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59년 9월 둘째주 일요법회. 중생을 알면 곧 불성을 볼 것이다. 운암지철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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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은주 작성일2015.09.15 조회34,697회 댓글0건본문
요즘은 하늘이 자꾸만 보게 되는 때인가 봅니다.
하늘이 어떤 색인지 구름이 걸려 있는지도 확인합니다.
하늘을 보면 몸이 가벼워 지고 기분 좋은 일이 자꾸 생길것 같습니다.
그래서 인지 오늘은 불광사에 혈기 넘치는 군일들이 법당의 한쪽을 가득 채웠습니다.
다들 아들 같은지 눈이 가네요. 환영합니다.
오늘의 이 인연이 보리심으로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금주의 법의
중생을 알면 곧 불성을 볼 것이다.
운암 지철스님
佛是衆生 心裏佛 부처란 중생의 마음속에 있는 부처이니
隨自根堪 無異物 자신의 근기를 감당할 수 있는 근기를 따를 뿐
달리 다른 물건이 아니다.
欲知一切 諸佛源 일체 모든 부처님의 근원을 알고자 하면
悟自無明本是佛 자신의 무명을 깨달으면 본래 부처이니라
-보조스님-
밤마다 부처님을 안고 자고 아침마다 함께 일어난다.
일어나고 앉고 하는데 항상 서로 따르며
말하고 침묵하는 데도 또한 같이 한다.
털끝만큼도 서로 떨어져 있지 않는 것이
마치 그림자가 몸을 따르는 것과 같다.
부처가 간곳을 알고자 하는가
다만 이렇게 말을 하는 그것이라네
-부대사-
상을 여윈 반야의 눈으로 보면 제제처저가 즉시 불이다.
상은 마음이 만들어 놓은 이미지이므로 마음이 쉬어지고, 끊임없는 변화 그 자체를 보는 힘과 판단(觀)인 지혜가 생기면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생명본연의 참모습이 되는 것이다. 이 참모습은 부처님의 불성생명이라고 하며, 부처님 생명이 내 생명으로 무량공덕이 넘처 흐른다.
중생을 모르면 만겁을 찾아도 부처를 보기 어렵고, 중생을 알고 보면 중생이 중생이 아니라 모두가 부처다.
중생도 마음이 만들어 놓은 작용이라, 이 마음은 탐진치가 만들어낸 구름과 같은 것임을 안다면 꺼달리지 않는다. 내 몸이 나라는 생각이 있으면 나고 병들고 사라지는 고를 맞게 된다. 나는 사대와 오온으로 구성된 無常한 것임을 알고, 항상 변하는 몸은 환화와 같고 공한줄 알면 그 자리에 무진장 공덕이 넘쳐 흐른다.
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하면 불성생명이 드러나고 꿈에서 깨어나게된다.
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하는 그 자리에 천진불이 구족해 있어 부처님 생명이 흘러나오며, 날마다 좋은 날이 된다. 반야바라밀로 일념을 이루면 중생이 중생이 아니고 세간이 세간이 아님을 깨달아 두두물물이 비로자나 화엄이 구현되는 것이다.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님 법문의 근원이며 중생의 근원이다. 반야바라밀이 중생도 되고 부처도 되고 근기에 따라 육도에 나투지만 모두 실상은 반야바라밀이다.
탐욕은 뜬구름 물거품과 같고 실다운 것이 없고 공한 줄 알아 본래 참된 면목을 본다,
본래면목으로는 무명이 불성이고 환화가 법신이며, 중생이 부처라고 하는 것이다. 무명을 깨달으면 무명이 본래 부처며. 탐진치 삼독이 일체불법을 다 갖추었고 내 몸이 공인 줄 알는 것이다., 나라는 생각은 놓아진다면 뜬구름과 물거품 같은 나라는 것이. 태어나고 병들고 죽는 것 속에 살아도 산 바가 없고 죽어도 죽는 바가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사대에 얽매지지 않으면, 적멸한 성품가운데서 나고 죽는 일상생활을 하게 된다. 사대가 공한 줄 알아 놓아 버리면 일체 고액을 벗어나고 무생법인을 증득한다. 방하하고 방하하라 그러면 천진 면목이 드러나리라.
