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을 대중 속에 심어주신 큰별
글· 한탑스님
큰스님과의 만남과 인연에 대해서 회고해 주십시오.
스님과 나와의 인연은 1956년 9월달부터 시작이 됐습니다. 1956년은 잘 아시다시피 국가적으로는 국민소득이 50불이었던 빈곤 상태를 헤매면서 전쟁은 끝났지만 언제 다시 재발할지 모르는 그런 불안 속에 살고 있었지요.
또 우리 불교 내부에서는 정화운동이 일단락 돼서 비구 승단이 종단을 지배하고 있던 그런 시대입니다. 사상적으로도 세상이 혼미하였고 경제·사회적으로도 아주 어렵게 지내던 그 때 국민들이 종교에서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있을까 헤매고 있을 때 광덕 스님이 대각사에서 ‘대각회’라는 포교 단체를 조직했습니다.
그 때 대각사 주지는 소천 스님이셨는데 광덕 스님께서 약관 30세의 나이에 포교 활동을 개시하셨습니다. 나는 당시 27세의 청년으로 동참해서 총무를 맡고 같이 대각회를 발전시켰습니다. 그 때만 하더라도 불교는 기복 신앙의 도구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을 때 불교야말로 현대 인류를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영원한 등불이라는 것을 세상에 외치신 것입니다.
국내의 저명한 학자나 지도층에 계신 분들을 매주 초청해서 대각사 법당에서 대법회를 열었습니다. 잘 모르시겠지만 일간지에도 많이 보도되는 등 57, 8년도 당시엔 전국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지금 생각해 볼 때 30세의 나이로 남이 해보지도 못한 대중 포교 운동을 ‘각사상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전개할 수 있었을까 이것은 보통 사람은 하지 못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행스럽게 스님이 백용성 스님의 문중에 계셨지요. 백용성 스님께서 불교가 하도 타락해서 세상 사람들이 기복 신앙밖에 하지 않으니까 이건 안 되겠다 해서 대각교 운동을 시작하셨는데 그 본부가 대각사입니다.
그 사상을 전개하시려고 용성 큰스님께서 여러 가지 경전을 번역하고 남들이 불교를 서양 음악적으로 찬양하게 되면 예수교 냄새가 난다고 싫어할 적에 풍금을 치면서 불교 운동을 전개하셨던 분이 바로 용성 큰스님입니다.
불행히도 왜정 시대였기 때문에 그 운동이 크게 발전을 못했지만 그 뜻을 이어받아 손상좌 되시는 광덕 스님께서 대각교운동을 전개하셨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역사적인 필연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때 마침 좋은 인연이 되어서 『금강경』 강의를 들었는데 강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스님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세상에 저렇게 깨끗한 얼굴도 있는가’하고 깜짝 놀라서 내가 홀딱 반해가지고 그 때부터 불교 운동에 투신하게 되었고, 43년 동안을 한 번도 떨어지지 않고 모시고 지냈습니다.
삶과 사상을 정리해 주셨으면 합니다.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불교라고 하면, 현실사회를 떠나 산중으로 들어가야 되고, 신분도 승려라야 되지 일반 신도는 불교 수행을 못한다고 인식하고 있었는데 광덕 스님은 옛날부터 내려오던 한계를 타파하는 혁명적인 사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또한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면 육바라밀의 하나로서 그저 일반적인 윤리 덕목 중의 하나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을 때, 그게 아니라는 거지요.
반야바라밀이야말로 부처님 신앙이고, 반야바라밀이 불자들의 신앙의 바탕이 되어야 된다. 반야바라밀이라는 게 딴 것이 아니라 바로 참생명으로 회귀하는 것임을 강조하셨지요.
참생명의 회귀는 본래부터 부처님 생명이다. 우리가 지금은 중생인데 앞으로 노력해서 부처님이 된다는 것이 잘못된 생각이다, 세상 사람들은 ‘나는 지금은 중생인데, 앞으로 노력을 잘하면 부처님이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반야사상에서 생각하면 본래 중생이 없거든요. 우리는 스스로 깨치지는 못했을 망정 본래부터 부처지요. 본래부터 부처니까 반야바라밀이라는 신앙의 바탕을 통해서 내가 부처인 듯이 살면 된다는 거예요.
새삼스럽게 부처 되는 게 아니니까, 보현행원을 실천한다는 것이 딴 것이 아니라, 내가 본래 부처니까 부처처럼 살면 될 게 아니냐. 그래서 반야바라밀이 신앙의 바탕에 깔려 있어서 일상생활 모두를 보현행원으로 살도록 그렇게 강조하신 분이 광덕 스님입니다.
