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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자 위한 시다림 염불 봉사 20년 “지극한 정성 최고의 수행이자 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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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광사 작성일2014.07.28 조회33,33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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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자 위한 시다림 염불 봉사 20년 “지극한 정성 최고의 수행이자 전법”
손기원 불광사 연화법사
 
2014년 07월 24일 (목) 21:50:28 노덕현 기자  noduc@hyunbul.com
 

   
 손기원 연화법사는 … 1994년부터 2004년까지 연화부원으로 활동하다, 2005년 연화법사로 부촉받았다. 단순히 염불봉사 외에도 손 법사는 49재 등 장례절차 상담을 비롯해 다양한 업무도 맡고 있다. 바쁜 일정 중에도 손 법사는 봉사를 통해 자신이 오히려 위로를 받고 힘이 난다고 말했다. 
1994년부터 연화부 봉사활동
2005년 법사 부촉 후 집전 시작
연간 방문 상갓집 130곳 넘어
한 상가당 봉사인원 4명 제한

매달 첫째 주 수요일 봉사 점검회의
유족 위로와 함께 장례상담도 겸해
상장례 통한 불교포교 평생 발원

우리는 흔히 타인으로부터 곤욕을 치르거나 괴로움 등 정신적 고통을 받는 것을 ‘시달림 당한다’고 말한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쓰이는 ‘시달림’은 본래 불가에서 죽은 이들을 위해 염불과 설법을 해주고, 장례의식을 치러 주는 시다림(尸茶林)에서 유래됐다. 죽은 이들을 위해 법문을 하고 장례의식을 집전하는 것이 정신적으로 얼마나 힘든 과정인지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시다림 봉사를 20년 넘게 해오고 있는 한 불자가 있다. 바로 불광사 연화부 손기원 법사(63)다. 불광사에서는 시다림 봉사를 연화활동이라 하여 부서를 꾸리고 있다. 이중 손기원 법사는 연화부에 상주하며 스님과 함께, 때론 스님을 대신해 망자를 배웅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불광사의 유일한 연화법사

손기원 법사는 1994년부터 2004년까지 연화부원으로 활동하다 2005년부터 본격적으로 연화법사 활동을 시작했다. 사실 손 법사가 맡은 연화법사라는 직책은 불광사에만 있는 특수한 자리다. 1982년 불광법회 법주였던 광덕 스님은 연화부를 만들며 두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 번째가 바로 연화부원은 몸과 마음가짐을 스님과 똑같이 한다는 것이었다. 광덕 스님은 장례식에 스님이 없다면 재가자도 스님과 같이 요령과 목탁을 들고 망자를 천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연화법사’라는 직책을 만들었다.

손기원 법사는 현재 불광사에서 유일한 연화법사로 2005년 부촉 받았다. 그만큼 손 법사는 무거운 책임감을 갖고 연화법사직에 임하고 있다.

“불광사의 모태는 재가자들의 모임인 불광법회입니다. 80년대 초부터 지금 있는 자리 주변 땅을 사서 법당을 짓기 시작했어요. 연화부는 그 때인 82년에 만들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앞으로 출가하는 스님들이 적어지다 보니 시다림을 비롯한 생활불교 전반을 재가자들이 책임져야 한다는 취지였어요. 예전에는 30명 가까이 부원이 활동했는데, 지금은 직장에 다니시는 분들 위주로 15명이 활동하고 있어요. 낮에는 저와 지도법사 스님이 가고, 밤에는 부원들이 찾아가 염불독경을 해주는 방식입니다.”

유족들의 요청이 오면 손기원 법사는 지도 스님과 함께 장례식장을 방문한다. 먼저 스님과 함께 고인이 부처님에게 귀의하는 수계염불을 한다. 둘째 날에는 입관염불로 의식을 집전하며, 마지막 날에는 발인부터 장지까지 동행해 염불로 극락왕생을 기원한다. 만약 장례식이 여러 군데에 있다면 스님과 손 법사는 각기 따로 활동한다.

“상이라는 것이 없다가도 동시에 날 때가 많아요. 그럴 때면 지도 스님은 다른 곳으로 가시고 제가 집전을 합니다. 법사로 부촉 받았지만 아무래도 재가자가 집전한다는 것이 유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요. 그런 미안함때문에 오히려 정성을 다합니다. 또 제 생활도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법사라는 위치에 맞게 최선을 다하고자 마음먹습니다.”