오늘 내려놓지 못하면 내일 내려놓지 못하고 죽음에 임박해서도 내려 놓지 못한다. 지금 사대 오온이 공한줄 알고 내려 놓아야 금생과 내생이 자유롭다. 그러니 지금 내려 놓을 수 있어야 한다.
내 마음대로 놓아지지 않기에 반야바라밀을 염송하고 수행하라.
물질도 놓고 마음도 놓아라. 주먹을 움켜쥐면 탐욕이고 주먹을 펴면 불성이다.
탐진치 삼독가운에 일체법이 다 갖추어져 있다. 마음이 탐욕을 만들고 진애를 만든다. 마음을 떠나 달리 있는 것이 아니다. 반야의 지혜로 보면 무명이 무명이 아니고, 환화가 법신이다. 사대와 오온으로 이루어진 것을 나라고 생각하고 취하면 탐심, 뜻대로 되지 않으면 진심을 일으키게 된다. 이 탐심 진심은 바다에서 파도의 물거품과 같이 일어났다 꺼지는 현상과 같다.
중생심을 떠나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생사를 떠나서 열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님을 아는 것이 반야지혜다. 이 지혜로 넘쳐날 때 우리의 삶은 세간을 여의지 않고 중생심을 버리지 않고 그 자리에서 불성이 원만히 드러난다. 반야바라밀은 불생불멸의 도리를 아는 것이다. 우리는 현실의 삶에서 불법의 꽃을 피워야 한다. 더러운 진흙탕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과 같이.
생사속에서 무상한 불생불멸의 도리를 아는가? 생멸하는 육체속에 부처가 있다. 우주법계에 부처가 있다. 붉은 고기 덩어리이에 무위진인이 있어 얼굴을 통해서 출입한다.
마하반야바라밀을 부르는 것은 나를 부르는 것이며 진실처를 부르는 것이다.
일체법이 개시불법이라 본성의 자리를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 법이 특별한 것이 아니고 수행이전에 본래 갖추어져 있는 것이기에 진실히 부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생멸의 세계가 불생불멸의 참자리인 줄을 알게 된다. 불생불멸을 알면 모든 부처님이 현전함을 보게 될 것이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바라는 것도 없고 얻으려는 것도 없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얻으려는 마음이 사라지면 헐떡이는 마음이 사라진다. 헐떡이는 마음이 사라진 자리가 부처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며 불성생명이다. 그러니 쉬고 쉬어라. 쉬는 것에서 부터 시작된다.
우리 마음이 밖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에 향상 바쁘다. 이게 중생심이다. 밖으로 구하려는 마음도 쉬고 생각도 쉬면 부처님이 나타난다. 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하면 일념무념이 되어 眞心이 되고, 얻을 바 없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되며 정법안장을 얻게 된다. 실상의 바다에 뛰어 들어가 오온이 공한 나를 내려 놓는 것이 신명을 놓아버리는 것이며 실상이 드러나는 것이며 불성의 공덕이 드러나는 것이다.
백장스님이 부처님의 본뜻은 어디 있습니까하고 물으니 마조스님은 신명을 버리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부처님의 참 모습은 반야바라밀이다. 이 반야바라밀 참 모습은 부처님의 무한한 생명과 무한의 지혜, 무한의 덕성, 무한의 자비, 무한의 위신력, 무한의 조화이다. 이러한 공덕이 부처님께서는 충만하게 계시고 그것이 우리의 진실한 모습이고 진리의 진상이다. 그 참된 모습에 우리는 눈떠야 한다. 기도 할때도 부처님의 진실한 모습 부처님의 진리임을 알고 진실한 모습에 마음을 두고 기도하고 발원하고 정진해야 한다.
눈 앞에 보이는 것, 겉모습은 거짓 모습이다. 거짓 모습임을 알고 생각에 두지 말고 참모습, 참으로 있는 진리의 모습에 눈을 두어야 한다. 무한의 생명, 무한의 자비, 무한의 공덕, 무한의 지혜, 무한의 조화, 무한의 기쁨, 이러한 공덕이 부처님의 참모습이고 우리의 참모습이다.
-광덕큰 스님 법어중에서-
廬山烟雨 浙江潮 여산의 안개비와 절강이 물결이었네
未到千般 恨不消 가보지 못했을 때는 천맘가지 한이었는데
到得歸來 無別事 가서보고 돌아오니 별다른 일은 없고
廬山烟雨 浙江潮 여산의 안개비와 절강의 물결이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