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59년 6월 호법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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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용희 작성일2015.06.05 조회34,666회 댓글0건본문
불기 2559년 6월 호법법회가 봉행되었습니다.
호법발원
저희들은 이 땅에 부처님의 감로법을 널리 펴
부처님 정법이 영원히 머물며 겨레와 국토를
법성 광명으로 빛낼 것을 굳게 서원하옵니다.
(선덕(先德) 혜담스님 법문요약)
호법법회에 동참한 모든 불광형제들께 감사를 하시고 호법발원문을 낭독하시면서 법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스님께서 몸에 병이 생겨서 수술도하시고 요양도하시고 그러다가 두어달만에 여러분을 뵙게 되었습니다. 불광형제 여러분께 많은 걱정을 끼쳐서 대단히 송구스럽게 생각하시며, 거의 완쾌가 되어서 불광형제여러분의 염려와 기도덕택이라 생각하신다면서 감사의 인사를 하셨습니다.
병이 나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병이 어떤 의미가 있고 삶에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야생의 짐승들은 원래 병이 없는 것이 자연의 섭리인데 탐욕심이 가득한 사람에게 가까이 와서 병이 납니다. 들짐승들이 원래 병이 없지만 돌이 굴러오거나 자연적 현상으로 몸에 병이 나면 그것을 낫게 하는 맥반석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산짐승들이 스스로 어디에 누우면 낫는지 자연의 섭리 그대로 알아요.
마찬가지로 사람도 병이 낫을 때 어떤 병이 낫는지 스스로 알게 되어야하고 즉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이 어디에 있는지 스스로 알아야 해요. 우리들은 많은 소원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인간의 본성속에는 그 모든 것을 내 것으로 할 수 있는 신비한 힘이 있습니다. 인간만이 아니라 삼라만상 모든 존재들이 그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강원도 남재천의 연어가 올라오는 것도, 새들이 때를 알아서 찾아오는 것도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들의 본성이 가지고 있는 힘이 있어요.
우리 본성이 가지고 있는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의 노력입니다. 그것을 이름하여 수행이라고 합니다.
모든 짐승들이 자연적으로 자기가 필요한 것을 얻듯이 인간들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런 무한능력을 보이지 않는 힘을 반야바라밀에 항상 마음을 두고 있을 때 그것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이 바로 부처라고 많은 경에 그렇게 말을 하고 법문을 하고 있습니다.
*법당의 메아리*
마음을 언제나 반야바라밀에 두라
호법월보 참조
진리가 부처님이며 진리는 형상이 없습니다 그래서 진리가 부처임에 우리가 눈떠야한다
.
이와같이 내가 들었다
[1] 깨달음을 부처라한다....대일경
[2] 여래는 어디로부터 왔다고 말할 수 없고 어디로 갈 것이라고 이를 수가 없다. 그래서 여래라고 한다...반야경
금강경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진리가 부처님이고 깨달음이 부처라는 그 자체를 생각하지 못하고 단순하게 육신으로 오신 부처님, 우리들에게 많은 법문을 일러주신 부처님만 생각하고 그 부처님께 무엇을 달라고 하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부처님은 형상의 부처님입니다. 진실된 부처, 여래는 오는 바도 없고 가는 바도 없는 진리가 부처님이다. 형상이 없는 그 부처님께 우리는 기원을 드리고, 기도를 드리고 공덕을 내어 쓸 수 있는가? 이런 의문이 들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부처님은 우리들은 수행을 통해서 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수행을 통해서 진실된 부처를 뵙게 되면 아! 부처님은 오고가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보게 되는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허공처럼 생겼습니다. 허공은 없는 것도 아니지만 있는 것도 아니지요. 허공을 아무도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안 보인다고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허공은 오고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허공은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허공처럼 생긴 내 마음이 있어요. 그 마음이라는 것도 노력에 의해서 볼 수가 있는데 그 마음을 본 것을 이름해서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혹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눈을 떴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은 현재 육체를 나를 삼고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들을 마음이라고 합니다만 이 육체와 마음을 벗어난 내 본성이 있습니다. 그 본성을 우리가 보는 것입니다. 그 본성에 눈을 뜨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눈을 뜰 것인가?
내가 지금 생각이라는 그 생각을 일정한 시간동안 멈춰야합니다. 온갖 망념을 멈추고 한동안 시간이 지났을 때 그 텅 빈 내 본성을 알게 됩니다. 그 본성은 형상이 없지만 달리 표현하면 그 본성자리는 불구부정입니다. 그 불성자리는 처음부터 있는 그 자리입니다. 불증불감입니다. 한량없는 공덕을 다 갖고 있는 겁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수많은 소망들이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망들은 본래 내 본성이 다 가지고 있는 겁니다. 반야심경에서 부증불감 늘지도 줄지도 않는 속에 한량없는 공덕이 다 갖추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불구부정입니다.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는 절대청정이라는 말입니다. 내 본성자리는 번뇌가 물들 수 없는 더러움이 있을 수 없는 존재 이 말은 내가 죄를 지을래야 지을 수 없는 그런 청정성을 이 땅에 태어날 때 가지고 있다.
지금 여기 꽃이 있는데 우리가 꽃을 볼 때 아무 모자람이 없다. 짐승도 그러하다. 뭔가 모자라지 않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완벽한 절대적 존재다. 그런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은 모자라는가? 사람도 꽃이나 짐승처럼 완벽합니다. 모든 공덕을 다 갖추고 죄를 지을 래야 지을 수 없는 완벽한 존재가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완벽치 않는 것처럼 보이느냐?
