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58년 4월 호법법회를 봉행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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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광사 작성일2014.04.08 조회32,390회 댓글0건본문
초목들이 날마다 자신의 본분을 다하려고 매일매일 열심히 새로운 얼굴로 단장을 합니다. 우리들은 각자의 마음으로 예쁘다 환희롭다 하면서 그들의 신비로운 아름다움과 노고에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식물들의 일생을 보면 참으로 여여롭다는 생각이 듭니다. 키가 크고 우아한 목련이 있는가하면 땅바닥에 붙어서 피는 민들레 제비꽃등 작은 로제트 식물도 있으나, 저마다 자신의 처지를 남과 비교하거나 시기하지 않고 주변을 탓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여여하게 자신의 할 일을 할뿐입니다.
오늘도 불광사 선덕 혜담스님의 반야바라밀법문을 듣기 위해 많은 불광형제들이 보광당에 모였습니다.
호법발원
저희들은 이 땅에 감로법을 널리 펴
부처님 정법이 영원히 머물며 겨레와 국토를
법성 광명으로 빛낼 것을 굳게 서원하옵니다.
온 세계가 꽃으로 가득합니다.좋은 때입니다. 좋은 때를 좋은 때라고 느낄줄 알고 기쁨이 솟아야 되는 것이라고 스님께서 법문을 시작하셨습니다.
"화엄경보현행원품에 여래장자라는 말은 부처님의 맏아들이라는 말이며,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의 맏아들은 그 이름이 보현보살이다. 우리가 부처님의 완전한 덕성을 찬탄하면서 예불과 맞이를 올리고 하는데, 지심귀명례하면서 네번째에 나오는 대행보현보살은 모든 부처님의 장자가 보현보살인데, 왜 부처님의 장자가 보현보살이라고 하는가? 바로 행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많은 덕성 가운데 지혜와 자비와 원력도 중요하지만, 그 지혜와 자비와 원력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바로 보현보살이고 보현행원이다. "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행동이지 생각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여래의 장자라하고 모든 부처님의 맏아들이라고 칭송하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보현보살의 입장은 실천력을 중시하고 이 실천을 해나가는 가운데 어떤사람이 참된 나의 제자인가? 바로 부처님의 법을 보호하고 두호하고 그래서 마침내 부처님의 법이 세상에 가득해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성불하고 이 세상이 정토세계가 되고, 그것을 발원하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나의 참된 제자다."
"부처님께서 허물어지지 않는 몸, 절대의 몸을 가지게 된 것은 호법의 인연 때문입니다. 옛날 유덕왕이 부처님의 법을 보호하고 지키다가 전쟁을 하고, 부처님의 법을 위해서 장렬하게 전사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래서 유덕왕이 죽어서 아촉부처님의 첫번째 제자가 되고, 그 당시 유덕왕과 함께 반야바라밀을 선설한 각득이라는 스님이 두번째 제자가 되었다는 말이 열반경에 나옵니다. 이처럼 호법이 중요하고, 바로 오늘 참석하신 여러분들이야말로, 이렇게 부처님의 감로법을 영원히 이땅에 머물게하겠다고 발원한 부처님의 참된 제자이고, 불법을 펴는 진정한 불자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에는 "십이인연"에 대해서 어떻게 고를 멸할 것인가? 어떤 자세로 기도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고, <법당의 메아리>에 "진리는 지금 완전하다"에서는 그 고가 없는 삶을 어떻게 생활에 실현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말씀이 되어 있습니다.
십이인연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부처님께서 난행고행을 통해서 무엇인가 얻으려 했다. 그리고 무엇인가 얻으려하는 마음 때문에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이것을 아시고 부처님께서 모든것을 다 비우고, 일주일 동안 보리수 아래서 선정에 들어 새벽 별을 보고 하늘의 구름이 다 없어지고 밝은 달이 천하를 비추듯이 맑고 투명한 마음이 되고 그런 마음이 된 속에서, 깨달으신 후에 그때 신통력이 나왔다고 경에 나옵니다. 번뇌가 다 멸한 속에서 자기 스스로를 비추어 보니까 자기의 본성자리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육체의 관념, 물질의 관념을 다 벗어난 상태에서 즉 본성만이 홀연히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자리는 조금도 허물이 없고, 완벽한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것이 나의 본성자리다.세상을 본성자리에서 보니 그게 바로 신통인 것입니다. 우리는 신통이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본성자리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통이라는 것이 허무맹랑이 아니고, 예를 들면 바다에 파도가 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다가 잔잔하면 바다밑바닥까지 분명히 보인다. 바로 그때 모든 것을 내어쓸수 있다. 그런자체가 바로 신통력이다. 이렇게 신통력이 나왔을때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렇게 부처가 된 후에 본성자체에서 보니 고도 없고 절대의 자리입니다. 오로지 상락아정 이라는 항상 즐겁고 밝고 기쁘고 깨끗한 극락세계인 것입니다.