 

   
 불광사 연화부는 연화활동 외에도 연등축제를 비롯한 불교계 행사에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부처님도 모르는 일정, 연간 130곳 방문

그렇기 때문에 손기원 법사의 하루는 부처님도 모를 정도다. 죽음에는 예고가 없기에 그 때의 상황에 따라 하루 일과를 조정해야 한다. 개인 일정을 잡았다가도, 취소하고, 변경하는 것이 태반이다. 새벽이든 늦은 밤이든 항상 휴대전화를 소지하고, 전화벨이 울리면 곧장 장례식장으로 떠날 채비를 한다. 장지까지 일정을 소화하고 나면 그 다음날 어김없이 다른 장례식장으로 나선다. 그렇게 1년 동안 다니는 상가가 130군데에 달한다.

“처음 연화활동을 시작 할 때 다짐했습니다. 망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유족들을 위로하는 것이 제 사명이라고요. 저녁에 집에 들어와 잠깐 잠을 자고 다시 새벽에 나가는 경우가 많아도 이렇게 건강하지 않습니까. 연화활동을 하고 나서 어디 아파본 적이 없어요. 이게 다 부처님의 가피라고 생각합니다.”

손 법사는 “입관과 화장을 할 때 가족들이 서글피 울 때 마음이 울컥하는데 특히 예기치 못한 죽음 앞에서 염불할 때는 자신에게도 슬픔이 다가온다”며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염불소리가 끊겨서는 안 되기에 슬픔과 안타까움을 삼키고 망자를 배웅하는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광덕 스님 가르침 ‘상가에 민폐끼쳐선 안돼’ 실천

손 법사의 무거운 책임감은 광덕 스님 가르침에서 비롯됐다. 앞서 광덕 스님은 법사를 부촉하며 “절대 상가에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손 법사와 연화부원들은 그 가르침에 충실히 따르고 있다. 다른 곳과 달리 염불봉사도 한 상가 당 4명 내외로 방문한다. 너무 많이 가면 민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상가에 가서 식사도 하지 않으며 일체의 금전적인 거래도 하지 않는다. 또 매달 첫째 주 수요일 지도법사 무아 스님을 중심으로 점검 회의를 열고 개선할 점 등을 공유한다.

장지에 내려갈 때도 손 법사는 직접 자신의 차를 운전한다. “가끔 아주 먼 지방에 장지가 있을 때가 있어요. 예전에 해남에 내려 간 적이 있습니다. 스님을 모시고 도착하니 유족 분들이 와준 것만으로도 고마워 하시더라고요.”

손 법사가 처음부터 연화부 활동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손 법사는 오랫동안 서울은행에서 일한 금융맨이었다. 1980년대부터 불교에 관심이 있어 불광사에 다니게 된 손 법사는 기초교육을 받으며 목탁을 치는 것이 그렇게 좋았다고 한다.

“신도교육 시간이었어요. 한 대학생 불자가 의식에서 목탁을 치더라고요. 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초교육을 마치고 나니 연화부 교육 중에 목탁을 치는 것이 있었어요. 그래서 94년부터 연화부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손 법사는 그때부터 삶에서 일의 우선순위를 연화활동에 두었다. 직장생활을 할 때 저녁이면 장례식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일이 다반사였고, 심지어 장지가 멀리 있으면 새벽에 집을 나서 밤늦게 돌아오는 경우도 많았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휴대폰이 없던 시기여서 어려움은 더했다. 유족들 간에도 소통이 되지 않아 상갓집에서 문전박대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럴 때 마다 힘이 된 것은 사명감과 신심이었다.

“옛날에는 전화가와서 가면 쫓아내는 경우도 많았어요. 유족들 중 한 분은 사찰에 다니고, 다른 한 분은 교회에 다니거나 불자가 아닌 경우인 거죠. 어떨 때는 발인 바로 직전에 유족들이 연락을 하는 경우가 있어요. 뒤늦게라도 급하게나마 가서 염불을 해드리면 돌아가신 분들이 좀 더 좋은 곳으로 가셨을 것 같아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 분들을 생각하면 기꺼이 독경하고 염불하게 됩니다.”

