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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연구원 두 번째 토론회 “광덕 스님의 인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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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광사 작성일2010.08.18 조회21,67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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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연구원 두 번째 토론회 “광덕 스님의 인간관”

 

 8월 14일, 주중이고 비가 오는 와중에도 200여명의 불자님들이 교육원으로 모였습니다. 당초에 4~50명을 예상해서 교육원 2층 강의실로 예정했다가 장소도 급히 옮겼습니다. 광덕 스님 학술연찬회가 두 번째 진행되었습니다. 혹시 참석하지 못하신 분은 불광자료실에 자료를 올려놓을 예정이나 다운받으세요.

  능력이 되는 대로 학술연찬회의 진행과 쟁점을 홈페이지에 올리고자 합니다. 이런 것이 항상 부담되는 일입니다만, 한번 진행해 볼까 합니다. 광덕 스님의 사상을 선양하는 길은 광덕 스님이 던진 문제 의식이 당시에, 혹은 오늘날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확인하는 길이고 그것은 스님의 문제의식이 불교의 큰흐름에  문제의식과 어떻게 함께 하는가, 혹은 차별화하는가의 문제로 보기 때문입니다. 매 연찬회마다 발제자의 의견과 토론중에 제기된 문제를 중심으로 글을 만들어 볼까 합니다. 혹시 부족한 부분이 있거나 제가 잘못 이해한 부분은 댓글로 상냥히(?)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토론회의 주제는 불성(佛性) 문제였습니다. 석길암 선생님 발제의 주된 논점도 광덕 스님의 불성관이 종래의 한국불교 전통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확인하는 글이었고, 목경찬 선생님 역시 광덕스님이 주창하신 무한생명을 불성론으로 이해하셨습니다. 그리고 토론 중간에 제기된 절대, 무한이라는 단어가 가진 위험성에 대한 지적 역시 불성을 둘러싼 논쟁이었습니다. 발표자들의 발제 중 문제를 정리하고 토론 내용을 쟁점화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석길암 - 광덕 스님의 인간관

 

 

 석길암 선생님은 불성론에 대하여 인도적 전통, 동아시아적 전통을 비교하면서 광덕스님의 불성론이 일단 동아시아적 전통에 입각해 있다고 보았습니다. 석길암 선생님이 말씀하신 동아시아적 전통은 불성론을 인중유과론(因中有果論)의 대척점에 놓고 전했습니다. 광덕스님의 불성론이「‘중생이 어떻게 부처가 되는가’라는 물음에 중생에게 이미 부처가 될 씨앗, 원인, 가능성이 있기에 닦고 닦으면 부처가 된다」라는 인중유과론적 이해는 아니다라는 말씀이죠.

불성론의 동아시아적 전통은 ‘모든 중생이 이미 부처다’라는 시각의 전환입니다. 중생의 관점에서 불성 혹은 여래장과 부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부처의 관점에서 불성 혹은 여래장과 중생을 바라보는 시각의 전환을 이야기합니다.

  일단, 광덕 스님은 이러한 동아시아적 전통에 입각해 있음을 논증합니다. 그리고 광덕 스님의 불성 해석에 있어 독특한 점을 불성이 불성 그대로 읽혀지지 않고, 불성을 ‘불성인간’, ‘불성자’, ‘거룩한 님’으로 표현하는 점에 있음을 지적합니다. 즉, 광덕스님은 일체중생에게서 중생성을 보시지 않고, 중생을 대하되 중생이 아닌 ‘거룩한 님’으로 표현한 예에서 보듯이 지극한 인간 예경, 인간 존중으로 불성을 이해한다는 점입니다. 광덕스님의 불성관은 ‘모든 인간에게서 부처될 성품, 혹은 부처로서의 성품을 발견한다’라는 일반적 이해가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서 부처님을 발견하고 예경한다’라는 확장된 해석이라는 점을 논문의 전편에 걸쳐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같은 가치를 표현하는 여러 단어들을 사용하신 것 아닌가 하는 문제를 던졌습니다.

 

  목경찬 - 무한생명사상

 

 

“꿈속에 있을 때는 꿈이 너라고 하자. 생각이 있을 때는 생각이 너라고 하자. 꿈도 없고 생각도 없을 때, 너는 뭐냐 가져와 봐라.”

