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2558년 11월 호법법회 봉행 > 불광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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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58년 11월 호법법회 봉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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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광사 작성일2014.11.06 조회33,9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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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사가 위치한 바로 앞마당 석촌 호수에는 예쁜 옷으로 치장을 한 가을이 다소곳이 앉아 마지막으로 색조 화장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저 화장마저 끝내고 나면 머언 나들이 길을 떠날 것 같습니다.

불기2558년 11월 5일은 호법 법회를 봉행하는 날입니다.

가을마저도 예쁘게 치장을 하고 나들이를 가고 싶은 이 좋은날. 그것도 주말도 아닌 평일이라 신도들이 오기가 더욱 힘든 날이건만 불광사의 열렬한 신도들은 나들이도 아니 가고 일도 뒤로 미뤄 둔 채 호법 법회가 열리는 이곳 불광사 지하 4층에 있는 보광당으로 속속 몰려들었습니다.   넓은 보광당 법당 안에 울려 퍼지는 맑고 청아한 종소리 어느 오케스트라가 어느 연주자가 이렇게 맑고 고운 소리를 낼 수 있을까요?  종소리가 울려 퍼져 나갈 때마다 혼탁한 머리가 심산유곡의 맑은 물로 씻어 내는 듯 영혼마저도 맑아지는 느낌입니다.

타종이 끝나고 삼귀의 합창이 시작 되었습니다.  호법 법회에는 합창단이 참가하지 않는지라 일반 신도들만의 목소리로 합창이 이루어 졌습니다. 거사라고는 두어분 계시고 보살님들만 계시는데도 법당 안에 울려 퍼지는 음성은 중저음으로 깔리는 베이스 음색입니다.  워낙 신도분들이 많이 오신지라 한분 한분이 작게 소리 내어 불러도 전체적으로는 웅장한 베이스 음으로 깔려서 들려왔습니다.  이어서 기다리던 설법이 이어졌습니다. 논리정연하게 까랑까랑한 목소리 설법 잘하기로 소문난 혜담 스님의 설법이니 어찌 고대하며 기다리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혜담스님의 설법

 수능발원문을 들었습니다. 수행보다는 소망을 이루는 게 앞서고 수행은 뒤로 미루게 됩니다. 그것이 잘못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불법이 영원하고 이 땅이 평화롭기를 원하는 부처님 원을 자신의 원으로 삼아서 발원하고 수행하고 정진하는 것이 가장 수승하다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어떻게 이해 할 것인가 일체 보살이 성불하는 길, 불자가 성불하는 길이 어떤 것인가? 성불이 무엇인가?

부처님 말씀의 전부가 성불하는데 맞추어져 있습니다.  경전마다 성불에 관한 말씀이 대다수입니다.  그 많은 경전 중에는 원각경 하나만 갖고 일체성불의 길을 말하는 것은 한쪽에 치우친 정당한 평가가 아니다 라고 생각 할 수 있지만 특별한 경을 통해서 이해하고 공부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성불이라는 것은 자기 본래의 마음 본성자리를 보는 것입니다. 본성자리를 회복하는 것 본성자리를 보고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불을 단정적으로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습니다. 성불은 마음을 깨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견성을 하면 그것이 어떤 것인가 하고 견성에 대해 큰 스님께 질문을 하나 큰스님은 그냥 빙긋이 웃으실 뿐입니다. 자기가 증득하고 느낄 뿐입니다. 생각으로 지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말로는 할 수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방편을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야바라밀을 말로 할 수는 없습니다만 반야바라밀을 말로 하는 것을 방편이라고 합니다. 원래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방편으로 말을 합니다.

 수행이란 성불의 방법 중 예를 들면 간화선수행, 염불수행, 주력, 기도를 중점으로 하고 남방 불교에서는 위빠사나를 주로하는 등 천차만별의 방법이 있고 각기 자신의 방식이 최고인 것처럼 합니다.  따로 이것이 최고의 방법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문수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삼세 모든 부처님께서 보살시절에 성불의 원을 세우고 어떤 행을 닦으셔서 성불하셨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일체여래가 본래 일으키신 인지(因地)는 청정한 깨달음새를 뚜렷이 비춤을 의지하여 무명을 영영 끊고 바야흐로 불도를 이루느니라” ⟦원각경⟧

부처님께서는 청정한 깨달음새를 비추어 보았다는 것이 요점이다. 청정한 깨달음새가 어떤 것일까. 원래 깨달음은 궁극적 실존의 전면노출이므로 그 존재양태는 절대다. 절대적인 존재는 말로 표현하거나 생각 속에 담을 수 없는 것이다. 참으로 말과 생각이 이르지 못하는 곳이다. 오직 스스로 증득하고 체험할 뿐이다.  그러나 말하기 어렵다 하여 입을 다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그래서는 불사를 지을 수 없다. 그러므로 부득이 사유와 비유와 언설이 있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 말할 수 없는 것을 청정한 깨달음새를 뚜렷이 비춘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 말씀이 말과 생각이 이르지 못하는 곳의 소식임을 알아두자 (법회보 옮김)

 모든 사람들이 본래부터 청정각성 즉 깨달음을 갖고 있습니다. 동물들도 청정한 깨달음 갖고 있고 청정한 깨달음으로 삽니다.  개는 밥 주면 밥 먹고, 졸리면 자고, 마실도 갖다오고, 누가 오면 짖고, 개는 목적이 없이 그냥 삽니다. 개가 견성을 위해 수행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무의미하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사는 목적이 없어도 살아가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모든 존재는 목적이 없어도 살아가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괴로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괴로움이 있습니다. 동물은 자연 그대로 진리대로 사는데 사람은 무엇인가 구합니다. 구하지 못하면 힘들고 괴로워합니다.