미망과 탐욕심 때문에 우리들은 완벽할 수가 없는 겁니다. 우리가 수행을 한다는 것은 내 본래자체가 청정하다는 것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복귀라고 합니다. 내 삶 자체가 부처님의 생명이다.
그 자체에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기도를 한다는 것은 이것저것 해달라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생각 생각에 내 생명이 불생불멸 부증불감 불구부정 끊임없이 그것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노래를 하면서도 마라톤을 하면서도 기도를
할 수가 있는 겁니다.
일과정진을 하지 않으면 그건 불자가 아닙니다.
마치 스님들이 절에서 수행할 때 아침저녁으로 예불 드리고 사시에는 맏이 올리는 것은 부처님께 감사합니다. 이지만 그 이전에 자신이 부처임을 잊지 않겠다고 하는 겁니다. 적어도 하루 세 번은 부처임을 잊지 않고 내 가슴에 담자하면서 맏이 올리고 예불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아침에 30분은 내 생명이 부증불감 한량없는 공덕생명임을 주입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중동의 알라를 믿는 사람들도 하루 다섯 번 기도한다는 것은 내 생명이 절대 알라생명이기 때문에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 하루 다섯 번 예배하는 것입니다.
내 생명이 가지고 있는 것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먼저 내 생명은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한량없는 공덕생명이라는 그 자체를 보는 것입니다. 깨달음입니다. 그럼 보지 못했다고 해서 끝이 아닙니다. 설령 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믿어야 됩니다. 그래서 화엄경에 나오는 “믿음은 공덕의 어머니다”하는 것이 바로 그 말입니다. 100%믿으면 100% 내 생활에 좋은 일이 현전되는 것이고, 50%믿으면 50%밖에 실현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믿기 위해서 하루 30분이라도 일과정진을 하면서 마하반야바라밀 염송을 하고 마음을 언제나 반야바라밀에 두는 그런 행동을 했을 때, 내 현실 생활에 반야바라밀 광명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부처님임이 나타나는 겁니다. 이것을 이름하여 기도라 하는 것입니다. 이것저것 도와주세요하는 것은 진짜기도가 아니고 그건 망상입니다.
진짜기도는 마하반야바라밀에 의한 기도입니다. 내 생명이 부처님 한량없는 공덕생명 마하반야바라밀 그 자체에 내 눈을 뜨고 항상 내 생명 속에 부처님광명이 가득 차 있다는 것에 항상 마음을 두고 있는 그 자체가 기도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기도라는 것은 절을 하는 등 어떤 행동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생각 생각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생명이라는 것을 담고 있느냐 없느냐하는 것이 기도의 요건입니다.
30여년전 자비의 전화 신앙상담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누워서 경전 읽고 정진하면 벌을 줍니까?하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기도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벌을 주지 않습니다. 좋은 점만 키워나가는 분이 바로 부처님이다. 내가 잘못하면 벌을 받는 것이지 결코 부처님이 벌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은 끝없는 자비이시다. 내가 행하는 공덕만 키워주시는 겁니다. 그런 부처님이 바로 내 생명이다. 내 생명 속에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눈을
떠야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마하반야바라밀 기도를 해도 왜 불행이 나타나느냐 그 불행이 나타났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되느냐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가 두려워하는데 있습니다. 내가 안되면 어떻하냐?
내 생명은 절대 병이 있을 수 없는 그 자리라고 하는 것에 확고부동한 생명이라는 것에 확신을 가져야합니다. 그것이 기도고 우리가 불교를 믿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겁니다. 나에게는 불행이 있을 수가 없어 나에게는 밝음만 있어 기쁨만 있어 하는 것에 눈을 뜨자고 하는 것이 불교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혹시 불행한 일이 왔다 시련이 왔다 했을 때 이것이 핵심입니다.
어둠을 물러가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불을 켜는 것이다. 바로 마하반야바라밀을 염송하는 것이다. 마하반야바라밀 염송을 해서 내 마음을 언제나 반야바라밀에 의해서 내 생활을 밝게 할 수가 있는 것이고 그렇게 되었을 때 가장 바람직한 불자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되었을 때 일체유심조의 도리다.
내가 현재 내 마음속에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이 있기 때문에 그 공덕을 생각함에 있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이루어진다. 내가 마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것을 일체유심조라합니다. 내 마음의 본성자리가 현상화 되는 것이 그것이 바로 기도다. 그래서 우리들이 세상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바로 이렇게 모든 것은 내 마음이 만들어낸다. 그래서 항상 긍정적으로 밝게 세상을 바라보고 그렇게 내 현실이 그렇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는, 내 현실이 그런 상태라는 것을 생각을 하고 그렇게 살 때 우리들의 삶이 행복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말씀은 행복되게 살아라하는 것입니다. 내 생명에는 부처님과 똑같은 그런 공덕이 내재되어 있다. 이것을 내어 쓰라 이것이 부처님께서 우리들에게 해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점을 생각하면서 우리들이 생각 생각에 마음을 언제나 반야바라밀에 둠에 의해서 우리들의 삶을 그렇게 행복된 것으로 끌고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오늘 제가 말씀드린 것을 항상 가슴에 담고 마음을 언제나 반야바라밀에 둠에 의해서 행복을 창조해나가는 그런 우리 불광형제들이 되어주십사 하고 바라면서 오늘 여기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