  목경찬 선생님은 광덕 스님이 동산 스님으로부터 받은 질문으로부터 글을 시작합니다. 목경찬 선생님은 “꿈도 없고 생각도 없는” 그 자리를 불교에서는 불성(佛性)이라 말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데, 원효스님은 《대승기신론》을 풀이하면서 이 자리를 ‘대승’이라 표현하셨고, 광덕 스님 역시 생각도 없고 꿈도 없는 때의 본래면목을 “말과 이론 이전에 너의 생명 자체, 참으로 있는 것, 궁극적인 너의 생명을 생명이라고 하고 있는 그 물건”으로 또는 ‘마하반야바라밀’로, ‘무한생명’, ‘불광’, ‘무량공덕생명’, ‘부처님 생명’으로 표현하였다고 말합니다.

  이 생명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말하고 현상적으로 보는 그 생명, 모태에 수태할 때에 시작하고 육체의 죽음으로 끝나는 육신 생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멸이 없는 생명’인 이미 갖추어진 무량 공덕 생명을 일컫는다고 해석하였습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자각과 실천이 이루어집니다. 광덕스님의 수행과 실천은 ‘본래 갖추어진 생명은 그냥 쓰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구김없이 내어 쓰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 내어 쓰는 길이 ‘보현행원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토론 - 최원섭, 김영진. 김호성

 

                (사진 왼쪽부터 최원섭, 석길암, 김영진, 목경찬, 김호성 선생님)

 

 최원섭 선생님은 발제자들이 강조한 광덕 스님의 불성론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불성론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즉 ‘광덕 스님의 독특성이 뭐냐?’라고 질문하셨네요. 그러면서 광덕 스님이 사용한 ‘불성인간’, ‘불성자’, ‘거룩한 님’, ‘인간 예경’ 등 특징적이고 독특한 용어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광덕 스님의 불성사상과 인간관을 드러내야 하는 것 아니냐라는 지적을 해주셨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토론의 대상이었던 석길암 선생님은 큰 틀에서 수긍하신 것으로 기억되네요.

  본격적인 쟁점 토론은 김영진 선생님의 질의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여러 것을 질의 했는데 쟁점은 세 번째 질문으로 모아졌습니다. 나머지 문제는 이 세 번째 토론에 집중된다는 점에 토론자 모두가 암묵적 동의(?)를 했습니다.

 

  김영진 선생님 : 광덕 스님의 무한생명 사상관련 글은 생명에 대한 절대성을 강조하는 글이 많다. 이런 점들은 생명의 수평성이 드러나지 않아 보인다. “궁극적 생명은 연기법에 해당되는가, 되지 않는가? 연기법에 해당된다면 그것은 유한한가, 무한한가?”

  김영진 성생님은 이러한 질문의 연속성 상에서 무한생명이 절대를 의미한다면, 절대자를 상정하는 일종의 관념론으로 치다를 가능성, 그리고 그것이 종국에는 일본과 같은 천황존중사상, 혹은 정치적이지는 않지만 절대성의 논리로 귀속될 가능성을 지적하였습니다.

  김호성 선생님은 몇해전 광덕 스님과 관련된 논문 두편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광덕스님의 사상적 지평, 그리고 발제자들의 불성론에 대한 이해에 큰틀에 이해를 같이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중요 쟁점에 대한 토론을 이끌어 내셨습니다. 유한과 무한의 문제에서 불교, 혹은 광덕스님의 무한은 유한과 무한의 대립적 무한이 아닌, 유한과 무한을 포섭하는 무한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쟁점은 이 곳이 아니었습니다. 즉, 김호성 선생님은 무한, 절대의 해석에 대하여 백장선사들의 화두를 끄내어 토론에 생명을 불어넣었습니다.

