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59년 11월 호법법회가 봉행되었습니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이용희 작성일2015.11.06 조회34,738회 댓글0건본문
불기 2559년 11월 호법법회가 봉행되었습니다.

호법발원
저희들은 이 땅에 감로법을 널리 펴
부처님 정법이 영원히 머물며 겨레와 국토를
법성 광명으로 빛낼 것을 굳게 서원하옵니다.
<불광사 선덕 혜담스님 법문요약>
*법당의 메아리*
믿음은 용기와 결단이다.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어려움이 있게 마련이다. 불교가 있게 된 전제조건이 일체개고에서 출발한다. 고를 벗어나기 위해서 가르침을 준 것이 불교다. 이런 어려움은 누가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내 마음에 있다.
우리들 마음 가운데서 탐진치 삼독의 중생심이 있기 때문에 불행이 오지 않는가 생각해봅니다. 불행에서 벗어나려면 내 속에 있는 중생심을 없애야합니다. 중생심을 없앤다는 것은 원래번뇌가 없는 그 부처님을 찾아야합니다. 모든 것을 다 이루신 원만한 원래 불행이 없는 그 부처님을 찾을 때 우리는 중생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겁니다.
부처님은 형상이 아니다. 즉 부처님은 우리의 생각이나 감촉으로 알아지지 않는다. 형상이 없는 부처님을 믿는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고 믿음이 필요합니다.
호법월보
[1] 부처님은 법성자체이시므로 무한의 지혜이시며 무한의 능력이시다. 이점은 부처님의 십력이나 18불공법에서 짐작하는 바이다. 우리들의 하는 일이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되어갈 때, 또는 고난이나 불행을 만났다면 그러한 사태를 가져오게 한 근본원인은 우리들 자신의 범부적 판단에서 오는 것이므로 불행에서 벗어나자면 자신의 범부적 아집을 버려야한다. 그리고 뛰어난 지혜이시며 자비이신 부처님께 의지하고 그 마음을 비워야한다. 부처님은 대자비 위신력이시지만 범부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부처님은 감각적인 인식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고 믿으며 범부적 생각을 비운다는 것은 어려울지 모른다.
여기서 신앙은 용기가 있어야 하며 하나의 결단이 필요한 것이다. 용기를 내어 의혹된 생각이나 범부적 망념을 털어버리고 대자비이시며 근원 진리인 부처님을 믿자. 부처님의 지혜에 의지하고 아집을 버렸을 때 사태는 부처님의 지혜로 이루어간다. “우리로서는 할 수 없다”는 상황에서도 부처님의 위신력은 사태를 바꾸어 원만한 결과를 낳게 한다. 무엇보다 아집과 의혹된 마음을 버려 대자비 대위신력인 부처님을 믿을 것이다.
[2] 우리들의 참된 소망이 이루어지자면 우리의 마음을 고루어야 한다. 무엇보다 대립이나 미움이나 노여움이나 다툼의 감정이 없어야 한다. 더 나아가 감사하는 마음이어야 한다. 아무리 부처님께 감사하더라도 형제나 부모나 이웃과 화합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않는다면 소망은 이룰 수가 없다. 부처님께 감사하고, 부모님께 감사하고 가족에게 감사하고 온 이웃에게 감사하여야 한다. 마음에 대립을 가지고 있으면 부처님의 은혜, 부처님의 자비 위덕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미워하고 대립할 어떠한 이유도 명분도 있을 수 없다. 진리는 모두를 하나로 한 한 몸이며 자비이며 광명이기 때문에 진리를 어기고서는 소망과 성취를 바랄 수 없는 것이다.
[3] 무엇이든 참으로 이루자면 부처님의 진리에 전적으로 의존하여야 하지만 다시 몇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첫째 언제나 베푸는 마음이어야 한다. 이것은 자비한 마음에서 온다. 힘으로든 지혜로든, 물자로든, 무엇으로든 항상 주고자 하는 마음이어야 한다. 다음에 끊임 없이 부처님과 부처님의 지혜를 염하고 정성을 바쳐야 한다. 열정을 기울여야 한다. 이와 같은 적극적인 행동이 없어서는 전진을 보기 어렵다. 힘과 정성을 기우려야 한다.
끝으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부처님의 자비 위신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믿어야 한다. 신념도 없고 적극적 정진도 없고 열정도 없다면 무슨 일이든 성취할 수 없는 것이다. 만사에 있어 진리를 믿고 지혜와 힘과 열성을 기울인 자만이 성취의 과실을 걷을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불성을 보라
<열반경의 부처님 말씀 요약>
[1] 사람들은 누구나 불성을 갖추고 있는데 어찌하여 부귀빈천의 차별이 있다든지 또는 살생하든지, 속이든지 하는 궂은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것은 비유를 들면 궁정에서 일하는 어떤 역사(力士)가 미간을 자그마한 금강주로 장식하고서 씨름을 했었다. 씨름하던 중 이마를 쳐서 금강주가 살 속으로 들어가 부스럼이 됐다. 역사는 금강주를 잊은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한편 그 상처를 치료하기 위하여 의사에게 갔다. 의사는 단번에 그 부스럼이 살 안에 박힌 구슬 때문인 것을 알고, 거울을 들고 얼굴을 비추어 거울 속에 구슬이 비추어 지도록 하여 그것을 역사에게 보였다.
사람들의 불성도 이와 같아서 훌륭한 선지식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불성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처럼 불성은 있어도 탐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덮이고, 업보에 결박되어 제각기 다른 미혹된 환경을 만나는 것이다.
역사가 의사에 의하여 밝은 거울 속에서 금강주를 본 것처럼 사람들도 부처님의 지혜에 의하여 번뇌를 넘어서 불성을 보게 된다.
[3] 털 빛깔이 혹은 검고, 혹은 희고, 혹은 붉어, 여러 가지 빛을 달리한 젖소에서도 젖을 짜면 모두 같은 흰 젖이 나오는 것처럼 환경이 다르고 생활이 다른 여러 종류의 사람들과 그들의 업보가 각기 다른데도 상관없이 같은 불성을 갖추고 있다.
또 설산에 귀한 약이 있는데 깊은 숲속에 묻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옛날에 어떤 지혜 있는 사람이 향기를 맡으며 약을 찾아 캐서 통에 모았는데 그 사람은 산중에서 죽었다. 약은 그대로 였으나 세월이 감에 따라 통 안의 물은 썩어 흐르는 곳을 따라 변화하여 맛을 달리했다. 불성도 번뇌의 숲에 덮여 사람들이 좀처럼 쉽게 보지 못한다. 이제 여래가 숲을 열어 불성을 보인다. 불성은 한맛이지만 번뇌 때문에 여러 가지 다른 맛을 내고 사람들은 각기 다른 생애를 받는다.
[3] 모래나 잔돌을 부술 수는 있으나 금강석은 부수지 못한다. 불성은 금강석과 같아서 부술 수가 없다. 사람들의 심신은 모래나 잔돌이고 불성은 금강석이다.
불성은 참으로 대장부의 상이다. 세간에 남. 여의 차별은 있어도 불법에는 남녀의 차별을 세우지 않고 다만 불성을 지니므로 존귀한 것이다.
금의 광석을 부수어 녹여 제련하면 귀한 황금이 된다. 범부의 거친 마음을 녹여 번뇌의 찌꺼기를 버리면 어떤 사람도 차별 없이 평등하게 불성을 열어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