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핵심은 연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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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광사 작성일2007.08.01 조회9,199회 댓글0건본문
다른 가르침과 가장 구별되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은 바로 연기법입니다. 물론 자비라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비는 연기법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실천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불교에서는 연기법에 대한 이해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뿌연 연기 속에 헤매는 것처럼 연기(緣起法)을 이해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경전 곳곳에서는 다음과 같이 강조합니다.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 『중아함경』30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부처님을 본다.” 『도간경』
물론 일반적으로 연기(緣起)를 글자 그대로 ‘서로 인연(因緣)하여 일어나는 것’이라든가 ‘다른 것과 관계를 맺어 일어나느 것’이라든가 ‘연(緣)하여 겷바하여 일어나는 것’이라고 풀이합니다. 이러한 풀이 아래 ‘세상만물은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고 서로 관계하여 존재하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면서 예를 듭니다. ‘물은 산소와 수소로 이루어져 있고, 지금 먹는 이 한 톨의 쌀에도 모든 인연들이 모여 있다. 결코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다 상호 관계 속에 존재한다. 이것이 연기의 가르침이다.’
더 나아가 연기법을 사회 관계성으로 응용하여 설명해주기도 합니다. ‘내가 있으니 네가 있고, 네가 있으니 내가 있다. 자연이 있으니 사람이 있으니 자연이 있다. 서로 관계하여 존재한다. 이것이 연기법이다.’
이처럼 예를 들어가면서 연기법을 쉽게 설명해줍니다. 이러한 설명을 들었을 때 우리는 별 반성없이 ‘와! 연기법은 위대한 것이다. 맞아! 세상은 결코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어. 서로 관계 지어져 있어. 역시 부처님 가르침은 탁월해!“하며 감탄합니다.
그런데 그 감탄하는 이유를 살펴보면 이런 배경이 작용합니다. 첫째, 너무도 당연한 것인데 본인이 잠시 생각하지 않고 있던 것을 상기시켜주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지금 우리의 삶이 너무도 개인주의이고 이기주의이기에 ‘서로 관계하여 존재한다’는 말이 너무도 크게 와 닿기 때문입니다.
셋째, 지금 현대과학으로 밝혀진 내용들이 서로 관계성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세상 모든 학문을 포함하며 또한 고리타분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등등 여타의 이유 때문에 연기법에 대한 앞의 설명에 감탄하여 부처님을 칭송합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연기법의 핵심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쯤에서 찬찬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단 사고 진행을 위해 연기(緣起)라는 뜻은 ‘서로 관계하여 일어난다’라는 정도로 이해하고 시작합시다. 그리고 ‘세상 만물은 서로 관계하여 존재하며 결코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것도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앞의 설명만으로 연기법을 이해했다고 하기에는 무리입니다. 이렇게 단순한 것이라면 경전에서 그렇게 연기법을 찬탄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서로 관계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렇게 관계하여 일어나는 것이 무엇인지’가 열쇠입니다.
만약 ‘서로 관계’라는 말이 앞서 설명한 ‘산소와 수소의 관계’, ‘너와 나의 관계’, ‘자연과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면 굳이 불교이어야 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그러한 관계성은 훌륭한 과학자, 사회학자, 생태학자가 오히려 더 잘 아는 사실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부처님처럼 마음의 평온(해탈)을 얻은 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이렇게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분야만 알지만, 부처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부처님은 위대한 과학자이자 사회학자이자 생태학자입니다.’ 이 반문에 대해서는 차후에 논의하고자 합니다. 이 반문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불교 공부는 마음 공부입니다. 따라서 연기법도 바깥 세계의 관계성이 중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마음 작용에 대한 관계성에 중심을 둔다고 봅니다. 우선 다른 이의 글을 통해 필자의 주장을 대신하며 다음 호에 논의를 이어가고자 합니다.
“일반적으로 외계의 자연 현상에 관계되는 연기를 외연기(外緣起)라고 부르고, 내계의 정신 현상에 관한 가치적 연기를 내연기(內緣起)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렇지만 외연기는 주로 복잡한 내연기를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 비유적으로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경우에 쓰여진 것이며, 연기가 말해진 본래의 목적은 내연기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원시불교』(水野弘元저, 金鉉역, 도서출판 벽호, 1993, 101쪽)
이 글은 월간 불광 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월간 불광을 많이 구독해 주세요.(구독문의: 불광출판 420-3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