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중흥사지 (重興寺址) ...
페이지 정보
작성자 불광사 작성일2007.04.14 조회7,098회 댓글0건본문
불광마하보디합창단 LT로 이루어진 북한산 대남문의 종단산행으로 중흥사지를 돌아볼 기회를 얻었다. 다시금 자료를 찾아보니 우리문화재의 한부분이 보존되어 있지 않고 이렇게 방치되어 있는 것에 마음이 아프다.. 기록을 더듬어 보면 아래와 같다.
1992년 12월 31일 경기도기념물 제136호로 지정되었으며,
북한산 노적봉(露積峰) 남쪽 산록, 장군봉과 구암봉 사이에 위치한 옛 중흥사터이다.
중흥사는 고려 초에 창건되었다는 구전(口傳)이 있으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고, 고려 말에 태고(太古) 보우국사(普愚國師)에 의해 중수(重修)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유물(遺物)로 1103년에 만든 금고(金鼓)와 1344년에 만든 향완이 남아 있어 12세기 초 이전에 이미 개창되었던 것으로 짐작 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절이 대규모 사찰로서의 면모를 갖춘 것은 조선 후기이다. 숙종은 임진왜란·병자호란의 양란을 겪은 후 도성의 방어를 위하여 외각에 대대적인 축성 사업을 일으켰다. 숙종 39년(1713) 북한산성이 완성되자 성내에 승군을 두고 성을 지키게 하였는데, 중흥사가 승군이 주둔하던 산성 내 11개 사찰을 관장하는 사찰이 되었다. 이로써 축성 당시 30여 칸의 소규모 사찰이었던 중흥사가 136칸의 대찰(大刹)로 증축되었다.
당시 승군은 왕명으로 8도 사찰에서 1년에 6차례 교대로 의승(義僧)을 뽑아 올리게 하여 11개 사찰에 주둔시켰다. 승군의 정원은 360명이고, 11개 사찰에는 각각 수승(首僧) 1인과 승장(僧將) 1인을 두었으며, 이들을 총지휘하는 본부로 승영(僧營)을 두고 승대장(僧大將) 1명을 임명하여 8도도총섭(八道都摠攝)을 겸하게 하였다. 중흥사는 도총섭이 머물던 북한산성의 승영이었다.
승영 당시에는 삼존불을 봉안한 대웅전을 중심으로 앞쪽에는 누각인 만세루(萬歲樓)와 나한전(羅漢殿)을 두었고, 동쪽에는 산신당(山神堂)이 있었다고 하며, 동구(洞口)에는 중흥동문(重興洞門)이라는 글자를 새긴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또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중요한 약재를 조련(造煉)하는 일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한다.
그 후에도 1828년에 대웅전과 만세루를 중건하는 등 사세를 계속 유지하였지만, 1894년에 화재를 만났고, 다시 1915년에 홍수를 당해 무너진 뒤 중건하지 못하고 주춧돌과 축대만 남아 있다.
북한산 능선이 이루어 주는 연꽃 형상 중심의 위치에 자리한 중흥사지를 지나 행궁터와 창고지의 유적들을 옆으로 돌아 대남문에 오르니 저 멀리 인수봉을 비롯하여 오봉 주봉 서울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우리의 중흥사지 또한 감싸안고..., 잊혀져 있던 중흥사지에 관심이 더욱 더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