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경 이해를 통해서 본 광덕 큰스님의 회통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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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광사 작성일2007.06.25 조회8,593회 댓글0건본문
동국대 김호성 교수님 홈페이지에 있는 "千手經 理解를 통해서 본 光德 큰 스님의 會通論(1)" 자료를 성웅 거사님께서 발견하시어 올리셨네요. 홈페이지 메인으로 올립니다.
千手經 理解를 통해서 본
光德 큰 스님의 會通論(1)
-동국대 김호성 교수-
『천수경』과 『반야경』의 회통
광덕은 반야바라밀을 體(체)로 삼고 보현행원을 用(용)으로 삼는 일관된 사상체계를 갖고 있으며, 기본적 소의경전으로서 『금강경』과 『보현행원품』이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두 텍스트를 광덕 스스로 더욱 肉化(육화)하여 펼쳐놓은 언어가 각기 『한마음헌장』과 『보현행자의 서원』이다. 여기에 「 法燈十課(법등십과)」·「法燈五誓(법등오서)」와 같은 결사의 淸規(청규)가 덧보태어지면 불광결사의 텍스트는 모두 구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광덕의 사상에 있어서 『천수경』의 위상은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광덕의 저술목록 중에 『천수관음경』1권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천수관음경』은 『천수경』과 『관음경』의 번역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관음신앙의 교과서이다. 이 책의 「번역하는 말」에는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다.
천수경에 이르시기를 천수다라니를 수지독송하는 그 사람은 광명장(光明藏)이며 자비장(慈悲藏)이며 내지 해탈장(解脫藏)이며 약왕장(藥王藏)이며 신통장(神通藏)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다라니를 수지하는 사람은 일체 부처님께서 지혜광명으로 감싸 비추시니 그 사람은 백천삼매가 항상 현전하여 일체 장애가 미치지 못하고 일체중생을 구호할 대비위신력을 갖춘다 하셨습니다. 그것은 이 다라니가 평등심이며 무위심(無爲心)이며 무염착심(無染着心)이며 공관심(空觀心)이며 내지 무상보리심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나라 불자 수행의 첫걸음이 천수경으로부터 시작되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이 경에서 대자비심을 배우고 무상보리심을 배우며 보살도를 닦아 일체 중생을 구호하는 큰 지혜와 힘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이 짧다면 짧은 문장 안에서 광덕은 스스로 『천수경』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躍如(약여)하게 밝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실천운동 안에 『천수경』을 정당하게 자리매김하면서 회통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불교사상사 전체를 통하여 正脈(정맥)을 확인하는 투철한 안목이 펼쳐져 있다. 이제 하나하나 짚어보기로 하자. 위의 인용은 두 문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문단 나누기 역시 무작위한 것이 아니다. 두 문단이 각기 다른 맥락,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문단은 『천수경』의 핵심/본질을 확인하는 말씀인데, 우리가 조석으로 의식에서 독송하는 바 독송용 『천수경』(=천수 지송의범)의 핵심/본질을 그 모태가 되는 원본 『천수경』으로부터 引證(인증)하고 있는 것이다. 『천수관음경』에서 포함되어 있는 『천수경』이 독송용 『천수경』이 아니라 그것의 저본이 된 원본 『천수경』이기에 그럴 수도 있다고 쉽게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원본 『천수경』 안에서도 바로 그 文章(문장)/부분을 經(경)의 眼目(안목)으로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우선, 광덕의 「번역하는 말」에서 이른 바, "천수경에 이르시기를 ----"의 말씀이 과연 원본 『천수경』 안에서 어떤 맥락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요긴한 도움을 주는 것이 科目 나누기이다. 내가 이미 제시한 바 있는 科目(과목)이지만, 논술의 편의를 위하여 다시 한 번 더 제시해 두고자 한다.