   
불광법회서 연화부원들이 임명장을 받고 봉사 활동을 다짐하고 있다.
주변의 시선, 정성으로 바꿔놔

이런 그의 신심과 열정은 1997년 회사를 그만둔 이후로 더욱 깊어졌다. IMF의 바람이 불어오던 그때 연화활동은 그의 삶에 하나의 힘이 되었다.

“그때 당시 많이 힘들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십 수 년 다닌 직장에서 나오고 나니 생활에 대한 걱정부터 앞서더군요. 작은 회사로 옮기긴 했지만, 봉급이 턱없이 부족했어요. 그런 상황에서 연화활동을 하면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슬픔에 잠긴 이들을 위로하고, 고인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건강하고, 살아있음에 감사하게 됐어요. 반대로 제가 치유 받았다고 할까요.”

이런 손 법사의 활동은 매일 상갓집에 간다는 주변의 안 좋은 시선도 바꿔놓았다.

“처가 쪽이 안동의 유교집안입니다. 저에게 대놓고 말은 못했지만 조금은 그런 분위기가 있었어요. 매일 같이 상갓집에 다니니 말이죠. 그러다가 96년에 장인어른이 돌아가셨습니다. 직접 법복 입고 염불 하고 장례를 치렀어요. 그때 처가 집안 어른들이 눈여겨 보셨나봐요. ‘자신도 죽으면 와서 염불해달라’고 연락을 하시더라고요. 종교를 떠나, 고인을 위해 정성을 다하는 마음은 어디에나 같다고 생각해요. 그 것이 계기가 돼 그 지역에 사는 동서도 이제는 절에 다니며 그 지역에서 연화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손 법사의 가족들도 모두 사찰에서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다.

“부인은 불광사의 봉은부에서 봉사를 하고 있어요. 각종 재일이나, 초파일 때나 과일도 놓고, 허드렛일도 하고 하는 노력봉사입니다. 주말이면 함께 안국동노인복지회관에도 나가요. 아들들이 두 명 있는데 초등학교 때부터 사찰에 오다보니 이제는 저보다 더 열심인 불자들이 됐습니다. 염불봉사를 하고부터는 집안이 크게 잘되는 것은 없을지라도 나쁜 일이 없었어요. 가랑비에 옷 젖듯이 은은한 향이 피어나듯이, 집안에 큰 탈 없이 살아가는 것이 부처님 가피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생활 속 불교신행이 곧 전법

연화법사의 일은 의식뿐만 아니라 장례절차 상담도 함께 한다. 요즘은 장례가 대부분 병원에서 이뤄지고 상조회 문화가 정착돼 상담이 많이 줄었지만 장례를 마치고 사찰에서 재를 지내는 등 여전히 많은 상담이 이뤄진다. 망자의 첫 기일을 어떻게 보낼지, 유품은 어떻게 정리하는지 등이다. 그러다 보면 불자가 아닌 이들에게도 자연스럽게 전법활동도 이뤄진다.

손 법사는 “사실 이웃종교계에서 이런 활동이 활발하다. 상장례를 통해 종교를 본격적으로 접하는 분들이 많다”고 말했다. 손 법사는 이어 “신도회나 지역모임이 구성된 도심에서는 그나마 불교계의 상조가 활발하지만 시골에서는 사찰의 스님들이 일일이 신경 쓸 수 없다보니 이런 부분이 많이 미흡하다”며 안타까움을 토했다.

손 법사는 하지만 마음을 다하면 무엇이든 이뤄진다고 말했다.

“모든 것은 많다고 좋은 것이 아닌 것 같아요. 일이란 것은 하나를 해도 정성을 다하면 다른 일도 잘 풀리잖아요. 전법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연화활동 등 한 분야에 정성을 쏟으면 그 것이 결국 전체적으로 전법이 활성화 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자로서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손 법사는 그렇기 때문에 힘닿는데 까지 연화활동을 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제가 그동안 염불한 분들이 수천 명은 되는 듯해요. 언젠가 저도 이 세상을 떠난다면 그분들이 극락에서 저를 환영해주지 않을까요?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제게 염불할 수 있는 힘이 있는한 계속 해 나갈 것입니다.”

   
불광사 대웅전에서 손기원 법사가 부처님에게 기도를 올리고 있다. 손 법사는 매일 금강경을 수지독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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