그런데 중생의 삶은 한량없는 고가 있다. 모든 사람이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저 중생들의 고통을 어떻게 멸해 줄 것인가를 생각해서 정에 들어서 살펴보니, 중생들이 고통받는 것은 무명심에 의해서다. 내 삶이란 것이 실제로 없는데 없는 것을 있다고 하고,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고가 있다. 이러한 것을 설명한 것이 십이인연이다. 십이인연 중에서 가장 근본이 무명심이다. 갈애심이다. 욕망을 추구하는 그 마음이 사람몸을 받았으니까 이러한 고통을 없애는 방법이 무엇인가?
본래 나의 생명은 나고 죽는 것이 아니고, 본래부터 있는 본성 그 자체가 나의 생명이다. 그림자로 있는 육체생명이 내가 아니고, 내가 살아가면서 고통이 없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십이인연 법이다. 부처님 당시에도 96종의 외도가 있었다. 그 가운데 크게 세가지가 있는데.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신의설이다. 삼라만상 모든 것은 신의 뜻에 의해 창조되었다. 그래서 잘 살고 못 사는 것은 신의 뜻에 달렸다. 신에게 잘보이려고 한다. 21세기 지금도 신의설에 의해서 사는 사람이 많다. 형제여러분들이 신을 믿지 않는 것만이라도 큰 다행이다.
무이설 인도 없고 연도 없고 모든것은 그냥 우연하게 생기는 것이다. 이 세상에 가장 잘 살아가는 방법은 남의 돈을 빌려가지고 잘 먹고 잘 살다가 갚지 않고 죽어버리는 것이다.이것이 무이설이다.
숙명설 은 전생에 지은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세상을 살아가는데 사람들이 이런 이론들에 갈등하고 고통받고 괴로워한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십이인연을 말씀하셨다. 근본은 애갈심, 탐욕심이다. 이것을 없애야 마침내 바른 삶을 살 수 있고 행복을 얻을 수 있다.
< 법당의 메아리>
진리는 지금 완전하다.
우리가 지금 세상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아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 존재인가?
소천스님의 "활공원론"이라는 책에 보면 맹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서방이 어느날 맹인을 업고 길을 가다가 볼일이 생겨서, 나무를 붙잡고 있으라. 만약에 떨어지면 밑에 천길낭떠러지다. 볼일을 보고 오겠다하고 떠나 버린다. 계속 나무위에 살게 된다. 나중에 알고보니 여러종류의 맹인들이 하나같이 전부 나무에 메달려 살고 있다. 서로 열매를 먹으려고 붕당을 만들고 싸우고 시비하고, 어느날 눈을 떠보니 사실 나무밑이 낭떠러지가 아니고 그냥 땅이야. 땅위에서 땅을 밟고 나무열매를 먹고 사는 사람이 되었다.
땅을 딛고 사는 사람이 중생이란 이름의 우리 모두다. 우리모두는 얼마전까지 눈이 보이지 않아 나무위에서 아파하고 괴로워하나 내려와서 보니 매달린 사람이 아니고 단단히 대지에 발을 딛고 마음껏 열매를 따먹고 있는 존재다. 나라는 존재는 모자라거나 부족함이 없는 실질적으로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는, 땅위에서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다. 고통을 필연적으로 받는 범부중생이 아니다. 우리들은 부처의 생명을 그대로 이어받은 사람이다. 부처의 삶을 살아야한다. 나만이 아니라 다른사람도 부처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보고 즐기면서 기뻐하면 됩니다. 이게 우리들의 운명입니다.그런데 이런것을 모르고 계속 인간은 고통받고 신에게 버림받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천상천하 유아독존 하늘 위 하늘 아래 인간의 존엄성을 설하시고, 어떤 신도 범접할 수 없는 절대생명이 우리 생명이다.