구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그럴 때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구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여기서 한 발짝 물러나는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깨달음의 모양이 어떻게 생겼을까요?

부처님의 말씀을 통해 말이 없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내 본성 속에 원래부터 들어 있는 깨달음의 모습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청청한 깨달음의 모양은 어떻게 말할까.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말이 허물되는 줄 알면서 논리적 희롱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청정한 깨달음은 궁극적 실재이므로 절대독존자다. 이것밖에 다른 것이란 없다. 오직 그뿐이다.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동을 향하거나 서를 향하거나 만나는 것은 모두 이 물건이다. 있는 것이 이것뿐이기 때문이다. 없는 것도 이것이다. 있고 없는 것도 이 물건이다. 그것뿐이기 때문에 들어 말할 수 없다. 놓을 수 없다. 이 진실한 독존실재자를 반야바라밀이라하고 부처님이라 한다. 법성진여 불성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구하려 하면 어긋나고 버릴 수도 없다. 항상 함께하고 항상 만난다. 실로 부처님으로 만인은 자존한다. 그러기에 만인은 원래로 청정자요 해탈자요 불멸자다. 보살은 이처럼 청정한 깨달음새를 알고 생각 생각이 도리를 여의지 않고 행한다.”  (법회보 옮김)

 깨달음은 절대 독존자입니다. 세상에 있는 것은 반야바라밀뿐입니다.  우리가 사는 것이 절대의 세계입니다. 절대의 세계를 눈으로 봐야 합니다.

“종일토록 옷을 입고 있는데 옷을 입지 않고 억겁을 떨어져 있어도 한번도 여읜 적이 없다” 본성을 깨닫지 못하면 못봅니다. 매일 마주하면서도 모릅니다.

본성자리는 절대 독존입니다. 반야바라밀입니다.  본성자리는 본적이 없으면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 본성자리를 보셨습니다. 부처님께서 6년 고행을 하셨으나 그때는 해답을 얻지 못하셨습니다. 보리수 아래서 7일간 정진 한 후 깨닫게 되셨습니다. 왜 일까요? 6년 고행시에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구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생사윤회로부터 벗어나기 위함 구함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깨달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구하는 것을 다 내려놓으니 본성을 보게되고 깨닫게 된 것입니다. 본성은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래 갖고 있습니다.

깨달음의 모양은 어떨까요?   첫째 절대 독존입니다. 절대자리입니다.   다른 말로는 반야바라밀 불성이라고 합니다. 내가 부처님의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부처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깨달음은 궁극적 실존 자체다. 그러므로 일체지 일체공덕 일체능력이 그의 것이다. 아무리 펼쳐내도 한정이 없다. 무진장의 무고다. 그것은 어떤 지혜이거나 자비이거나 공덕성의 형태로 있을 뿐만 아니라 온갖 유위형태, 물질적 존재형태, 온갖 자연적 기세간형태 그 일체를 무진장으로 간직한다. 일체 부. 복덕. 지혜능력 모두를 갖추었다는 말이다. 보살은 자신의 실상이 이와 같은 무진장을 함장하고 있는 것을 믿으며 일체인이 또한 그러한 것을 믿어 존중하고 받드는 것이다. (법회보 옮김)

 원만구족하다, 모든 것을 갖고 있다, 구름이 벗겨지면 태양이 나타나고 허공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허공은 없지요. 하지만 그 허공 안에는 태양도 있고 별도 있듯이 허공은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공은 없는 것이 아니라 없는 곳에서 모든 것을 갖고 있습니다. 없다 있다를 떠난 그 공간입니다.   기도하는 의미는 나는 없고 부처님만 갖고 있어서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란?   나에게 이미 모든 것이 있습니다. 내 생명 부족함이 없는 나를 믿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만들려하니 힘든 것입니다. 본래 다 갖고 있는데 부처님이 이미 주었는데 그것을 믿지 않고 자꾸 구하려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 어떤 생명체이든 내가 평생 먹고 살만한 것을 다 갖고 태어납니다. 본래 갖고 있는 것을 내 마음이 다 갖고 와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청정한 깨달음새는 그 존재양태가 일체와 동일자로 존재한다. 일체와 더불어 한 몸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만인의 슬픔이 자신의 슬픔이며, 만인의 고난, 기쁨이 곧 자신의 것이다. 아무도 대립한 자 없다. 일체중생을 수순 공양함이 부처님 공양이 되고 이공이 마시매 장공이 취하는 도리가 여기있다. 일체중생과 한 몸인 도리를 왕성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청정한 깨달음새를 뚜렷이 비춘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위에 열거한 바 절대독존성, 원만공덕성과 동일자성을 일체시 일체사에서 원만히 들어내는 것이다. 이것은 곧 청정각성을 운영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닦는 자는 곧 성불자다’라 하겠다. (법회보 옮김)

 “여주의 소가 여물을 먹는데 이천의 말이 배가 부르다. 돼지의 왼쪽 허벅지를 뜸을 뜨면 나의 다리가 낳는가? 나와 일체 중생이 같은 생명이다. 소와 말과, 돼지와 내가 같은 생명이다. 부처님과 같은 생명이다.”   부처님과 내가 같은 생명인데 구태여 부처님께 달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생명이라는 것은 절대독존이고 원만구족하고 부처님과 동일임을 믿고   반야바라밀 생명을 사는 불자가 되길 바라며 호법법회에 함께 해준 불광형제들에게 감사와 찬탄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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