그 어른이 말씀하신 불교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특별한 지역에 들어가서 하는 불교수행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신분을 바꿔야 수행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재가자 입장 그대로 그 자리에서 또 보현행원을 실천해 나가라. 보현행원의 도량은 가정이고, 직장이고, 사회라고 하셨지요.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근세의 불교운동을 재가화시켜 주신 큰 별이십니다.
그 어른은 적어도 부처님 법에 귀의한 사람이라면 보현행원을 실천해야 되는데, 보현행원을 한마디로 얘기하면, 바로 전법도생, 법을 전해서 중생들을 제도하는 것이라고 하셨지요. 선방에 들어가서 수행해서 견성의 경지에 간다는 것을 강조하신 게 아니라, 「보현행원품」의 보현행원으로 보리(菩提) 이루리를 강조했습니다. 그 어른의 모토는 항상 그겁니다.
보현행원은 일반사회 속에서 오는 거니까, 재가자가 하는 것이니까, 그 자리에서 바로 보리가 이루어진다는 거니까 그렇게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광덕 스님을 도심포교의 효시라고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글쎄 남들은 그렇게들 얘기하는데, 그것은 광덕 스님을 조금 폄하하는 겁니다. 미안한 얘기입니다만, 광덕 스님은 도시포교만 하셨고, 지방이나 농촌포교는 내버렸느냐, 그런 게 아니거든요.
지금 말씀대로 광덕 스님이 주장하셨던 가르침이 바로 재가자들의 불교이기 때문에 얼른 보면 도심포교인 것 같이 보이지만, 도심포교만이 아니지요. 불교를 대중 속으로 파고들게 하는 그런 포교운동입니다.
여태까지는 불교라고 하는 것은 수행쪽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던 것에 반해서 광덕 스님은 포교가 바로 불자의 사명이라고 역설하였고, 그래서 불광법회에서는 ‘전법오서’를 항상 외우고 있지요.
전법이 불자의 사명이다, 새삼스럽게 내가 깨치겠다고 안 해도 부처님께서 이미 다 깨쳐주셨고,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르침이 있으니, 그걸 그대로 믿어 나가면 되는 겁니다. 그게 마하반야바라밀이죠.
불광에서 신앙하는 것은 마하반야바라밀입니다. 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 무한세계를 얘기합니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의 열반의 세계를 얘기하는데, 바라밀의 세계는 절대 무한광명의 세계인데, 이것 말고 딴 것이 없는 거거든요. 절대 무한광명의 세계는 무엇으로 인정되느냐?
마하반야바라밀, 부처님의 지혜광명 속에서 비추어진 세계거든요. 이 세계에서 보면 재가자고 출가자고, 불자고 비불자고, 도심이고 농촌이고가 갈라지지 않습니다.
모든 국토, 모든 사람이 본래부터 부처님의 무량공덕 생명을 살고 있고, 본래부터 바라밀 국토고, 그러한 자각을 가지고 살라는 각운동이죠. 각운동이지 도심포교라고 제약해서는 안 됩니다.
광덕 스님은 불교를 현대화, 대중화하고 그래서 한국이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서 저 세계 인류로 하여금 삶의 등불을 불교에서 찾게 하자는 그런 운동을 시작하신 분으로 정리해야 될 겁니다.
큰스님의 일화를 좀 말씀해주십시오.
일화가 너무 많아서 다 어떻게 말할 수가 없는데요. 두 가지를 들자면, 하나는 대학생불교연합회 지도법사를 하시다가 범어사로 가셨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오래간만에 법우인 심재열 거사와 함께 인사동 네거리를 가다가 광덕 스님을 만났어요.
너무 반가워서 ‘스님, 여기 웬일이시냐’고 했더니 ‘내가 지금 관재구설을 피해서 왔습니다.’고 하시길래 깜짝 놀라서, ‘무슨 관재구설입니까?’ 그랬더니 ‘범어사 대중들이 날 주지에 앉히려고 그런다’고 그래요.
딴 사람 같으면 그걸 영예로 알텐데, 그걸 관재구설이라고 피신오셨다는 겁니다. 지금 주지 맡으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이 들으면 청량제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또 하나는, 이 어른은 1927년생, 일흔셋이신데, 왜 이렇게 일찍 가셨을까 하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렇지가 않아요. 이분은 수를 누리신 분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20대 후반에 폐를 하나 잘라내 폐가 하나 없고, 또 담낭이 없고, 위장이 3분의 1밖에 없습니다. 그런 신체로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법문하실 때 보면, 그런 걸 누가 알겠습니까?