이로써 우리는 원본 『천수경』 전체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천수경』은 대비주(=천수다라니)를 설하는 경전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다라니 본문을 설하기 전에 여러 가지 이익을 말하고, 그럼으로써 독송을 요청한다. 공덕을 반복적으로 설하는 경전의 일반적 구조 역시 결과를 들어서 수행을 권하기[擧果勸修(거과근수)]위한 짜임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바는, 광덕이 인용한 바 있는 내용이 어떤 맥락 속에서 설해지고 있는가, 또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는 점이다. 첫째 단락은 다시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천수경에 이르시기를 천수다라니를 수지독송하는 그 사람은 광명장(光明藏)이며 자비장(慈悲藏)이며 내지 해탈장(解脫藏)이며 약왕장(藥王藏)이며 신통장(神通藏)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라는 부분은 대비주의 공덕②에서 설해진 내용이다. 원문의 축약 인용인데 그 전체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 다라니를 지송하는 자는, 마땅히 그 사람이 곧 佛身藏(불신장)임을 알지니 99억 항하사의 모든 부처님이 사랑하고 아끼는 바 되기 때문이다. 마땅히 그 사람이 光明身(광명신)임을 알지니, 모든 여래가 광명을 비추기 때문이다. 마땅히 그 사람이 慈悲藏(자비장)임을 알지니, 항상 다라니로써 중생을 구하기 때문이다. 마땅히 그 사람이 妙法藏(묘법장)임을 알지니, 모든 陀羅尼門(다라니문)을 두루 거두어 들이기 때문이다. 마땅히 그 사람이 禪定藏(선정장)임을 알지니, 百千三昧(백천삼매)가 언제나 現前(현전)하기 때문이다. 마땅히 그 사람이 虛空藏(허공장)임을 알지니, 언제나 空慧(공혜)로써 중생을 관찰하기 때문이다. 마땅히 그 사람이 無畏藏(무외장)임을 알지니, 용·천·선신이 언제나 護持(호지)하기 때문이다. 마땅히 그 사람이 妙語藏(묘어장)임을 알지니, 입 속의 다라니 소리가 단절됨이 없기 때문이다. 마땅히 그 사람이 常住藏(상주장)임을 알지니, 三災(삼재)의 惡劫(악겁)이 능히 무너뜨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땅히 그 사람이 解脫藏(해탈장)임을 알지니, 天魔(천마)와 外道(외도)가 능히 머물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땅히 그 사람이 藥王藏(약왕장)임을 알지니, 언제나 다라니로써 중생의 병을 치료하기 때문이다. 마땅히 그 사람이 神通藏(신통장)임을 알지니, 자재를 얻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의 공덕은 찬탄하더라도 다함이 없는 것이다.
이 十二藏(십이장) 중에서 광덕은 간략히 그 몇가지만 引證(인증)했을 뿐이지만, 도대체 어찌하여 이러한 큰 공덕을 얻게 되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천수경』 자체의 대답은, 스님이 인용한 바, "그것은 이 다라니가 평등심이며 무위심(無爲心)이며 무염착심(無染着心)이며 공관심(空觀心)이며 내지 무상보리심이기 때문"이라는 귀절에 서 찾을 수 있다.
『천수경』을 번역함에 앞서, 독자들에게 이러한 經證(경증)을 통하여 광덕이 말하고 싶어한 것은 무엇일까? "천수다라니의 본모습이 나모라 다나다라 ---운운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으로 나는 파악한다. 저 『반야심경』을 예로 들어보자. 광덕의 독창적 프로그램 --- 일찍이 부처님께서 설하셨지만 오래도록 잊혀졌던 수행법 --- 이 바로 마하반야바라밀 염송인데, 마하반야바라밀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자. 『반야심경』에서는 "반야바라밀다는 위대한 주문이며, 위대한 지혜의 주문이고, 더 이상 위없는 주문이고, 견줄 바 없는 주문이며, 모든 괴로움을 제거하는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주문이 무엇인가?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라고 하는 반야바라밀다주를 그러한 大神呪·大明呪·無上呪·無等等呪(대신주·대명주·무상주·무등등주)라고 알기 쉽다. 그러나 第一義的(제일의적)으로 볼 때, 반야바라밀은 그것이 아니다. 반야바라밀은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추어 보는"지혜 그 자체이다. 그리고 그것은 언어 이전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는 蛇足(사족)일 수도 있고, 언어 이전의 반야바라밀을 언어로써 言表(언표)해 보려는 몸짓일 수도 있다. 그런 까닭에 광덕은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가 아니라 "마하반야바라밀"을 염송하라고 일렀던 것이다.
