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58년 3월 둘째주 일요법회. 글강경이야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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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광사 작성일2014.03.12 조회32,237회 댓글0건본문
금강경 이야기, 세 번째
조계종 총무원 기획실장 일감스님
불광법회는 전법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전법오서를 생활화하고 있는 사찰입니다. 전법을 하는 사람은 개인의 자존심이나 편안함에 앞서 늘 법을 전해야 겠다고 생각하며, 전법을 가장 중요한 수행으로 생각하고 기회가 되면 법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법회시에 앞자리에서 법문을 듣고 경전공부도 적극적으로 하게 됩니다.
요즘사회가 어려워서 자살을 하는 경우 있는데 자살은 절대 안 됩니다. 자살의 충동이 생길때 내가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자식을 생각하고, 이 위기를 이기면 자식은 잘 될 수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자살은 자식에게 큰 상처로 남게 되고 집안에 오랫동안 상처로 남고 후손에게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일일일희야 만사만생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하루사이에 만 번 태어나고 만 번 죽는다고 하는데, 태어날 때도 고통스럽지만 죽을 때도 고통스럽습니다. 우리가 죽어 몸이 흩어질 때 그 충격은 엄청나며, 충격적으로 돌아가시면 마치 악몽을 계속 꾸는 것과 같이 반복적으로 경험하므로 만 번 죽는 것과 같게 되고, 죽어서도 엄청난 고통이 계속됩니다.
실제 자살을 하는 자는 정말 죽고 싶어서 죽는 것이 아니고, 역설적으로 살고 싶어서 죽는 것이며 고통을 모면하려고 죽음을 선택할 뿐입니다. 수면제를 먹고 죽는 경우도 편안히 죽을 것 같지만 실제 발버둥을 치면서 죽는다고 합니다. 우리 뇌는 정지되었어도 무의식은 죽지 않고 살고 싶어 발버둥을 치게되고 죽음으로 모든것이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사회는 자살이라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요즈음은 유명인을 따라서 자살하기도 하고 어려운 사람이 자살하는 것을 보고 유행처럼 자살을 하기도 하는데, 삶이 귀하고 어렵게 형성된 것임을 알고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남의 목숨을 끊지 않는 것이 불교의 가장 교의인데 더구나 불자가 자기의 목숨을 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제4분 묘행은 머묾이 없음(妙行無住分)
“그리고 또 수보리야, 수행하는 사람은 마땅히 보시를 행함에 어느 것 하나에 집착함 없이 보시를 할지니, 이른바 모양에 머물지 말며, 소리에 머물지 말며, 향기에 머물지 말며, 맛에 머물지 말며, 감촉에 머물지 말며, 뜻에 머물지 말고, 보시를 하여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당연히 이와 같이 보시하여 모양(相)에 머물지 않느니라. 어째서 그러한가? 만약 수행자가 모양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생각으로 헤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쪽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못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남서북방과 사유(四維)와 상하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못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보살의 모양(相)에 머무름이 없는 보시의 복덕도 또한 이와 같아서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자못 마땅히 가르친 바와 같이 머물지니라.”
2분은 수행하는 사람은 마음을 어떻게 항복받고 머물러야 하는가를 질문하였으며, 3분은 부처님이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하고서 어째서 제도받은 중생이 없다고 했는지를 질문하고, 제도했다고 하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한 것이 된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은 손자가 할머니에게 마음을 편안하게 해달라고 했을 때 할머니가 손자의 마음을 일시적으로 편안할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혼자만 편하다고 정말 편한할 수 있는가? 어제 마음이 편해도 오늘 마음이 편하지 않을 수 있고, 엄마 마음이 편치 않으면 손주 마음이 편하지 않고, 형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내 마음이 편하지 않고, 친구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내 마음도 편하지 않습니다.
또 우리 마음은 크기로는 우주를 담고도 남고, 작기로는 바늘 끝에도 서지 못하고, 밝기로는 태양보다 밝고, 어둡기로는 칠흑보다 어둡고, 빠르기로는 빛보다도 빠르고, 느리기로는 출발한 적도 없는 영원을 본래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알기만 하면 영원한 생명이 있는 줄 알아서 마음의 대 평화와 대 자비가 있게 됩니다.
이 마음이 있더라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나와 관계있는 사람이 불편하다면 내가 불편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은 내 하나의 마음이 아니고, 우리의 삶은 나와 관계 맺는 것에서 생기고, 내가 먹는 것에서 생기고, 숨 쉬고 보이는 생기고 내가 딛고 있는 땅에서 생기고 이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사람이 불편하면 나도 불편하고 일체와 뗄래야 뗄 수 없도록 연결되어 있고, 일체중생이 그물코처럼 연결되어 있기에 일체중생을 제도하고 일체 번뇌를 끊으리라는 사홍서원을 발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체중생이 연결되어 있음을 아는 사람은 저절로 사홍서원을 발원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나만 나라고 생각하거나 나라는 사람이 독립된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깨달은 사람이 아니며, 깨달은 자는 나와 남을 동시적으로 생각하고 남을 남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공기가 나를 이루고 있고 된장국이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내가 새이기도 하고 너가 내가 되기도 하며, 일체만물이 나라는 생각을 해서 옛선사는 동쪽산이 물위로 간다고 말씀하시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는 나만을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하고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3분에서 일체중생을 제도하나 제도된 중생 없다고 한 것은 관계 속에서 있기 때문에 한 중생도 제도되지 않으면 제도된 중생이 한 사람도 없다고 한 것입니다.