그분이 폐결핵 앓으실 때 남해 보리암에 가서 천수다라니를 하루에 4천독을 했습니다. 천수다라니를 하루에 천독하기도 어렵습니다.
천수다라니 4천독이라고 한다면 이것도 기네스북에 오를 일입니다만, 천수다라니를 외시게 된 동기는 물론 당신의 병을 고치겠다는 원력도 있습니다만, 한편으로는 그 어른의 할아버지벌 되시는 백용성 큰스님께서 파주 보광사 위에 있는 도솔암에서 천수다라니를 독송하시다가 견성을 하셨어요. 그래서 그 맥을 이으시려는 뜻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지를 맡아 달라는 것을 관재구설이라고 했다는 것에서 그분의 구도심을 알 수가 있고, 당신네 집안의 가풍인 수행을 철저히 하기 위해서 천수다라니를 하루에 4천독씩 하신 거예요. 그래서 물론 그분의 견처도 밝아졌겠지만, 당신의 몸에 있던 병은 다 없어져 버린 거지요.
그랬기 때문에 그분이 73세까지 사신 거지, 보통 사람이라면 수명이 그렇게 길지 못했을 겁니다. 그 밖에도 얘기를 하려면 많습니다.
스님께서 늘 강조하신 점과 잘 알려지지 않은 업적을 짚어 주시지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큰 업적을 남기신 것은 종단의 법제도를 완전히 정비하시고, 그래서 현재 조계종의 법규가 어디 내 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정비되었다고 하는 것은 광덕 스님의 업적입니다.
이것은 이 어른이 아니면 할 수가 없었고, 종단 내부적인 것 말고 큰 의미를 찾는다면, 그 어른은 사실은 부처님을 모시고 절에서 나와서 대중 속으로 들어가셨던 분이라고 보아야 됩니다. 부처님을 대중 속에서 모시게 만들어 주신 분이에요.
그 전까지는 그런 분이 없었어요. 옛날에 원효 대사가 그렇게 하셨겠지만, 현대 사회에서 부처님을 대중 속에 심어 주신 분은 광덕 스님입니다. 이건 누가 뭐래도 부정을 못하죠. 한마디로 말하면, 불교를 현대화, 대중화해주신 큰 별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 전거(典據)가 어디 있느냐 하면, 경전의 번역 사업입니다. 경전 번역은 그 이전에 백용성 스님 때부터 시작을 했고, 동국역경원에서도 많이 번역을 하였지만, 경전들을 신심나게 환희심으로 읽을 수 있게 해주신 분은 광덕 스님이에요.
그 어른이 번역한 것을 한번 읽어보십시오. 낮잠이 좀 오고, 따분한 생각, 슬픈 생각이 나고, 부정적인 생각이 났다가도, 그 어른이 번역한 경전을 읽으면 피가 솟아 오릅니다. 특히 그 어른이 보현행원을 개편하신 것이 있어요.
‘보현행자의 서원’이라는 게 있는데, 지금은 많은 법회요전에 수록이 되어 있는데, 저자가 누군지도 모르고 수록이 되어 있지요. 광덕 스님이 쓰신 건데 만약에 누구라도 ‘마음이 슬프다, 부정적인 생각이 난다, 절망했다, 나는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 헤맨다’ 이런 생각이 들 때, ‘보현행자의 서원’을 다만 한 구절이라도 읽으면, 그 때 희망이 솟아 납니다. 그런 힘있는 글을 써 주신 분입니다.
불전 번역뿐만 아니라, 노래 포교가 있는데, 불광합창단은 교계 불교합창단의 효시일 겁니다. ‘보현행원송’이나, ‘부모은중송’은 굉장한 음악적 가치가 있는 음악 포교로 그 합창을 들으면 정말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보다 더 중심이 되는 것은 불광사의 창건입니다. 불광사 창건을 생각할 적에 ‘아, 시중에 포교당이 하나 생겼구나,’ 이렇게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불광사가 건립될 적에 동참 인원이 2만 명이 넘습니다. 7백원부터 몇천만 원까지 동참을 해주셨어요.
그 때 불광사를 건립할 때, 우리의 서원은 포교당이 부족하니까 포교당을 하나 더 건립하자, 그런 차원이 아니에요. 불광사 동판에도 새겨져 있지만, ‘불광사는 불광법회 바라밀운동의 근본도량이다.’라고 되어 있어요.
