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보살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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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광사 작성일2007.03.18 조회6,750회 댓글0건본문
인간은 복력(福力)으로 산다. 그러나 복이라는 것은 원한다고 해서 얻어지지는 않는다. 복을 받을 수 있는 행위를 했을 때만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복전(福田)이라는 말을 쓴다.
농부가 밭에 씨앗을 뿌려 수확을 하듯이 사람은 복 밭에 복의 씨앗을 뿌려 더 많은 복을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이러한 복전을 가꾸는 수행에는 여러 종류가 있을 수 있지만,『대품반야경』몽서품 제61에는 반야바라밀행이 복전이라고 하여 이렇게 설하고 있다.
보살마하살이 일체지(一切智)에 걸 맞는 마음을 여의지 않으면, 바로 일체의 복전가(福田邊)에 도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을 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것도 보살마하살 같은 세력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모든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일체 중생들 가운데서 즐거움을 주는 큰마음[大慈心]을 일으키고, 많은 중생들이 죽음의 땅으로 나아감을 보는 까닭에 가엾이 여기는 큰마음[大悲]을 일으키며, 이 도를 행할 때에 환희하여 기뻐하는 큰마음[大喜]을 내고, 분별하는 생각과 함께 하지 않아서 바로 온갖 집착을 버리는 큰마음[大捨]을 얻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큰 지혜의 광명[大智光名]이라 하니, 큰 지혜의 광명이란 소위 육바라밀인 것이다.
많은 선남자 선여인이 아직 부처님이 되지는 못했지만, 능히 일체 중생들을 위하여 큰 복전이 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도 또한 물러서지 않으며, 공양물인 의복․음식․침구․평상의약일용품을 받고, 반야바라밀에 걸 맞는 생각을 행하여 반드시 훌륭하게 시주의 은혜에 보답하며, 속히 일체지에 다가서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수보리야, 만약 보살마하살이 국토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주 물을 헛되이 소화하지 않으려하고, 중생들에게 삼승도(三乘道)를 보이고자 하며, 삼계의 감옥에서 벗어나고자 하며, 일체 중생들에게 눈을 주고자 한다면 마땅히 언제나 반야바라밀을 행해야 한다.
일체지란 부처님께서 깨달은 바로 그 지혜로, 존재에 대한 실상을 바로 깨달은 지혜이다. 즉 일체 존재가 동일법성이라는 사실을 체득한 지혜이다. 따라서 너와 나, 사람과 짐승, 중생과 부처가 같은 생명임을 아는 사람 그가 바로 복전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복전인 보살은 어떻게 수행하여 복전이 되었는가? 바로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四無量心]을 닦았기 때문이다. 복전인 보살에게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이 왜 생기는가? 일체 중생이 자기 몸임을 알기 때문에 생기고, 자신의 몸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어떤 보답도 바라지 않는다.
그러면서 보살은 반야바라밀에 걸 맞는 생각을 행하여 반드시 훌륭하게 시주의 은혜에 보답한다. 사람들의 시주 물을 헛되이 소화하지 않고, 삼계의 감옥에서 벗어나고자 하며, 일체 중생들에게 눈을 주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마하반야바라밀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