4분에서는 부처님 머물지 않는 보시를 말씀하셨습니다. 보시는 물질로, 봉사하는 행위로, 보기만 하면 마음이 편해지고 좋아지게 되는 무외시 보시가 있는데 어느 보시나 모두 중요하나 불광불자는 무외시 보시는 항상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보시를 하되 색에 머무르는 보시를 하면 안 됩니다. 색에 머무르는 보시라는 말은 외모나 형상을 보고 보시하는 것인데, 어떻게 살아가는 지를 보지 않고 외모(상)만 보고 보시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부족함이 있습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모양에 머물러서 보시하게 되는데, 형상은 영원하지 않고, 고정되어 있지 않고 흘러가는 것임을 이해하고, 형상은 항상 변하는 것이고 조건에 의해 이루어진 결과라는 것을 알고 보시하라는 것입니다. 형상에 의해 보시의 마음이 일어났더라도 이를 이해하고 보시해야 하다는 것이다.
소리 맛 감촉 등도 언제든지 인연 따라 생기기도 하고 사라지며, 법에 의해 생겨나는 좋은 마음도 인연 따라 생기고 사라지기도 합니다. 부처님은 머물러 보시하면 그 만큼의 복만 받지만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자는 그 복이 한량이 없음을 설하고 계십니다.
제5분 바른 도리를 실답게 봄(如理實見分)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는 겉의 몸으로 여래를 볼 수 있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바깥의 신체모양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신체는 신체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셨다.
“무릇 존재하는 겉으로 드러난 모든 모양은 모양만이 아니므로, 모양이 모양만이 아님을 안다면 여래를 보는 것이니라.”(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 非相 卽見如來)
5분에서 부처님은 사물을 볼 때 이치에 맞게 봐야 합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모습을 보고 부처님이라고 생각하고, 32상 80종호로 성스럽게 조성하여 불상 앞에서 예경하지만, 그 몸만을 보고 예경하는 것은 머물러서 생각하는 것이며, 형상의 집착하게 되면 하나의 고정된 실체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다 허망하다는 말의 의미를 되새겨 봅시다. 우리가 사는 것이 다 허망한 것입니까? 효도하는 것이 다 허망하기만 한 것입니까?
구마라습존자가 금강경을 한문으로 번역할 때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모두 허망하다고 한 것은 금강경을 금강경이라고 한 것은 금강경이 아니고, 하나를 하나라고 보는 것은 잘못된 견해라고 한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허망하다는 단어는 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의미인데 실제세상에 보이는 모든 것은 허망한 것처럼 보인지만 가치가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죽는 순간까지도 가치없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죽음까지도 배울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허망한 것이 있어야 새로운 일을 할 수 있고 내일을 대비하게 됩니다다만 그것을 보는 우리의 마음이 그것을 고정되어 있는 것으로 알 때 일어나는 감각에 속아 온갖 망상을 일으키고 집착하기에 실상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항상 변하는 것이고 집착할 바가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여래를 보는 것이며 부처님의 바른 법을 아는 것 입니다.
미운사람도 이쁜 짓을 하면 이쁜 사람으로 바뀔 수 있듯이 우리의 삶도 우리의 마음도 이렇게 항상 변하는 것이다.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변하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더 나아지도록 노력해서 바꿀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도 고정되어있지 않으므로 가난에서 풍요를 이루고, 고통에서 평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고정되어 있지 않고 조건에 의해서 바뀌는 것이기에 우리는 좋아지도록 노력하고 더 나은 미래가 있게 됩니다.
사회가 어렵고 힘들수록 우리 불자가 우리사회를 밝힐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제6분 바른 믿음은 희유하다(正信希有分)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어떤 중생이 이와 같은 말씀을 듣고 진실로 믿는 자가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셨다.
“그런 말을 하지마라. 여래가 멸도에 든 후 오백세에 이르더라도 계(戒)를 지키고 복을 닦는 자들이 이런 말씀에 신심을 내며 이런 가르침으로 진실다움을 삼으리라. 마땅히 알라. 이런 사람들은 한 부처님이나 두 부처님 또는 삼사 오불에게 선근을 심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한량없는 천만 불께 모든 선근을 심었으므로 이런 말씀을 듣고 일념으로 깨끗한 믿음을 내는 자들이니라.”
“수보리야, 여래는 이런 모든 중생들이 이와 같이 한량없는 복덕을 얻는 것을 다 알며 다 보느니라. 어찌한 까닭이냐? 이러한 모든 중생들은 아상이 없으며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으며, 법상도 없으며, 법 아닌 상도 없기 때문이니라.
어찌한 까닭이냐? 모든 중생들이 만약 마음에 상을 취하면 곧 아상과 인상과 중생상과 수자상에 착함이 되며, 법상을 취하더라도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함이 되느니라. 어찌한 까닭이냐? 만약 법 아닌 상을 취하더라도 이는 곧 아상과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함이 되느니라. 이런 까닭으로 마땅히 법을 취하지 말아야 하며 마땅히 법 아님도 취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이러 한 뜻으로 여래는 항상 말하되, 너희들 비구는 나의 설법을 뗏목으로 비유한 바와 같다고 아는 자는, 법도 오히려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 아님이랴 하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