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2556년 3월 셋째주 일요법회 봉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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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광사 작성일2012.03.20 조회27,057회 댓글0건본문
불기 2556년 3월 18일 일요법회를 봉행하였습니다.
"일요법회에 함께 하신 불광형제들의 가정에 불보살님의 무량공덕이 충만하길
기도합니다. 이제 봄이 다 왔지요 ?" 라며 언제나 밝고 맑은 모습으로 찾아주시는
각화사 주지 혜담스님의 법문이 있었습니다.
본래청정인 반야바라밀은 삼세(三世)의 불모(佛母)다
"과거 일곱부처님이, 헤아릴수없이 많은 부처님이 하신 말씀은 일체의 악함을 짓지 말고
온갖 선함을 받들어 행하여 스스로 그 마음을 맑힘이 바로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라고
하였는데 삼척동자도 다 아는 말이지만 실천은 여든노인도 어려운 것이다. 전등록의 가르침을
전하며 선악을 넘어선 근본을 밝히는 것이 종교이고 부처님 가르침이다.
스스로 그 마음을 맑힌다(自淨基義)는 것은 더러워진것을 깨끗히 한다는 개념도 있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본래 청정하여 본래 맑아서 더럽고 깨끗함을 넘어선 자리이다.
세상에 그런 마음이 어디있을까? 의문이 생길수 있다.
본래 청정한 마음이 있다. 선악을 떠난 마음, 더럽고 깨끗하고를 떠난 마음, 현상를 넘어선
피안의 마음자리 그것이 반야바라밀이다. 그 본래마음(반야바라밀)을 꺼내어 쓰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是諸佛敎)이다.
이 본래 청정한 마음이 바로 반야바라밀인데 왜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라 했는가?
반야바라밀을 행함으로 반야바라밀을 염송함으로 부처님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어머니(佛母)는 현재 남자다 여자다 하는 현상을 넘어 반야바라밀의 세계로
모든것이 생성 발전하고 풍요와 영속성과 창조의 힘이 있는 것이다.
왜 마하반야바라밀은 염송하는가?
생명의 근본인 본래청정함을 맑혀서 내가 부처가 되는 것이다.
무엇을 구하기 위해 장애를 소멸시키기 위해 염송도 하겠지만
반야바라밀을 이루기 위해 성취하기 위해 마하반야바라밀을 염송하는 것이다.
반야바라밀에 눈을 떠서 행복하고 자유로운 본래청정한 삶을 찾으시길" (법문요약)
바란다며 항상 따뜻한 미소로 축원하며 설법을 마쳤습니다.
(...가지런히 합장한 손에서, 발에서 정성을 다하는 진실한 당신의 마음이 보이고..()
우리는 횃불이라는 각각등보체가 모여 법등을 이루고 법의 등불은 영원할것입니다...!)
(간추린) 법회소식
* 3월 22일(금) 초하루 법회 오전 10시 30분 보광당
* 3월 24일(토) 중창불사원만성취 1080배 정진 저녁 7시 보광당
* 3월 31일 불광연구원 학술연찬회 토요일 오후 2시~6시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조계사)
주제 : 북한산성과 호국도량 북한산 중흥사의 재조명 (당일 1시 불광버스 출발 예정)
* 불광아카데미에서 마련한 강좌 수강생 모집 중 : 불광교육원 문의 및 접수 (417-2551)
본래청정인 반야바라밀은 삼세(三世)의 불모(佛母)다
칠불통계게(七佛通誡偈)라는 부처님의 말씀이 있다. ‘일체의 악함을 짓지 말고 온갖 선함을 받들어 행하여 스스로 그 마음을 맑힘이 바로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義 是諸佛敎)’라는 내용이다. 칠불이란 과거의 일곱 부처님을 이르는 말로서, 이 속에 석가모니 부처님은 스스로 도달한 정각의 경지가 자기만이 처음으로 얻은 것이 아니고, 과거에 출세하신 모든 부처님도 자신이 얻은 것과 같은 정각의 진실을 얻었다고 하는 신념을 가지고 계셨음을 피력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가운데 ‘스스로 그 마음을 맑힘’이란 무엇일까? 이 말을 일반적으로는 ‘사람의 마음은 본래는 깨끗한 것이지만, 그것이 번뇌로 인하여 더럽혀져 있기 때문에 그 더러움을 맑히고 털어서 맑혀지면 마음은 청정해 진다’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본래 청정한 마음이 더럽혀질 수는 없다. 왜냐하면 본성은 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본성 속에 청정과 더러움이 같이 있어서 더러움을 제거한 후에 청정이 드러난다면 그것은 본래청정이 아니다. 이렇게 보면 스스로 그 마음을 맑힌다는 말은 생각이나 현상계 저 너머의 마음이고, 그 저 너머 것을 그대로 내어 쓴다는 의미가 된다.
이 본래 청정한 마음이 바로 반야바라밀인데, 문상품 제49에는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다. 반야바라밀은 능히 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까닭에 부처님은 이 법에 의지하여
행하고, 이 법을 공양․공경․존중․찬탄하신다. 무엇을 이 법이라고 하는가? 소위 반야바라밀이다. 모든 부처님은 반야바라밀에 의지하여 머물고, 이 반야바라밀을 공양․공경․존중․찬탄하신다. 왜냐하면 이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님을 출생시키기 때문이다.”라고 설하고 있다. 그리고 노자는 이 청정한 마음을 『도덕경』제6장에서 “신이 죽지 않는 계곡(谷神不死)이다. 이것을 일컬어 현묘한 암컷(玄牝)이라 한다”라 설하고 있다. 모두가 부처님의 다른 표현인데, 때문에 법칭품 제37에서는 “마땅히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한다. 반야바라밀이 바로 부처님이다. 반야바라밀은 부처님과 다르지 않고 부처님은 반야바라밀과 다르지 않다.”라고 설시하고 있다.
‘반야바라밀이 부처님이다’라는 여기에서 반야바라밀은 비로소 <반야경>에서 설하는 최초의 일보를 내딛게 된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이 그 자체 이외에 무엇인가 목적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 반야바라밀은 또한 반야바라밀이 아니기 때문이고, 순수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야바라밀이 부처님이라는 것에 의해서 비로소 본래의 목적에 돌아가는 것이 된다. 반야바라밀은 형상이 없고 모양이 없다. 그것은 말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다. 소위 언어가 미치지 못하는 절대의 자리다. 이 절대의 자리를 우리들은 마하반야바라밀 염송이라는 작용을 통하여 본체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법회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