사실은 부처님으로부터 온갖공덕을 다 이어받은 그런 사람이라는 것에 눈 떠야한다. 그래서 반야에서는 노사도 없고, 노사 다 됨도 없고, 무명도 없고 무명이 다 됨 역시 없다. 반야에서는 십이인연이 본래없다. 반야심경의 골자다. 반야의 안목으로 보면 무명이 없다. 그냥 본래 부처의 생명으로 살고 있다. 우리가 반야바라밀생명이다. 무명이 없고 생사가 없는 이 자리에 서는 것이 반야다. 우리가 반야바라밀 법문을 만나지 못했으면 계속 몇겁생을 돌고 돌면서 뉘우치고 참회하면서 살아야한다. 반야의 법문을 만났기 때문에 아! 내가 업보 중생이 아닌 부처님 진리생명임을 깨닫게 된다.
법당의 메아리 <진리는 완전하다>에서 [1] 진실된 나의 자리가 있다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즉 우리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 생멸하는 마음, 분별하는 마음이다. 봄이 왔다 꽃이 피었다하는 그런 마음만이 마음인줄 안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선 더 깊은 마음이 있다. 본성, 불성자리다. 그 자리를 보지 못해서 믿지 않는다. 그냥 고통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참선을 하든지 마하반야바라밀 염송을 하든지 열심히 하다보면 어느날 그 본성이 한량없는 부처님 무량공덕생명임을 보게 된다. 보게 되면 그걸 내어 쓰게 된다. 그 내어 쓰는 자리가 일심의 자리다.
[2] 기도정진을 통해서 내 마음이 일심이 나타납니다. 본래자리, 본성자리, 진리의 자리,온갖 공덕이 농축된 자리, 우리의 생명이 잉태된 자리인 일심을 알아야하고 믿어야한다. 노력을 해서 나의 일심 부처님공덕생명을 100%믿든지, 아니면 내어 쓰든지, 보든지하면 그 부처님공덕이 내 앞에서 내 생활속에서 현상적으로 나타나요. 우리 불광식구들은 일과정진이 있다. 불광요전에 나와있다. 내 생명이 마하반야바라밀 일체공덕을 다 가진 절대의 생명임에 눈 뜨기 위해서는 하루 30분 40분이상 노력을 해야 한다. 어느날 내 앞에 일심이 나타난다. 부처의 생명이 나의 주변을 감싸고 있고, 꽉차 있음을 알게된다. 그 전파를 받으려면 라디오를 켜든지 다이얼을 맞추어야 한다. 그 맞추는 것이 일심으로 기도하고 본래생명을 회복하는 것이다. 일과정진은 매우 중요하다. 부처님께서 무엇인가를 얻으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어느날 샛별이 빛나는 순간 본래있는 부처의 생명이 확 들어왔다.
누구라도 노력하면 가능하다. 성철스님께서는 일주일만 노력하면 볼 수 있다고 하셨다. 분명히 노력하면 보이게 되고 그 삶을 살 수 있다. 일과정진을 통해서 그 삶이 나에게 오도록 해야한다.
[3] 우리들 스스로가 무한자 원만자 능력자임을 믿고 행동하자. 이것을 믿고 열심히 마하반야바라밀을 염송하다보면 믿게 된다. 내가 스스로 부처님의 한량없는 은혜에 감싸여 있는 것을 알게 되고 깨닫게 된다. 이것은 많은 수행을 한 후에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현재 당장 내가 부처님의 한량없는 은혜속에 완전한 덕성 속에 놓여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극락세계에는 전기불이 없다. 사바세계에는 전기불이 있다. 지금 내가 사는 이 세상이 진리공덕이 가득한 세계다. 극락세계보다 더 나은 세계다. 이것에 눈을 뜰 때 극락세계보다 더 나은 현상이 열려 있다. 눈을 뜬즉 내 주변이 극락세계보다 더 좋은 우리들의 세계다.죽어서도 가고 지금 현재가 극락세계다.
지금 현재 이 육신 이 상황속에서 내가 한량없는 공덕을 갖고 태어났고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이 진리는 지금 완전하다는 말이다. 진리가 지금 완전한 것이다. 미래에 완전하지 않다. 내가 지금 완전한 진리의 몸이다. 범부몸이 아니다. 100% 믿으면 그런 삶이 온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일체유심조다.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려있다. 마음이 만들어낸다. 내가 부처의 몸이다.하면 부처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것이 잘 믿기지 않으면 마하반야바라밀을 일심으로 염송하다보면 어느날 믿게되고 공덕은 내것이 되는 것이다.
"진리는 지금 완전하다. 나의 본래 생명은 지금 완전하다는 사실에 눈을 떠서 우리들의 삶이 즐겁고 편안하고 기쁘고 보람있는 삶이 되기를 바란다" 며 법문을 마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