일만 닥치는가를 하소연한다. 내가 봐도 그들은 대개게 지금의 시간을 착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현재의 시간 속에서는 그들이 받아야 하는 고통의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찾을 수 없다고 해서 원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인과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원인과 결과를 벗어나 존재하는 것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전생의 시간을 보면 그는 지금의 고통을 받아야 하는 원인을 반드시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전생을 알 수 있느냐고 물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대답은 너무나 분명하다.
현재를 봐라. 현재의 고통을 보고 있으면 전생에 지은 일들이 그대로 떠오른다. ‘내가 그랬었나봐’하고 전생의 일을 수긍할 수 있을 때, 그는 지금의 고통 역시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그순간 고통이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 되는 것이다. 그때 그의 현재는 영원이 된다. 그는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라는 삼세의 시간을 이 순간에 다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분노하고 절망하는 사람은 현재라는 시간을 잃어버리고야 만다. 그의 현재는 고립되어 있는 시간이고, 그 시간은 결국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과거와 미래와 하나가 되지 못한 시간은 탐욕과 집착에 근거한 어둠의 시간일 뿐이다.
탐욕은 삶을 자꾸만 작게 만든다.
인생에는 두가지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 인생을 창조적으로 사는 사람과 소비적으로 사는 사람이 그것이다. 분노와 탐욕에 이끌려 사라가는 사람은 시간을 소비하며 사는 사람이다. 그러나 어떠한 경계 앞에서도 그 마음에 고요를 간직하고 사는 사람은 시간을 창조적으로 사는 사람이다.
시간을 소비하며 사는 사람들은 인생을 수동적으로 끌려 다니면 산다. 만나는 경계와 대상을 따라 수시로 그 마음이 변한다. 그러나 언제나 그 마음에 고요를 지니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시간의 중심에 서서 시간을 운영한다. 그래서 그가 서 있는자리는 언제나 진실하다. 마치 화살을 맞았으나 그 마음에는 상처를 남기지 않는 사람과도 같다. 화살을 한번 맞은 것이다. 그는 다만 몸의 아픔과 상처만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중심에 서지 못한 사람은 화살을 맞고 그 아픔에 집착한다. 그래서 마음까지도 치유할 수 없는 상처가 남는다. 그는 화살을 두 번 맞은 사람이 된다. 몸과 마음 모두에 화살을 꽂고 있는 것이다.
탐욕은 분노를 낳고 분노는 어리석음을 낳는다. 그러나 탐욕을 내려 놓기란 쉬운 것이 아니다. 탐욕은 놓고자 하면 더 강하게 밀려오는 습성이 있다. 어둠을 쫓기 위해서는 방에 불을 켜야 하듯이 탐욕을 놓기 위해서는 보시의 지혜가 필요하다. 날마다 보시를 생활화 할 때 보시의 즐거움과 만나게 되고 그 때 비로소 탐욕의 불씨는 사라져 버릴 것이다. 탐욕은 보시의 지혜가 없는 곳에 자리한 어둠과 같다.
아름다운 사람들과 만나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라. 그러면 삶의 아름다움이 어디에 있는지를 느낄 수가 있다. 주머니가 비었어도 아무런 걱정 없이 다시 주머니를 비우는 한 스림의 이야기가 내게는 삶의 아름다움을 일깨워 주었다. 문득 내가 가진 것이 부끄러웠고 다시 한번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탐욕은 삶을 자꾸만 작게 만든다. 크고 아름다운 인생은 탐욕을 버리는 자리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대는 마음의 어느 자리에 서있는가. 묻고 또 물으라.
월간 불광 2007년 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