마찬가지 논리이다. 대비주(=천수다라니)는 "나모라 다나다라 [----]"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모라 다나다라 [----]"가 아니다. 이것을 말하기 위해서 반야바라밀을 설한 뒤에 반야바라밀다주를 설하는 『반야심경』과는 순서가 틀리지만, 원본 『천수경』에서는 언어·문자에 의한 대비주를 설한 뒤에 바로 다시 "무엇이 대비주인가?"를 묻고 있다. 내가 본질이라 옮긴 것은 원문에서는 相貌(상모)라고 하였다. 상모는 모습이다. 즉 "대비주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그 부분이다. 그 답은 언어문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광덕이 축약하여 옮긴 그 부분을 내가 온전히 번역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크게 자비로운 마음이 이것이며, 평등한 마음이 이것이고, 함이 없는 마음이 이것이며, 염착(染着)이 없는 마음이 이것이고, 공(空)이라 관찰하는 마음이 이것이며, 공경하는 마음이 이것이고, 낮추는 마음이 이것이며, 어지럽지 않는 마음이 이것이고,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 이것이며, 위없는 보리의 마음이 이것이다. 마땅히 이와같은 마음들이 곧 다라니의 본질[相貌(상모)]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대비주(=천수다라니)를 언어문자가 아니라 그것 이전에 있는, 그것 너머에 있는 우리의 본래 청정한 마음으로 보게 될 때 다라니는 이미 다라니가 아니게 된다. 천수다라니를 지송하는 일은 "나모라 다나 다라 [----]" 이전에 있는 일이 된다. 그리고 그것을 염송하는 일은, 그것은 참구하는 일은 반야바라밀이 되고 禪이 된다. 어찌 『천수경』과 『반야경』이 다를 수 있겠는가. 『천수경』과 『반야경』 공히 관세음보살의 경전이기 때문이다. 광덕은 그 점을 이렇게 분명히 하고 있다.
일체에 걸림없고 일체에 때묻지 않은 無碍 自在(무애 자재)의 세계는 반야바라밀다가 드러내보인 진리실상의 경계다. 이러한 대해탈의 도는 어떤 공간에 설치한 거대한 그림이거나, 아니면 신비한 사상이거나 놀라운 교법체계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관세음보살이 직접쓰고 있는 구체적인 실지다.
다시 말하면, 무애·무구가 관세음보살에 있어서 주체적이며 능동적으로 구사되고, 그러할 때 관세음보살은 원만자재라는 절대적 완전을 장악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관세음보살의 본래면목과 그 위덕을 말하는 것이며, 동시에 일체중생의 본래 면목과 그가 지니고 있는 공덕과 능력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제 불광결사에 있어서 『천수경』을 지송하는 일은 곧 반야경을 지송하는 일과 다름이 아니게 되고, 대비주 지송은 곧 마하반야바라밀과 다름이 아니게 된다. 비록 현실적으로 후자가 더욱 긴요한 방편이긴 하였으나, 전자를 아우르고 있다는 데에서 우리는 圓融家風(원융가풍)을 확인하게 된다. 광덕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이 반야바라밀 한 법에 도달하지 않으면 잘못됩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관세음보살도 염하고, 지장보살도 염하고, 아미타불도 염했습니다만, 관세음보살을 염하다 보면 지장보살에게 소홀한 것 같고, 지장보살을 염하다보면 아미타불에게 소홀한 것같이 느끼고 했습니다. 이런 느낌이 나는 것은 법(法)이 일체제불의 근본이라는 생각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반야바라밀이 근본불이요, 세존인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원융의 가르침과 실천법은 이미 경전 자체가 증거하고 있는 바이지만 오래도록 沒却(몰각)되어 왔다. 그러한 허물은 敎判論的(교판론적) 사고로부터 기인하는 바 컸음을 확인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그같은 오류는 대장경의 분류체계 속에서 우리가 갇혀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바 적지 않다는 것이다. 대장경의 분류 체계 속에 『천수경』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 다라니를 설하는 것이 목적인 경전이므로 密敎部(밀교부) 속에 존재하게 된다. 그러한 현실적 작업을 우리는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밀교 그 자체 안에서 다시 세부적으로 雜密(잡밀)과 純密(순밀)로 나누게 될 때, 『천수경』은 자신의 호적을 잡밀 속에 두게 된다. 잡밀, 잡다한 모든 것을 다 빨아들이는 블랙 홀처럼 이것저것 다 받아들이는 밀교! 『천수경』은 오랜동안 이렇게 평가받아왔다. 그래서 누구는 『천수경』을 祈福(기복)이라 貶稱(폄칭)하기도 했고, 누구는 『천수경』을 "읽지 말라" 감히 말하기도 했다. 이런 현실 속에서 광덕의 회통론적 관점은 『천수경』을 되살려내고 있는 것이다. 현상/겉이 아니라 본질/속을 보았기 때문이리라.
출처는 김호성 교수님의 홈페이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