  다 아시죠? 요점만 정리하면 백장선사에게 어느 날 (예전에 그 절의 주지였지만 지금은 여우가 된) 노인이 찾아와 “도인은 인과에 떨어집니까? 안 떨어집니까?”라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예전에 그 노인은 그 대답에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不落因果)”라 하여 오백세에 걸쳐 여우의 몸으로 태어나게 되었다 합니다. 거기에 대하여 백장선사의 대답은 “인과에 어둡지 않다(不昧因果)”라 하여 여우의 몸이 된 노인을 구했다는 설화같은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김호성 선생님은 ‘여기서 여우가 될 목경찬 선생님을 구했다’라는 좀 자극적인 표현을 하셨죠. 여기에 대하여 목경찬 선생님은 “불교에서 절대, 무한, 본래면목 등으로 표현되는 무위법(無爲法)은 (유위법과 같은) 연기가 아니다”라고 단언하셨고 그것을 성유식론의 어느 구절을 빌어서 말씀하셨습니다.(죄송합니다. 제가 성유식론을 읽은 바 없어서 인용하지 못하겠습니다. 단, 목경찬 선생님의 이 같은 이야기는 월간 불광에 연재하는 글에 목선생님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있습니다. 나중에 제가 확인해서 링크를 걸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문제인지, 이 문제가 왜 이렇게 중요한지를 정리하긴 힘듭니다. 제 생각에 이 문제는 단지 광덕 스님의 사상에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철학이 시작된 이래, 혹은 부처님이 연기법을 말하신 이래 지속되어 온 문제가 학술연찬회 첫째 토론부터 쟁점이 되어버렸습니다. 절대, 無, 무한 등 여러 언어로 표현되는 그 자리와 현상계에 대한 관계.... 우리 보고 조금 더 공부하란 이야기 같죠? 왜 이런 문제가 중요한지를 알아나가는 재미도 솔솔할 듯 합니다.

 

  어쨌든, 이 문제는 토론 쌍방간에 합의점 없이 종료되었습니다. (사실, 종료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문제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문제로부터 파생되는 또 하나의 쟁점이 있었습니다. 쟁점화되지는 못했지만 간간히 나온 문제입니다. 앞서 논쟁된 절대, 무한 등의 논리가 자칫 절대자의 논리로 귀결될 가능성입니다. 토론회 중간에 잠시 언급된 일본 교토학파에 대한 토론회 참가자들의 공통된 지적이 이 문제입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식민지였던 시절에 절대, 무한, 무 등의 단어들이 어떻게 제국주의 논리, 전쟁의 논리로 귀결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우려 속에서 제기된 문제입니다.

  최원섭 선생님께서 지적해주셨는데요, 성철스님이나 광덕 스님, 그리고 현대의 고승들이 절대, 무한 등의 단어를 사용하였다고,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한국불교 전통의 흐름과 맥을 같이하는데 이것을 제국의 논리, 혹은 정치적 논리로 비약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느냐는 지적입니다. 여기에 김영진 성생님은 (죄송합니다. 요 답변 중에 진행 문제로 제가 잠깐 나갔다 왔습니다. 그래서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지 못한 점 죄송합니다.) 이러한 문제들이 여전히 한국불교계에 스님들의 법문이나 학술적인 글들에서 남아 있는 문제가 아닌가라는 지적을 하셨습니다.

  토론회가 (관용적 표현이 아니라) 진짜 재미있었습니다. 알아두어야 할, 혹은 배워야할 단어와 이론 전개가 폭포수같이 흘러나온 토론회였습니다. 가끔은 책으로 읽는 것, 법문이나 강의를 듣는 것보다 토론 중에 쟁점이 무엇인가를 알아가는 것이 공부를 재촉하는 길이 되기도 하는 데 이번 토론회가 딱 그에 맞는 토론회일 듯합니다.

다음을 기대하기에 충분한 토론회였습니다.

   

추신

  다음 토론회는 9월 11일(토) 오후 2시에 진행됩니다. 주제는 광덕 스님의 정토·염불관(김영진 발제), 보현행원 사상(최원섭 발제)입니다. 보현행원하면 광덕 스님을 떠 올릴 정도로 인연이 깊은 맥락입니다. 사실 8월 토론회에서도 행원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습니다. 중생들은 깨닫기 위해서, 혹은 진리를 위해서, 이익을 위해서 여러 실천을 하는데 부처의 행은 어떠한 의미인가에 대한 질문을 해나가는 자리가 될 듯합니다. 하루에도 ‘왜 살지?’라는 질문을 여러 번 던지는데, 도인들은 어떨까요?

  두 번째 광덕스님의 정토 염불관은 아마 이런 류의 주제 발표는 거의 없었던 것같습니다. 불광사는 ‘마하반야바라밀’ 염송을 하는데 다른 사찰과 다르다는 말씀을 많이 들으셨을 줄 압니다. 개인적으로도 화엄, 선, 반야사상을 자신의 사상적 맥락으로 잡으셨던 광덕 스님께서 수행법으로 염송을 한다는 것도 좀 의문이었고, 그 염송이 굳이 마하반야바라밀인지에 대한 탐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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