그 얘기는 뭐냐 하면, 불광사를 통해서 모든 사람이 본래부터 부처님 생명으로 살고 있다는 자각운동, 세상 사람은 전부 자기 생명이 뭔지 모르고 지내기 때문에 절망 속에 빠져 있는데, 그 사람들에게 자신이 바라밀 생명을 살고 있고, 자신이 살고 있는 국토가 바로 바라밀 국토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운동의 중심도량이 바로 불광사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불광사를 지은 뒤에 스님께서 병환으로 눕게 되셔서 그 운동이 크게 전개되지는 못했습니다. 불광사 기공식에서 제가 ‘오늘 우리가 내리치는 첫 삽은 잠실 법당의 첫 삽이 아니라 방방곡곡에 들어설 우리 불광 법당의 첫 삽이다. 우리 대한민국 방방곡곡에 불광 법당이 들어서고, 나아가서는 전 세계 인류를 광명의 세계로 이끌어 나갈 그런 법당을 기공하는 첫 삽이다.’라고 얘기했던 것이 생각나는군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세상 사람 모두가 신분에 관계없이 부처님 생명을 살고 있는 절대무한의 능력자라는, 권능자라는 걸 일깨워주는 운동을 전개하신 분이
광덕 스님이라는 걸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왜 스님께서는 전법을 강조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어른의 신심에서 나온 결론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우리를 무엇으로 제도하셨나요? 35세에 성도하셔서 80세에 입멸하실 때까지 부처님이 하신 게 뭡니까? 전법도생(傳法度生) 그것밖에 없습니다. 또 대승자모(大乘慈母)라고 우러러 모시는 관세음보살님께서 중생을 어떻게 제도하셨습니까? 관세음보살 보문품에 뭐라고 나와 있습니까? ‘이렇게 설법하신다’고 나와 있듯 관세음보살님도 설법하고 계세요. 극락세계에 계신 아미타 부처님도 『아미타경』에 보면 ‘금현재설법(今現在說法)’그랬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방침이 바로 전법이고, 관세음보살님이 중생을 제도하신 것도 전법이고, 아미타 부처님이 우리를 제도하시는 것도 설법입니다. 설법으로 하는 겁니다. 현재 머리를 깎았든지 안 깎았든지 불자라고 한다면 무얼 해야 합니까? 전법말고는 없어요. 전법해야 합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전법은 내가 깨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전법을 하느냐’ 그럽니다. 『금강경』에 보면, ‘이걸 다 깨우친 다음에 남한테 전해라’ 그런 말씀은 없어요. 『금강경』을 수지 독송하고 남을 위해 설해주면 그 공덕이 한량없다고 그랬어요. 내가 수행해 가면서 설법도 하라 그랬지, ‘나 수행 다 끝난 다음에 설법하겠다’ 그런 말이 아닙니다.
광덕 스님은 ‘전법오서’를 불광법회에서 생명으로 삼도록 하셨는데 그 내용이 뭐냐 하면 ‘전법으로 바른 믿음을 삼겠습니다.’ 그랬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본래 모두 부처 생명을 살고 있으면서 그걸 잊고 있는데 사람들에게 그걸 깨우쳐 주는 것은 전법밖에 없어요. 그 전법의 극치가 바로 보현행원이기 때문에 항상 불광법회에서 외우는 것은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루리’입니다. 스님은 한평생 전법을 생명으로 삼으신 분입니다.
스님의 가르침을 계속 이어가야 할텐데 그런 부분을 좀 짚어 주시지요.
광덕 스님께서 우리에게 강조하신 것은 ‘너희는 본래 바라밀생명이다. 바라밀 생명을 남김없이 내어 쓰도록 해라’입니다. 바라밀생명에는 울타리가 없습니다. 무한 세계로 전개 되는 것이 바라밀 신앙입니다.
우리가 동서화합, 남북통일, 세계인류평화를 외치고 있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마하반야바라밀로 바라밀세계를 실현시키는 것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재가자니, 출가자 신분 따지지 말고 지역 상관 없이 우리 모두가 부처님 법을 현대사회에 맞게 적극적으로 펼쳐서 국민 전체가 다시 용기 솟게 만들고 나아가 전세계를 희망의 세계로 이끄는 역할을 담당해야 합니다.
스님의 큰 뜻을 생활 속에서 잘 이끌어 갔으면 합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불교방송 ‘무명을 밝히고’ 시간에 방송된
광덕 큰스님 추모특집 중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